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지안은 꼼짝없이 기도실에 앉아 몰려드는 에스퍼들을 가이딩해 주었다.
재각성을 한 덕분인지, 일일 가이딩 한계를 훌쩍 뛰어넘었는데도 그리 힘들지 않았다. 벌써 수십 명은 가이딩해 준 것 같은데 기운이 줄어들 기미 역시 보이지 않는다. 고작해야 바다에서 물 한 바가지 덜어낸 수준이었다.
문제는 기도실 앞에 줄 선 사람이 도통 줄어들지 않는단 점이었다. 너무 많은 파장이 한데 겹쳐서 느껴지는 탓에 정확히 몇 명이 몰려든 건지 추산할 수가 없었다. 이래서야 정말 오늘 하루만 백 명을 다 채울 지경이었다.
지안은 피로한 얼굴로 이븐을 불러 물었다. 이븐은 세 번째로 가이딩을 해 주었던 금발의 여자였다. 대지를 다루는 그녀의 능력 덕분에 지금의 질서를 유지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이븐. 몇 명이나 남았나요?”
“어림잡아 백 명은 넘는 것 같습니다.”
“백 명이요?”
어두워지는 지안의 얼굴에 옆에 선 악시온은 다시 한번 지안을 설득했다.
“지안, 지금이라도 그만둬라. 한마디면 된다. 그만두겠다고. 그렇게만 말하면……. 내가 어떻게든 그대를 데리고 신전에서 빠져나가겠다.”
정말이지 솔깃한 제안이었다. 갈등하는 지안을 이븐은 조마조마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지금이야 어찌어찌 능력자들이 통제되고 있지만…… 그녀가 떠난다면 다들 집단으로 폭동을 일으킬 것이다.
그런 일은 감당할 수 없다. 능력 밖의 일이었다. 이븐은 서둘러 악시온의 말에 반박했다.
“그런, 그러시면 안 됩니다. 저들 모두 압니다! 이곳에 당신이 있단 걸!”
“닥쳐라. 내가 모르게 할 수 있다! 지안. 부탁이니 그만둬라. 돌아가고 싶다고 했잖나. 이렇게 되면…… 그대가 바라는 것을 이루지 못할지도 모른다. 붙잡힐 것이다.”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담담한 인정에 악시온은 얼른 지안의 발치에 무릎 꿇은 채 매달렸다.
“부탁이다. 무리해서 가이딩을 하다 잘못되기라도 하면…… 저번처럼 발에 수포가 올라오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거다. 열병을 앓다가 일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잖나. 제발, 이러지 마라.”
“공작님…….”
“이런 식으로 스스로를 혹사하지 마.”
혹사라니. 그 정도로 무리하고 있는 건 아니다. 그저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정신적 피로가 쌓인 것에 불과하다. 이후의 대처와 대응, 더는 숨길 수 없게 되어버린 정체를 어떻게 다시 포장해야 할지. 바로 그런 생각에 매몰되어 버린 탓이었다.
공작님이 진지하게 수포 운운하는 건 좀 부끄럽지만, 거짓말을 일삼은 과거의 나를 탓해야지 누굴 탓하겠는가. 어쨌든 가이딩 때문에 피로하진 않다. 재각성까지 한 마당이 아닌가. 해 보지 않아 모르지만, 앞으로 백 명 정도는 거뜬할 것 같았다.
정말로 걱정되는 건 다른 것이었다. 공작의 말대로 북부로 되돌아가는 일이 요원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 바로 그 불안이 마음을 좀먹고 있었다.
돌아갈 순 있을지. 이만큼이나 큰 사고를 쳐 놓고 돌아간다는 게 과연 가당키나 한 것이지……. 바로 그런 고민이 정신을 피로하게 했다.
가이딩 즉시 울음을 터뜨리는 각성자들의 면면을 보는 것도 큰 부담이었다. 그간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온몸으로, 눈물로 표현하는 에스퍼들의 모습은 충격 그 자체였다.
빨간약과 연고 한 통만 들고 덩그러니 재난 현장의 한가운데에 떨어지면 바로 이런 기분일까. 막막하고 아득했다. 허둥지둥 가이딩을 지속하고 있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마음 한구석에서 조용한 충고가 메아리치는 듯했다.
‘너는 강하지도, 숭고하지도 않아. 너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그러니 그만둬. 지금이라도 포기해.’
미래의 내가 건네는 것 같은 충고에 지안은 질끈 눈을 감으며 수긍했다.
그래, 그 말이 맞다. 나는 평범하고, 이기적이지.
하지만 바로 코앞에서 잔뜩 퍼져나오는 파장을, 한데 뭉쳐진 수많은 울림을 무시할 수가 없다. 이렇게나 선명히 피부에 닿아오는 파장을, 애원을 어떻게 무시한단 말인가?
번민하는 지안의 모습에 악시온은 서둘러 설득을 더했다.
“자칫 이동 능력자가 나타날지도 모른다.”
“……그럴 지도요. 그래도 삼황자 전하가 계시니 괜찮을 거예요.”
“지안, 제발.”
호소에 대답하듯 지안의 눈동자가 빛났다. 그러나 그 안에 확신은 없었다. 있는 것은 오직 선명한 불안과 두려움뿐. 그럼에도 지안은 자신의 결정을 철회하지 않았다.
