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난감한 얼굴로 하늘을 향해 고개를 쳐든 것도 잠시, 지안은 흠칫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불시에 신전의 지붕에서 뛰어내린 괴한이 지안을 향해 손을 뻗어온 것이다.
헛숨을 들이키며 놀란 것이 무색하게도, 그 시도는 미수에 그쳤다. 허공에 터진 작은 폭발이 남자를 반대 방향으로 날려 보냈기 때문이었다.
이비엔은 충격파에 휘청이는 지안을 단단히 붙잡아 끌어안으며 일갈했다.
“감히! 무슨 짓이냐!”
바닥에 나뒹굴기 무섭게 벌떡 일어나 앉은 남자는 이미 두 눈에 초점이 없었다. 놀란 마음을 진정시킨 지안은 곧바로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남자의 파장이 너무나 흉폭했다.
“저 사람…… 곧 폭주할 거예요.”
“뭐?”
지안은 대답 대신 눈을 가늘게 떴다. 응축되어 터져나온 제 기운이 지금 같은 간접 가이딩이나마 하지 않았다면 저 사람은 진작 폭주하고도 남았다. 잘은 모르겠으나 재각성이 야기한 현상이 저 남자의 폭주를 지연시키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다시금 달려들려는 남자의 모습에 지안은 서둘러 외쳤다.
“기절! 기절시킬 수 있을까요?”
“가능해.”
대답과 함께 이비엔이 손가락을 튕기자 작은 폭발이 남자를 중심으로 순식간에 다섯 차례 일었다.
펑! 펑! 펑! 소음도 소음이지만, 가벼운 폭발이 일어날 때마다 대차게 얻어맞기라도 한 듯 남자의 머리가 좌우로 크게 흔들렸다.
“됐어. 귀 옆에 폭발을 일으켰으니 당분간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할 거야. 그런데…… 뭘 어쩌려고? 게다가 저 사람이 곧 폭주할 거란 건 대체 어떻게 안 거야?”
“나중에요. 나중에 설명할게요.”
대답을 미루며 지안은 서둘러 쓰러진 남자에게 다가가 손을 뻗었다.
아슬아슬 폭주 직전인 상태였지만 가이딩이 어렵진 않았다. 재각성 후라 그런지, 아니면 난데없이 달려든 이 남자와의 매칭률이 좋아서 그런 건지 이전보다 더 가이딩 효율이 좋아진 듯도 했다.
그새 정신을 차린 남자의 입새에서 짤막한 신음이 터졌다.
“아아…….”
“이제 괜찮아요.”
단번에 기운을 쏟아 절반 정도 가이딩을 끝마친 지안은 한결 안심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이제 폭주 위험에서 벗어났으니 이 사람을 쉴 수 있는 곳으로 옮겨달라 부탁하면 될 것이다.
그런데…….
다음 순간 지안은 불길한 사실을 눈치챘다.
왜 이렇게 낯선 파장들이 자꾸 가까워지지?
신전으로 다가오는 에스퍼의 파장이, 한둘이 아니었다. 단순히 착각이라기엔 십수 개의 파장이 점점 일직선으로. 빠르게 이쪽을 향하는 중이었다.
마치…… 내가 가이드인 게 들통나기라도 한 것처럼.
생각과 동시에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한 즉시, 가장 가까이 있던 파장 하나가 인파를 헤치며 나타났다. 파장의 주인은 금발의 여자였다.
눈물로 흥건한 얼굴과 부릅뜬 눈. 단번에 정체를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여자가 지안을 바라보며 말했다.
“……도와줘요! 제발, 살려주세요.”
호소하는 여자의 말에 지안은 짧게 신음했다. 아무래도 그녀는 자신이 가이드란 걸 알고 찾아온 것 같았다. 그럴 리 없을 텐데도.
지안은 뜻밖의 말을 들은 것 마냥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그러나 태연해 보이는 표정과는 달리 머릿속은 폭풍을 만난 듯 복잡했다.
번민은 짧았다. 무시하자. 모른 척하자.
무슨 말이냔 듯 태연히 굴어야만 한다. 당장 실시간으로 에스퍼들의 파장이 가까워지고 있는 판국 아닌가. 얼른 이 자리에서 벗어나야 했다. 자칫 잘못했다간 꼼짝없이 정체가 탄로 나고 말 위기였다!
안타까움이 모래처럼 입 안을 맴돌았지만, 씹어 삼켜야 한다. 그래야만 했다.
같잖은 동정심으로 하나둘 가이딩을 해주기 시작하면 끝도 없을 것이다. 어찌어찌 얽힌 세 명의 에스퍼만으로도 그간 충분히 골치가 아프지 않았나. 더는 누구와도 엮이면 안 된다.
