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7화 (77/199)

77화

뿌득 이를 간 아론은 길드원 몇몇을 신전에 급파해 신전에서 벌어진 일을 알아내도록 지시했다. 마음 같아선 조사원으로 분장을 해서라도 직접 신전으로 향하고 싶었지만, 세 번씩이나 잘못을 반복할 수는 없었다.

이미 두 번 실패했다. 더구나 삼황자과 공작이 합심해서 지안을 지키고 있다는 걸 확인한 뒤다. 무작정, 충동적으로 달려가 그녀를 빼 올 순 없었다.

이동 능력은 섬세한 조절을 요하는 이능이라 자칫 잘못해 집중력이 흐트러졌다간 지안을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었다. 예컨대 몸의 일부가 이동되지 않아 그대로 사망해버리는……. 그런 일도 가능한 것이다.

여태 그런 식으로 죽여온 사람이 수십이 넘었고, 그렇게 죽여버린 사람들에게 아무 감흥 없던 아론이었지만 지안의 죽음만은 어쩐지 두려웠다.

그녀의 죽음이 자신에게서 기인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아론은 결코 고려하지 않았다. 있어선 안 되는 일, 상상조차 하기 싫은 일이기 때문이었다.

조급함을 억누른 아론은 파비안을 불러 물었다.

“……작위 구입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지?”

평소보다 더 음울한 목소리에 파비안은 잔뜩 긴장한 채 답했다.

“몰락 귀족 중 적당한 자를 물색 중입니다.”

“작위를 매매하려는 자가 없다면, 몰락 귀족 중 적당히 고립된 놈으로 찾아봐.”

“고립이라면?”

“거래를 거절할 경우, 죽여 없애서라도 신분과 이름을 빼앗아야지. 그리고 적당한 사교계 모임도 알아보도록. 기왕이면…… 황태자가 참석할 가능성이 있는 곳으로.”

황태자라니? 파비안은 찝찝함을 감추지 못하며 되물었다.

“대체 뭘 계획하고 계시기에 귀족 행세를 하려 하십니까?”

“그냥…… 단순 납치?”

말하며 아론은 씩 웃어 보였다. 위험스러운 웃음에 파비안의 등 뒤로 쭈뼛 소름이 돋았다.

“……설마 황태자 납치를 꾸미시는 건 아니겠지요.”

조심스럽게 묻자 아론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시커먼 사내를 납치해서 어디다 써먹겠어?”

“……그럼?”

“안심해, 파비안. 내가 노리는 사람은 따로 있으니. 황태자는 그 사람을 노리기 위한 도구 같은 거다.”

점점 더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는 아론의 모습에 파비안은 더 캐묻는 걸 그만뒀다. 자세히 알아봤자 자신만 위험해질 테고, 특히 길드장이 꾸미는 일에 대해선 모르는 게 약이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아론은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일을 한 사람에게 맡겨놓는 인물이 아니었다. 여럿에게 다양한 지시를 하거나, 때로는 본인이 직접 나서서 뭐가 어떻게 되었는지도 모르게 원하는 결과를 얻어내는 것이 바로 밤까마귀 길드의 길드장 아론 베르그만이었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중에서도 특히 고약한 수법을 즐겨 사용한다는 그의 성미를 왜 모르겠는가. 궁금증을 묻어둔 파비안은 떨떠름함을 감추며 말했다.

“오늘 안으로 보고 드리겠습니다.”

그대로 아론의 집무실에서 빠져나온 파비안은 한숨과 함께 귀족 명부를 뒤적였다. 모쪼록 길드장이 황실이란 벌집을 건드리지 않길 바라며, 뒤탈이 없을 만한 적당한 인물을 골라내기 시작했다.

* * *

별이 총총 떠오를 즈음이 되서야 모든 가이딩이 끝났다.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능력자들은 누구 하나 신전을 떠나지 않았다. 한 번이라도 더 지안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지안과 그 일행은 이븐의 도움을 받아 신전을 벗어나야 했다. 신전의 대리석 바닥을 들어내고 그 아래로 땅굴을 파 이동한 것이다. 이븐이 없었다면 감히 시도하지 못했을 도주였다.

