소설리스트

78화 (78/199)

78화

각성하는 순간, 에스퍼들은 벼락을 맞듯 알게 된다. 죽음을 강제로 맞이할 운명이 자신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소스라치는 각성통과 함께 찾아오는 이능은 제아무리 유용하다 해도 스스로의 심장을 찌르는 칼이요, 수명을 좀먹는 질병과 같은 것이었다. 그렇기에 가이드의 존재란 에스퍼에게 더없이 소중했다.

그러나 지구가 아닌 위스로데 대륙의 능력자들은 가이드가 무엇인지도, 가이드의 존재 유무에 대해서도 전혀 알지 못했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분명 그랬다.

하지만 지안이 재각성을 하며 일어난 현상으로 인해, 적어도 제도의 능력자들만은 분명히 알게 된 것이다. 무어라 이름 붙이고 명명해야 할지는 알 수 없으나 자신들을 구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 구원자가 있었다.

어떤 사실을 알기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듯, 이들 모두 똑똑히 지안의 존재를 인지했다. 갑작스럽게 드러난 이 진실은, 거대한 파문을 일으키며 순식간에 대륙 전역으로 뻗어나갔다.

그러나 사고를 친지 겨우 하루가 지난 뒤였으므로 지안은 이 같은 이변을 정확히 인지하지 못했다. 이른 새벽, 눈을 뜨자마자 망했다는 생각을 되풀이하긴 했지만 그뿐인 하루였다.

다시 눈을 감았다 떴을 땐 완전히 날이 밝아 있었다. 아직까진 무엇 하나 감당해야 할 것이 없는, 평범한 아침이었다.

그러나 그조차 이비엔의 방문으로 끝이 났다. 황녀가 찾아왔다는 사실을 전하는 공작의 말에, 지안은 형사 취조를 앞둔 피의자처럼 속을 졸여야 했다.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마음이 영 동동거렸다. 아니지,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질렀다는 점을 생각하면 큰 잘못을 저지르긴 했다.

지안은 막막한 얼굴로 악시온에게 물었다.

“제가 가이드란 걸 말해야 할까요?”

혹시나 삼황자가 이 말을 듣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미 거의 다 들통난 마당이라 질문에 거리낌은 없었다. 지안의 질문에 악시온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안 된다.”

“그럼 제가 저에 대해서 뭐라고 말해야 할까요?”

“…….”

“공작님도 모르시는군요. 하긴, 다시 생각해 보니 제가 답이 없는 문제를 질문했네요. 공작님을 난처하게 만들려던 건 아니었어요. 그냥 상의를 좀 하고 싶었는데……. 일이 이렇게 되어 버려서 그런가, 마음에 여유가 없어서…….”

“나는 그대를 말렸다.”

질책 어린 말에 지안은 쓴웃음 지으며 수긍했다.

“그랬죠. 방금 한 말은 잊어주세요. 우선은 제가 좀 더 생각해 볼게요. 전하껜 잠시 기다려 달라고 전달해 주세요.”

“어쩔 셈인가?”

“모르겠네요.”

한숨 섞인 대답에 악시온이 물었다.

“지금이라도…… 북부로 돌아가지 않겠나?”

“저도 그러고 싶어요. 하지만 그러려면 가장 먼저 삼황자 전하를 설득해야 할 텐데, 전하께선 동행해 주시지 않으실 거예요. 결국…… 그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지도 몰라요. 그래서 여쭤보는 건데, 그 이동 능력자는 잡혔나요?”

“아직이다.”

“그렇군요. 하긴, 잡았다면 제게 말씀해 주셨겠죠. 그럼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전하께 부탁드리면…… 들어 주실까요? 거절당하더라도 다시 한번 이야길 꺼내 보는 게 좋을까요?”

머리를 쓸어올리며 고민하는 지안의 모습에 악시온은 전날 밤 마차에서 삼황자를 도발한 걸 후회했다.

우연히 지안이 자신의 옆에 앉았고, 졸음을 이기지 못해 기댄 것에 불과함에도 그의 앞에서 보란 듯 지안을 껴안고, 머리칼을 정리했다.

과시하고 싶었고, 으스대고 싶었다. 그래서 그렇게 했다. 전속 시녀의 이름을 두고 거짓말한, 지안을 숨기려 한 삼황자에게 사소하게나마 보복하고 싶었다.

하지만 고뇌하는 지안의 모습을 보니 괜한 도발을 저질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이드인 걸 밝혀선 안 된다고 말했지만, 이제 와 지안의 정체를 숨길 순 없다는 건 악시온도 잘 알고 있었다. 능력자로서 그 또한 지안의 재발현 현상이 무엇을 야기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비산하는 지안의 기운을 에다의 성력이 흩어지지 않도록 감싸 제도에 흩뿌렸다. 일치감치 그 자리에서 눈치챘고, 신전의 고위 사제들이 직접 증언해준 것이기도 했다.

심각한 얼굴로 침묵하고 있던 지안이 말했다.

“거짓말해 봤자 황녀 전하께선 금방 아실 거예요. 그러기도 싫고요.”

“……가이드란 걸 밝히겠다면, 그렇게 해라.”

“네? 갑자기 왜 번복을…… 반대하시는 것 아니었나요?”

“더 이상 그대의 정체를 숨길 수 없으리란 걸 인정한다.”

그렇게 말하며, 악시온은 뒷말을 삼켰다.

‘오직 나 하나를 살려내기 위해서 당신이 차원을 건너온 것은 아닐 것이다.’