그러니까 난, 저 말 못 들었어. 못 들은 거야.
흔들리는 스스로를 다잡기 무섭게 귓전에 고통스런 울음이 뒤따랐다.
“부탁이에요! 숨을…… 숨을 쉴 수가 없어요! 산 채로 흙 속에 파묻히는 것 같다고요!”
여자의 울부짖음에 파르르 어깨가 떨려왔다.
모른척해야 한다. 그래야 하는데……. 방금 전의 결심이 무색하게도 말없이 오른 손이 내밀어졌다.
살려 달라는 여자의 호소를 외면할 수가 없다. 라영 언니가 남기고 간 잔상이 여자의 얼굴 위로 떠오르는 듯했다.
그러나 미처 손을 다 내밀기도 전에 공작이 손목을 잡아챘다.
“그만둬라. 그래선 안 된다.”
“……저도 알아요.”
어렵게 긍정했으나, 악시온이 바란 긍정은 아니었다. 악시온은 그 미묘한 차이를 단번에 알아차렸다.
“연민해선 안 된다. 탄로 날 것이다. 그대의 정체가.”
지안은 씁쓰레한 미소를 지으며 공작의 말에 동의했다.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제게 연민이 없었다면, 공작님이 지금처럼 제 옆에 있는 일도 없었을 거예요. 그렇지 않나요?”
“그대를 두고! 싸움이 일어날 것이다.”
격양된 악시온의 말에 지안은 고개를 돌려 삼황자를 바라보았다.
“다툼이라면 이미 일어났어요. 그리고 이젠…….”
돌이킬 수 없어요. 도망치기엔 늦었어요.
뒷말을 삼키는 사이 또다시 새로운 파장이 가까워졌다. 이번엔 아이였다. 이래도 가이딩을 하지 않겠냐는 듯, 앳된 얼굴이 인파 사이에서 뛰쳐나왔다. 기껏해야 열 살이나 되었을까.
맹목적인 얼굴로 달려드는 아이를, 지안은 피하지 않았다. 그럴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아이가 치맛자락을 붙잡는 것보다 공작이 자신을 안아 든 게 먼저였다. 다른 손으로 아이의 뒷덜미를 잡아 제지하며 악시온은 다시 한번 호소했다.
“후회할 것이다.”
“후회는 이미 하고 있어요. 그러니 그냥…… 놔 주세요.”
그 말과 함께 한줄기 눈물이 지안의 뺨을 적셨다. 그 지시를, 악시온은 거부할 수 없었다.
지안은 와락 매달려 오는 아이를 거부하지 않았다. 가이딩을 시작하자 기다렸단 듯 엉엉 울음이 터졌다. 아이를 들어 안은 채 일어선 지안은 금발의 여자를 향해 다시 손을 뻗었다.
떨리는 손이 맞닿자 여자의 두 눈이 놀라움으로 번쩍 뜨였다. 믿을 수 없는 무언가와 목도한 듯한 얼굴이었다. 지안은 착잡한 얼굴로 천천히 여자의 손목을 타고 올라 그녀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이젠 괜찮을 거예요.”
위로를 건네고 있지만, 정작 위로를 건네는 지안의 속은 말이 아니었다. 망했다는 생각 외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왜 이렇게 된 걸까.
지안은 허탈한 얼굴로 제도 전역을 뒤덮은 말간 빛 알갱이들을 응시했다.
바로 저 빛 알갱이가, 저 손톱만 한 기운이 지금 이 순간에도 신전으로 에스퍼를 끌어모으고 있었다. 퍼져나간 기운을 통해 에스퍼들이 자신의 위치를 감지하는 게 분명했다.
지안 또한 알려고 하지 않았음에도 사방에 흩어져 있는 에스퍼들을 감지할 수 있었다.
정확히는, 각성자들을.
이제까지처럼 파장으로 에스퍼들이 감지되는 게 아니었다. 눈보라처럼 흩어져 내리는 자신의 기운에 누군가 닿을 때마다 느껴졌다. 마치 누군가 친절히 짚어주듯이 이 사람은 에스퍼, 이 사람은 일반인, 그런 식으로 구별이 되었다.
그리고 불행히도, 그중에 가이드는 단 한 명도 없었다. 팔목에 찬 검사기를 통해 가이드를 판별할 필요조차 없이 그저 자연히 알게 되었다.
이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위스로데 대륙에 가이드는 존재하지 않는다던 공작님의 말은…… 아무래도 사실인 모양이다.
어렴풋이 알고 있었으나. 내내 부정해 왔던 현실이 마침내 눈앞에 도래한 것이다.
