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겁에 질려 허둥허둥 두 팔과 다리를 놀리는 셀스하임 영애의 모습은 빈말로도 좋아 보이지 않았다.
단순히 겁만 주려 한 건지 드레스 자락을 살라 먹던 불길은 금방 사그라들긴 했지만, 타다 만 옷차림새며 울음이 터진 얼굴은 이미 엉망이었다. 뻔뻔스럽고 오만한 귀족 영애가 단번에 구경거리로 전락한 것이다. 서럽게 울음을 터뜨리는 백작 영애를 감싸며 오티스가 외쳤다.
“이 무슨! 무슨 짓이십니까 전하!”
대답은 그들의 뒤에서부터 들려왔다.
“지금 누구 앞에서 목소리를 높이는지 모르겠군. 황족 모욕죄로 이 자리에서 화형이라도 당하고 싶나? 아니라면 입을 닥쳐라, 알스페트 영식.”
“신전에서 그런 짓이…… 가당키나 합니까?”
오티스 알스페트의 항변에 일리아스가 비죽이 웃었다.
“내가 황태자궁도 불태웠는데…… 사람 하나 태우지 못할 성싶으냐?”
기막힌 대답에 오티스는 할 말을 잃은 채 굳어버렸다. 할 말을 잃은 건 지안도 마찬가지였다.
‘황태자궁을 불태웠다고? 대체 언제?’
의문에 대답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다행인 것은, 상황이 일단락되고 있단 사실이었다. 서슬 퍼런 삼황자의 기세에 오티스는 시에나를 부축해 서둘러 자리를 벗어났다. 보살펴야 하는 영애가 있어 별수 없단 태도를 취했으나, 그가 기세 싸움에 눌렸단 것 정도는 지안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사람들은 영식이 도망칠 수 있도록 바삐 길을 터 주었다.
그들이 사라지자 이비엔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직접 응징하려 했건만, 나설 타이밍을 놓쳐 버렸다.
분위기 역시 엉망이었다. 험악한 대치에 놀란 사람들은 술렁임을 감추지 못했다. 때 아닌 소란에 겁 많은 아이들은 이미 울음을 터뜨렸고, 차례를 기다리며 줄 서 있던 사람들은 눈치껏 기도실을 빠져나가느라 바빴다. 기도실은 삽시간에 한적해졌다. 남은 건 축성을 위해 성수를 들고 있던 신관과 보조 사제 두셋뿐.
잠깐의 정적 끝에 이비엔은 일리아스를 노려보며 말했다.
“내가 해결하려 했었어. 나설 필요 없었다고.”
“발현을 돌이킬 순 없으니 그나마 남은 평판 관리라도 확실히 해야 할 것 아니냐. 나야 평판이랄 것도 없는 신세가 됐지만……. 넌 다르다. 지안을 가리켜 네 시녀라 운운한 책임을 져라. 지안을 모욕하는 건 너를 모욕하는 것과 같다고, 그렇게 공언했잖으냐. 그러려면 함부로 이성을 잃진 말아야지.”
일리아스의 말에 이비엔은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쓸데없는 짓이었다는 말로 오라비의 주장을 매도하고 싶었으나, 지안을 걸고넘어지니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결국 터져 나온 건 한숨뿐이었다. 이비엔은 일리아스를 대신해 기도실의 사제에게 사과했다.
“소란을 피워 미안하군.”
“아닙니다, 황녀 전하. 제게도 귀가 있고 눈이 있는 것을요. 다친 사람이 없으니 괜찮습니다. 그보다는…… 어떻게 위로 드려야 할지 모르겠군요.”
“애초에 상심한 적이 없으니 위로는 필요 없다. 그보단 지안의 축성을 부탁하지.”
그렇게, 단번에 지안의 차례가 되었다. 이제 와 축성이 뭐가 중요한가 싶었지만, 어어 하는 사이 이비엔이 등을 떠밀어 지안은 불편하고 민망한 기분으로 사제의 앞에 가 서야 했다.