공교롭게도, 그 순간 지안 역시 악시온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바로 어제, 셀 수 없는 능력자들의 손을 잡고 또 잡으면서 조그만 추측 하나가 싹튼 것이다.

어쩌면 자신이 게이트를 통해 차원을 넘게 된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 * *

해명의 순간이 찾아왔다.

찻잔을 다 비워 냈는데도 왠지 목이 타는 것 같았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지안은 애꿎은 찻잔만 만지작거렸다. 그러나 설명을 요구하는 침묵 탓일까,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누구 하나 말을 꺼내지 않는 테이블 위로 알싸한 차 향기가 적막히 풍겼다.

지안은 짧게 한탄했다. 나는 어쩌다 재각성을 해 버렸나. 할 거면 차라리 지구에서 하지, 왜 하필 여기였나. 왜 이곳인가. 그러나 이제 와선 소용없는 가정이요 후회였다.

천천히, 지안의 입이 열렸다.

“……저는, 가이드예요.”

“무슨 말이야?”

“세 분과는 완전히 다른 개념의 능력자라고 말씀드리면, 설명이 될까요? 저는 공작님처럼 힘이 세지도 않고, 삼황자 전하처럼 불을 다루지도 못하고, 황녀 전하처럼 폭발을 일으킬 수도 없어요. 보통 사람과 같죠. 하지만 능력자들의 폭주를 진정시킬 순 있어요. 폭주의 위험이 없는…… 능력자들을 위한 능력자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아요.”

“뭐? 잠깐만,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네 말은…… 이능을 사용해도 폭주하지 않는단 말이야?”

이비엔의 질문에 지안은 마른침을 삼켰다. 마지노선처럼 지켜왔던 비밀이었으나, 신전에서 수백에 달하는 에스퍼들을 치료해준 뒤다. 이제 와 무슨 말을 하든, 어떤 변명과 거짓말로 포장하든, 아무 소용 없을 것이다. 그런 건 뻔하고 속 보이는 기만에 불과했다.

후회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기어코 진실이 혀 위에 올라앉았다.

“맞아요. 저와 같은 사람을, 가이드라 불러요.”

“그럴 수가…… 짐작은 했지만, 정말인 줄은…….”

충격으로 이비엔이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일리아스가 날카롭게 질문했다.

“가이드라 지칭하는 단어가 있다는 건, 너와 같은 사람이 또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좋겠지만…….”

지안은 말문을 흐리며 악시온을 바라보았다.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이는 공작의 모습에 지안은 용기를 내 다음 말을 이어나갔다.

“저처럼 차원을 넘어 온 사람이 많을 것 같진 않네요.”

“무슨 말이지?”

“저는 다른 세계에서 왔어요. 타국이나, 바다 너머의 대륙 같은 걸 말씀드리는 게 아니에요. 저는…… 게이트를 통해 이곳으로 왔어요.”

“게이트?”

“차원과 차원을 연결하는 일종의 통로 같은 건데……. 관련한 전문 지식이 없어 자세히 설명하기 힘드네요. 하여간 제가 처음으로 발을 디딘 곳은 북부의 얼음산이었어요.”

어렵사리 비밀을 토해낸 지안은, 도움을 청하는 얼굴로 공작을 바라보았다. 악시온은 그녀가 바라는 대로 부족한 설명을 보충해 주었다.

“공작가엔 대대로 내려온 비밀이 하나 있습니다. 오데르겐은…… 수백 년간 가이드의 존재를 비밀에 부쳐 왔습니다.”

이어진 악시온의 설명에 이비엔과 일리아스의 표정이 급변했다. 처음으로 나타난 가이드가 지구로 되돌아간 사실이나 가이드가 자살하는 등 치부에 가까운 이야기까진 나오지 않았지만, 오데르겐 공작가가 그동안 가이드를 독점해온 정황을 파악하기엔 충분한 설명이었다.

그의 뒤를 이어 지안이 공작과 만나게 된 경위와 이동 능력자에 의한 사고, 불행히 노예상을 조우하게 된 것 등의 지난 이야기를 풀어내자 매 순간마다 황녀와 삼황자의 표정은 급변을 거듭했다.

지안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첫 가이드와 사랑에 빠지고 마는 에스퍼들의 통상적인 반응에 대해 주의를 주었다. 단순 이론에 가까운 교과서적인 내용이었지만, 지금껏 나온 이야기들 중에서 가장 충격적이라 할 만한 진실이었다.

이비엔은 흡사 비명이라도 지르는 것처럼 반박했다.

“네 능력이 일반적인 능력자들의 이능과 궤를 달리한다는 건 알고 있었어. 알면서도, 여태 모른 척 기다렸지. 네가 직접 알려주는 게 아니라면 아무 소용 없었으니까.”

“…….”

“너도 알겠지만, 발현으로 고통받는 나를 구해 준 순간부터 난 네게 호감을 품었어. 그랬는데, 그게…… 일반적인 반응에 불과한 일이라니? 그럴 리 없어! 난 진심이었다구!”

“알아요. 진심이 아니란 게 아니에요. 전 그저, 능력자와 가이드 사이에서 생겨나는 호감이, 능력자들 간에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반응의 일종이라는 걸 인지하시란 뜻에서 말씀드린 거예요. 그러니까 제 말은…… 저라는 사람의 본질을 보셔야 한다는 거죠.”

“본질이라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가이드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그 호감을 무작정 키워선 안 돼요. 냉철하게 생각하고, 또 저를 경계하실 줄도 알아야 해요. 기본적으론 가이드도 타인에 불과하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