“공작님. 공작님 말이 다 맞아요. 저도 알아요. 후회할 거란 거. 하지만…… 제가 도망치면 남겨진 사람들은요? 대면하기 전이었다면 모를까. 눈앞에 나타난 사람까지 모른 척하는 거, 저는 못 해요. 그런 건…… 할 수 없어요.”
울먹임이 묻어나는 지안의 말에 악시온의 눈동자가 숙연히 가라앉았다. 호소해 보았자 소용없으리란 걸 안 탓이었다. 지안은 애써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저를 생각해서 설득해 주신 걸 알아요. 감사해요.”
결심을 마친 목소리에 악시온은 시름에 잠긴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그게 그대의 뜻이라면…….”
중얼거린 공작은 고개 숙여 지안의 이마에 가볍게 입 맞추며 속삭였다.
“나 역시 함께 감당하겠다.”
그러지 않으셔도 돼요. 지안은 이렇게 말하려 했다. 결정을 내린 것도, 감당 못 할 사고를 친 것도 전부 자신 아닌가.
하지만…… 일렁이는 악시온의 눈동자와 마주하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선명히 전해지는 애정에 가슴께가 몹시 간지러웠다. 그의 마음이 분명한 무게를 가지고 심장에 와 닿는 걸 알 수 있었다.
형체 없이도 선명한 광채를 발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지안은 곤혹스러운 심정으로 목격해야 했다. 당혹스러우면서도 벅찬 감각이 일순 전신을 지배했다.
언어가 아닌 행동으로도, 눈빛으로도 애정은 전달 가능한 것이었다. 지안은 난생처음 이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녀에게 이러한 깨달음을 준 것은, 악시온 오데르겐이었다.
* * *
아론은 어둡게 침잠한 눈으로 허공에서 휘날리는 빛 알갱이를 바라보았다. 사람을 상대로 함정을 파놓는 일이야 자신도 자주 했던 것이지만, 이처럼 끔찍한 함정은 그도 처음이었다.
당장이라도 달려 나가려는 전신을, 폭주를 감수하더라도 이동을 감행하고 싶은 열망을 이기기가 무척이나 힘들었다. 함정인 걸 알면서도 그 함정에 빠지고 싶었다. 자진해 올무에 걸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공작과 삼황자를 동시에 상대해야 하겠지.
그는 북부의 기사들과 삼황자의 사병이 자신을 찾아 제도를 수색하는 중이란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의 추적을 따돌리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함박눈처럼 제도를 뒤덮는 지안의 기운을 뒤쫓고 싶은 마음을 참아 내는 건 무척이나 어려웠다.
아론은 손을 뻗어 하얀 빛 알갱이를 어루만졌다. 스며들듯 손바닥 안으로 사라진 기운은 찰나의 안락과 평화를 안겨다 주는 동시에,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려 주었다.
“……미치겠군.”
주먹을 움켜쥔 아론은 덫에 빠진 짐승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의 시선은 새하얀 신전의 돔 천장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제도의 풍광 사이로 빼꼼히 솟아오른 신전의 지붕이 몹시 야속했다.
그를 유인하는 함정이 아닌, 지안의 재각성에 따른 현상이었으나 아론은 이 사실을 몰랐다. 그렇기에 그는 삼황자와 공작이 신전의 사제들을 이용해 자신을 유인해내려는 것이라 단정 지었다.
하지만, 제도의 하늘을 뒤덮듯 쏟아지는 기적 같은 모습에 이내 의문이 들고 마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고작 자신을 유인해 내기 위해 이 같은 짓을 저질렀다고 생각하긴 어려웠다.
애초에 이것은 인력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아무리 대단한 능력자라 한들, 비를 부르거나 낙뢰를 떨어뜨리거나 눈보라를 불러올 순 없는 법이다. 만약 가능한 자가 있더라도, 누가 그런 미친 짓을 하겠는가? 자진해서 폭주를 앞당기려는 거라면 모를까.
눈보라처럼 제도를 소복이 뒤덮는 하얀 빛무리는 경이 그 자체였다. 신전의 사제들이 선보이던 신성력도 이보다 더 경이롭진 못하리라.
동공 안으로 비쳐 들어오는 풍광에 아론은 찬탄하듯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눈 하나 깜짝할 수 없게 만드는 전율이 전신을 잘게 흩고 있었다.
그 누가 이 같은 일을 가능케 한 것일까. 신전의 사제들을 모조리 동원해도, 설령 대사제가 나선다 해도 한낮의 하늘에 이 같은 희망을 드리울 순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현상은 대체 무엇으로부터, 누구로부터 말미암은 것인가.
거기까지 생각한 아론은 핥듯이 지안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래. 내 아가씨뿐이지.”
눈물에 젖어 있던 새카만 흑안을 머릿속에 덧그려낸 아론은 절벽 위에 선 듯 아찔한 감각을 맛보아야 했다. 이미 실감하고 있는 그녀의 필요성이 오랜 고통을 연료 삼아 더욱 찬란히 빛을 발했다.
몸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 서 있는데, 마음이 저만치 앞서 달려 나가는 기분이었다. 정말로, 그러고 싶었다. 손톱이 살갗을 파고들 정도로 힘껏 주먹을 쥐었으나 아무 소용 없었다. 폭발하듯 터진 열망이 용암이 되어 전신을, 이성을 태웠다.
“지안……. 지안…!”
뜨거운 화산재에 산 채로 파묻히는 기분이었다. 제도를 뒤덮은 지안의 기운은 적어도 이 순간, 그에게 있어 축복인 동시에 재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