마음 같아선 축성이고 뭐고 황태자궁이 어쩌다 불탔는지를 묻고 싶었지만, 아니, 그보다는 황녀 전하의 기분부터 풀어주고 싶었지만,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이미 등을 떠밀린 채다.
그 결과 지안은 순순한 마음으로 사제와 대면했다. 얼른 절차대로 이마에 물 좀 묻히고 어디 한적한 곳에서 전하를 가이딩해 드려야겠다고, 지안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사제의 손가락이 이마에 닿는 순간, 그녀는 더는 축성을 이름만 거창한 단순 의식으로 생각할 수 없었다.
“뭐……!”
물 묻은 손가락이 피부 위로 문질러지는 것과 동시에, 몸속의 기운이 폭발적으로 도약하는 걸 느꼈던 것이다.
과밀해진 무언가가 마침내 껍질을 뚫고 나오듯이, 알알이 영근 석류가 스스로를 쪼개고 과실을 드러내듯이, 폭주하듯 농밀한 기운이 터져 나왔다.
재각성이었다.
‘…안!’
‘지안!’
분명 가까이서 들려와야 할 외침들이 아득하고 희미하게 들려왔다. 당장이라도 정신을 잃을 것처럼 온몸의 감각이 아찔했지만, 그저 눈앞이 온통 새하얄 뿐 이상할 정도로 모든 게 또렷했다.
지안은 발끝이 가볍게 지면에서 떠오르는 걸 느꼈다. 기이하고 낯선 부유감이었다. 단순 착각일까? 마치, 게이트의 압력에 빨려 들어갔던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던 순간,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빛살이 터져 나왔다. 빛은 작은 기도실을 가득 채우며 밖으로 밖으로 퍼져나갔다.
당황스러운 부름과 외침이 모조리 소거되고, 공기마저 움직임을 멈춘 듯 일시에 잠잠해졌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고요뿐.
이윽고 영겁과도 같은 찰나의 시간이 지나고, 재각성의 끝을 알리며 주변을 일거에 집어삼킨 빛무리가 사라지자 지안은 달라진 것 하나 없는 모습으로 땅 위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달라진 것이라곤 오직 하나. 충격으로 망연자실한 그녀의 표정뿐이었다.
* * *
제게 일어난 재각성이란 초유의 사태를, 지안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싶기도 했고.
재각성은 등급이 올라가는 걸 의미하는데……. S급에서 재각성했다면 지금은 대체 등급이 어떻게 되는 걸까. 등급이 측정되긴 하는 걸까? 실없는 생각을 하며 지안은 복잡한 머릿속을 환기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애쓸수록 알 수 없는 것투성이였다. 재각성이라니? 갑자기 왜? 서울에 게이트가 터졌을 때도 지금처럼 당혹스럽진 않았다.
다만, 이것만은 확실히 알겠다. 오랫동안 잠겨 있던 자물쇠가 풀린 것처럼, 명확히 선 그어져 있던 한계가 사라져 버렸다는 것.
본래도 가이드로서의 운용해왔던 기운에 부족함을 느껴 본 적 없었지만, 지금은 마치…… 오랜 둑이 터져 새로운 강줄기라도 생긴 것 마냥 기운이 철철 흘러넘쳤다.
모르긴 몰라도 아마 각인의 횟수도 늘어났을 것이다. S급의 경우 잘 해봐야 셋, 무리하면 다섯 정도로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 이상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직 에스퍼에게 각인을 해본 적 없어 잘은 모르나. 아마 가능하지 않을까.
그런데 가이드의 재각성이 본래 이런 식으로 이루어졌던가? 에스퍼의 재각성 사례는 몇 번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하지만 가이드는 에스퍼와 다르지 않나. 딱히 각성 징후조차 뚜렷이 드러나지 않는 게 가이드였다. 우연히 에스퍼와 접촉하거나, 성인이 되어 의무적으로 각성자 검사를 받지 않는 한 본인이 가이드인 줄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하물며 재각성으로 몸이 부유하고 응축되어 있던 기운이 터져 나오는 이런 일은…… 일절 들은 바가 없다.