일리아스는 말없이 화염을 일으켜 길을 밝혔고, 이비엔은 흙이 묻지 않도록 드레스 자락을 들어 올렸다.

축축한 지하에 여럿의 발자국 소리가 울렸지만, 입을 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저마다 생각에 골몰하느라 바빴던 탓이었다.

오랫동안 이어진 침묵을 깬 건 이븐이었다.

“저어…… 도착했습니다. 제도의 뒷골목 인근이라 목격자도 별로 없을 겁니다.”

그 말과 함께, 머리 위로 장정 두셋이 드나들 법한 구멍과 작은 흙 계단이 생겨났다.

“고마워요, 이븐.”

지안의 말에 이븐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단순한 감사 인사인데…… 왜 이렇게 마음이 술렁이는지 알 수 없었다.

“……도움이 되어 기쁩니다. 잠시 기다리고 계시면 마차를 불러 오겠습니다.”

“아니, 그대는 충분히 제 역할을 다했다. 용건은 끝났으니 이만 헤어지도록 하지.”

이비엔의 말에 이븐은 당황한 얼굴로 지안을 돌아보았다. 내심 함께하자는 말을 기대했던 탓이었다.

이름깨나 날린 용병으로서 이븐은 자신의 능력을 믿었다. 혼란한 와중에도 처신을 깔끔하게 했고, 특히 신전에서 적잖이 도움이 되었다고 자신했다.

그랬는데……. 그걸론 부족했나?

불안으로 요동치는 이븐의 파장에 지안은 서둘러 이븐의 손을 잡았다.

“덕분에 무사히 신전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어요.”

“어디로…… 가십니까?”

“……공작님의 저택으로요. 서쪽 외곽에 있어요.”

“지안! 그걸 말해 주면 어떡해!”

“제 얼굴을 본 사람이 한둘도 아니고……. 곧 알려질 게 뻔한걸요. 그리고 이븐에게는 알려 줘도 괜찮을 것 같아서요. 그렇죠, 이븐?”

“누가 되는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이븐의 대답에 지안은 빙긋 웃으며 이비엔을 돌아보았다.

“이븐이 저희에게 피해를 끼칠 일은 없을 거예요.”

“그 앤 오늘 처음 만난 사람에 불과해. 우린 저 여자의 정체도 잘 모른다고! 도움 좀 받았다고 지금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의 말을 믿는 거야?”

“정 안 되면 다시 전하의 시녀로 황성에 들어가죠, 뭐. 아니면 북부로 떠나든가. 우선은 집으로 돌아가요. 그리고…… 모처럼만의 외출이었는데 망쳐서 죄송해요, 전하.”

“…됐어. 그런 사과 받으려 널 도운 게 아니란 말야. 지금은 그냥 넘어가지만! 내일 다시 저택에 방문할 거야. 오늘 있었던 일…… 그땐 제대로 설명해야 해.”

“그럼요.”

지안의 대답에 이비엔은 사납게 치켜뜬 눈초리를 그제야 거두었다. 그러면서도 이븐을 쏘아보는 걸 잊지 않았다.

손을 흔들며 헤어진 일행은 각기 셋으로 나뉘어졌다. 이븐은 본래 머물렀던 여관으로, 이비엔은 황성으로, 나머지는 저택으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지안은 꾸벅대며 졸았다. 하루 온종일 유지해왔던 긴장이 마침내 풀린 탓이었다.

제게로 쏟아지는 지안의 머리를 가만히 받쳐 준 악시온은, 불붙은 눈동자로 노려보는 일리아스를 모른 체하며 흐트러진 지안의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었다.

세 사람을 태운 마차의 바큇살은 단조로운 속도로 평화로이 굴러갔다. 그러나 마차 내부의 상황은 그리 평화롭지 못했다.

살얼음 낀 듯 위태로운 침묵이 일리아스의 물음에 깨어져 나갔다.

“가이딩이 뭐지?”

“……알 것 없으십니다.”