* * *
능력자라면 본능적으로 알아차릴 수밖에 없는 가이드의 기운이 바람이 타고 제도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하얀 빛 알갱이와 닿는 순간, 능력자들 모두 느낄 수 있었다. 이것이 자신을 구원해 줄 것이라고.
동시에 그들은 알아차렸다. 자신을 구제해 줄 사람이, 검게 드리운 고통을 거두어 갈 사람이 어디 있는지를.
제도의 능력자들은 본능적으로 신전을 향해 달렸다. 간접적이라 하나 한 번 가이딩을 맛본 이상, 매달림은 맹목적일 수밖에 없었다.
에녹도 이 중 하나였다. 날씨가 드디어 미쳐서 눈이 오나 했던 그는, 작은 알갱이 같은 무언가가 피부에 닿은 즉시 오랜 고통이 사그라드는 것을 느꼈다. 그간 독한 진통제로 막아 왔던 고통이 일거에 가신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그는 알 수 있었다. 이 이능이 어디에서부터 기인하는지를. 표지판도 이정표도 없었지만, 냄새를 따라가듯, 혹은 지문을 더듬어가듯 이 현상의 근원이 느껴졌다.
그 뒤로는 이성이 반쯤 휘발되었고,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신전이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만큼 달려 신전에 도착한 그는, 이내 자신과 같은 능력자들이 신전에 몰려들었단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신전에 몰려든 사람 모두 알음알음 알고 지냈던 동류 능력자들이었던 것이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중얼거리다 말고, 에녹은 서둘러 인파를 밀치고 나갔다. 그리고 한 기도실에 줄 서 있는 능력자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가 찾던 기운의 주인은 바로 그 안에 있었다.
당연하지만 얌전히 줄 서 있을 인내심 따윈 없었다. 무시하고 땅을 박찬 에녹은 기도실 입구를 향해 달리다 말고 보기 좋게 넘어지고 말았다. 뭔가가 발목을 붙든 것이다.
“어억! 뭐야!”
아래를 내려다보니 불쑥 솟은 흙더미가 제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어느 능력자의 농간인가 싶어 막 화를 내려던 순간, 어느새 다가온 금발의 여자가 에녹의 얼굴 앞으로 나무패를 불쑥 내밀었다.
“이거 받고, 줄 서서 차례 지켜.”
“……무슨?”
“말귀를 못 알아듣나? 얌전히 줄 서라고! 그게 싫다면 저 꼴로 만들어주지!”
여자가 가리킨 곳에는 머리만 내놓고 땅속에 파묻힌 사람들이 즐비해 있었다.
저 정도 능력이면 상위 능력자인 게 확실했다. 끽해야 하급 능력자인 자신이 비빌 처지가 아니었다. 에녹은 얌전히 나무패를 받아들고 줄의 맨 뒷자리에 자리 잡았다.
그건 정말이지,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기다림이었다. 줄이 점차 줄어드는 게 눈에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인내심이 실시간으로 닳아 없어지는 것 같았다. 차라리 태양 아래에서 노릇노릇하게 구워지는 게 이보단 덜 고통스러울 것이다.
저 문 너머에 그토록 바래 온 게 있는데. 기다리라니!
차례고 뭐고 다 무시하고 기도실로 뛰어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앞서 이 같은 시도를 한 몇몇 능력자들이 실컷 얻어맞거나 어딘가 부러진 채로, 심지어 나무패도 뺏기고 쫓겨 나간 탓에 에녹은 얌전히 그 생각을 접었다.
그리고 마침내, 에녹의 차례가 왔다.
기도실로 들어선 에녹이 가장 먼저 본 것은 살벌한 얼굴을 한 두 명의 남자였다. 그리고 그 사이에 조그만 여자가 하나.
평범한 나무 의자에 앉아 있는 여자를 두 사람이 호위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심지어 문지기는…… 황녀 전하였다.
“저, 전하?!”
잘못 본 게 아니었다. 건국제 때 먼발치에서나마 황녀를 직접 본 적 있기 때문에 더더욱 확신할 수 있었다.
기막힌 것도 잠시, 에녹은 앞으로 가라는 황녀의 지시에 따라 홀린 듯 지안의 앞에 가 섰다. 가볍게 뻗어진 손을 머뭇대며 잡자, 난생 처음 느껴보는 기운이 천천히 몸속에 퍼져 나갔다.
그 순간, 왈칵 눈물이 터졌다.
“아…….”
오랫동안 기다려 온 무언가와 조우한 듯, 깊숙이 가라앉아 있던 감정이 들끓었다. 차곡차곡 쌓여온 고통이 설탕처럼 녹아 사라졌다.
불가해한 감격과 격랑에 몸을 떨며 에녹은 질문했다.
“당신은…… 당신은 대체 누굽니까?”
그 질문에 지안은 말없이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