“서…… 성녀!”
사제의 중얼거림에 지안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스스로의 상태를 재점검하느라 여념이 없던 탓에 주변을 미처 신경 쓰지 못했다. 둘러보니 다들 휘둥그레진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재각성이 불러일으킨 현상에 모두 자신만큼이나 당황한 것 같았다.
지안은 가장 먼저 사제의 말부터 부정했다.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아요. 사실 저는 능력자인데 아무래도 제가 재각성, 아니 재발현을…….”
미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기도실 안으로 한 무더기의 사제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중 하나가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에다께서 축복하신 분이 누굽니까.”
* * *
사제들에게 에워싸이게 된 지안은 자신이 성녀가 아니란 해명을 한바탕 풀어내야 했다.
기도실로 들이닥친 사제들은 믿을 수 없어 하며 지안에게서 한 톨의 성력이나마 찾아보려 애썼지만, 성력이니 뭐니 하는 게 제 몸에 있을 턱이 없었다.
그러나 끈질긴 신관들의 성화에, 지안은 세 차례나 나누어 확인받은 끝에서야 간신히 사제들에게서 풀려날 수 있었다. 질색한 얼굴로 악시온을 방패 삼는 지안의 모습을 보며 고위 사제 하나가 허탈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수련을 마친 대사제도 아니고……. 에다의 사랑을 받아 성력을 발현시킨 것도 분명 아닌데, 그럼에도 에다께서 직접 축복하시다니 신의 뜻을 알 수가 없군요.”
“그리 실망 마십시오. 저희가 어떻게 에다의 뜻을 알겠습니까.”
“맞습니다. 에다께서도 뜻하신 바가 있어 축복하신 걸 테지요. 그렇지, 스스로를 능력자라 밝히셨으니 성력이 발현되지 않은 건 이미 몸 안에 내재한 힘이 있기 때문이 아닐런지요?”
마지막 말은 제법 그럴싸했다. 그러나 이어진 사제들의 말은 그리 달갑지 않았다.
“어쨌건 에다께서 축복하신 분입니다. 나이가 있긴 하나 지금이라도 수습 사제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성력이야 곧 발현될지도 모를 일이고…….”
“아니요. 저는 사제가 될 생각 없어요.”
“하지만.”
“제게 성력이 없단 걸 거듭 확인하신 걸론 부족했나요? 이건, 그냥 재발현일 뿐이에요. 축성과는 아무 관계 없어요. 그저 우연히…….”
“우연이 아닙니다. 아무래도 기도실에 계신 탓에 모르신 모양이군요.”
사제의 말에 이비엔이 나서며 물었다.
“모르다니, 무엇을 말인가?”
“……나와서 하늘을 보십시오.”
기도실의 출입구를 가리키는 사제의 말에 지안과 이비엔은 바삐 기도실을 빠져나왔다. 기도실 앞에 몰려든 인파와 시선에 움찔한 것도 잠시, 지안은 곧바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처음엔 별달리 눈에 띄는 게 없었다. 그냥 화창하고 푸른 하늘이다.
“…아.”
문제는…… 흰색의 빛 알갱이가 천천히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마치 북부의 눈보라 같았다.
그래. 빛의 눈보라였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재각성으로 인해 터져 나온 기운이 한데 응축해 눈송이처럼 휘날리고 있었다. 하필 상승기류라도 타 버린 건지, 마치 신전 위로 눈이 내리는 것 같았다.
신기해하며 하늘을 향해 손을 뻗은 이비엔은, 손바닥 위에 떨어진 알갱이가 자연스럽게 피부 안으로 스며드는 것을 보았다. 혈관 속으로 부드럽게 번져나간 것은 분명 지안의 기운이었다.
“지안, 이건……!”
“…네.”
지안은 빛의 정체를 확신했다. 재각성으로 터져 나간 자신의 기운이 틀림없었다. 본래라면 몸 밖으로 나간 직후 연기처럼 흩어져야 할 기운이…… 어떻게 형체를 유지할 수 있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