무성의한 단답에 일리아스는 버럭 소리치려다 말고 으득 이를 갈았다. 고작 저런 도발에 넘어가고 싶지도 않았거니와, 괜한 말다툼으로 지쳐 잠든 지안을 깨우고 싶지 않았다.

“답하지 않겠다 이거군. 상관없다. 당사자에게 물어보면 그만이니.”

악시온은 대답 대신 지안을 바투 끌어당겨 안았다. 그것을 본 일리아스의 미간이 보란 듯 구겨졌다. 치미는 굴욕감에 당장이라도 지안을 빼앗아 안고 싶었지만, 지안이 공작에게 의지하는 한, 이는 좋은 선택지가 아니었다.

내심 자신과 마찬가지인 처지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경계를 푼 지안이 공작에게 기대는 모습을 보는 건, 정말이지 끔찍하고도 비참했다.

일리아스는 격노를 눌러 참으며 지안과 악시온이 나눈 대화를 곱씹었다. 그러면서 하루 내내 보고 들은 것을 이해하려 했다.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했다. 지안은, 자신과 같은 능력자가 아니었다.

아무리 재발현을 했다 한들 이렇게나 많은 능력자들을 진정시켜줄 수는 없다. 그러나 지안은 불가능한 일을 해냈고, 그런 후에도 그저 평범하게 피곤해할 뿐이었다. 무리하면 크게 앓게 되는 것 같으나. 공작의 반응으로 판단하건대 여타의 능력자들처럼 힘의 무리한 사용이 곧바로 생존과 직결되는 건 아닌 듯했다.

그것도 모르고. 지금껏 단단히 착각해 왔다.

일리아스는 우울한 낯으로 잠든 지안을 바라보았다. 이제 와 생각해 보니 감옥의 창살 너머에서 지안이 외쳤던 말은 죄다 거짓말이었음이 분명하다.

‘죽고 싶지 않다고……. 며칠이라도 좋으니 살고 싶다던 그 말도 다 거짓이었나.’

뻔뻔한 그 거짓말에 화가 났다. 늦게라도 사실을 알려주지 않은 야속함에 속이 상했고, 배신감마저 일었다.

어린 시절, 꼼짝없이 탑에 갇힌 채 철문을 두드렸던 게 제 인생 최악의 경험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심장에 쇄기풀이 박힌 듯 고통스러웠다.

잠든 지안의 어깨를 붙잡아 흔들며 묻고 싶었다. 대답해. 뭐라고 말 좀 해 봐! 내가 그렇게 싫었나?

신전에 모여든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자들에겐 그토록 쉽게 손을 뻗어 주었으면서. 죄다 구해 주었으면서! 왜 내겐 그렇게 선을 그은 건지 말해! 말해 봐!

외쳤으나, 울부짖었으나, 그것은 머릿속 상상으로 그쳤다. 결코 소리쳐 말할 수 없는 진심인 탓이었다. 성질대로 그렇게 물었다가, 진저리치며 다신 보고 싶지 않다고 하면 어떡한단 말인가?

이미 넌더리 난다는 말을 들었다. 불같은 성질머리를 지적당했다. 다른 사람이 그리 말했다면 코웃음 치거나 화를 냈겠으나, 그 말의 발화자가 지안이었으므로 일리아스는 침묵과 인내를 택했다. 애써 착잡함을 눌러 삼켰다.

그러면서 일리아스는 처음으로 약자가 된 스스로를 실감했다. 발현한 이후 한 번도 약자의 입장에 서 본 적 없었건만, 더는 아니었다. 기막힌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불의 이능을 다루게 된 이후로 자신은 늘 위험인물이었고, 강자였다.

그랬는데…… 지안의 앞에선 달랐다.

그녀의 앞에서 위축되는 건 늘 자신이었다. 겁먹은 얼굴, 흠칫 물러서는 몸짓. 고작 그런 사소한 것에 내가 얼마나 상처받았는지. 얼마나 추락하고 두려움에 떨었는지 너는 알지 못하겠지.

“으응…….”

순간, 지안이 뒤척이며 일리아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없는 안식과 고통을 주는 여자. 그럼에도 편안하게 잠든 그 모습이 너무나 예뻐서, 일리아스는 원망조차 할 수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