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그런가요?”
“그리고 축성 받고 나면 축하의 의미로 과자를 나눠 주는데, 덕분에 제도의 아이들에게 인기가 높지. 단 걸 싫어하는 사람도 신전에서 나눠주는 과자는 군말 없이 먹는다고 들었어. 대대로 신전에서 내려오는 레시피가 있거든. 아. 그런데…… 혹시 신전에서 이상한 말을 듣더라도 신경 쓰지 마.”
“이상한 말이라뇨?”
“으음. 그게, 그러니깐……”
“이비엔.”
서둘러 제지하는 일리아스의 모습에 지안의 미간이 꿈틀 구겨졌다. 눈싸움이나 계속할 것이지, 기껏 대화의 창구를 열었는데 왜 방해한담. 하지만 황녀 전하가 재깍 입을 다물어 버려서 뭐라 더 캐물을 수가 없었다.
난처히 그녀를 따라 입을 다무는데, 뜻밖에 진실을 알려준 건 공작이었다.
“제도의 사교계에서 그대의 평판이 좋지 않아 그렇다. 내 판단으론, 지금이라도 마차를 돌리는 게 좋겠다. 일 년 중 신전이 가장 번다해질 때 아닌가. 분명 제도의 귀족들이 몰려와 있을 것이고…….”
설득조의 말에 이비엔은 냉큼 악시온의 말을 끊어버렸다.
“기막혀서. 이제 와 돌아가자니, 그거야말로 번거로운 짓 아닌가.”
“제도의 귀족들에게 가십을 제공하는 것보단 잠깐의 번거로움이 더 나을 겁니다. 안 그래도 소문이 좋지 않은데 굳이 신전을 방문하셔야겠습니까?”
“공작은 뭘 모르는군. 지안은 아직 내 시녀다. 나는 지안의 시녀직을 박탈한 적 없어. 그러니 내 시녀인 지안을 모욕하는 건 나를 모욕함과 같다.”
서릿발 같은 분노를 드러내는 이비엔의 모습은 자못 제국의 황녀다웠다. 지안은 선망에 찬 얼굴로 이비엔을 바라보았다. 멋있으면 다 언니라더니……. 분명 저보다 더 어린 걸 아는 데도 이렇게 든든할 수가 없었다. 자칫 잘못했다간 권력의 단맛에 눈뜨고 말 지경이었다.
다만, 불같은 반박을 들은 공작의 표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악시온은 할 말이 남아 있는 눈빛으로 이비엔과 지안을 번갈아 보다가 꾹 입을 다물었다. 침묵을 무릅쓰고 말문을 연 것이 무색하게도 팽팽한 긴장감이 다시금 마차 안을 지배했다.
그러나 지안은 별달리 실망하지 않았다. 방금 전의 대화로 인해 상황을 대충 추측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말인즉, 귀족으로 보이는 자들만 조심하면 되지 않을까?
공작이 몹시 신경을 쓰는 모양새이긴 했지만, 사실 그녀는 딱히 스스로의 평판이 신경 쓰이지 않았다. 언제든 북부로 떠날 궁리만 하고 있는 판국 아닌가.
연회장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았으니…… 어느 정도의 악평이야 예상했다.
없었던 일처럼 묻어두곤 있지만, 연회장에서 삼황자 전하의 불길에 휩싸인 채 단단히 이목을 끈 것도 분명 한몫했을 것이다.
겁도 없이 삼황자에게 다시는 제도로 돌아올 일 없을 거라 선포하는 시녀라니. 귀족들의 눈엔 얼마나 어이없어 보였을까. 아무리 좋게 봐줘도 황족의 사랑을 등에 업고 날뛰는 여자 이상으론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어처구니없는 약혼 사실과 거짓말처럼 연회장에 나타난 공작님과의 조우, 연회장에서의 그 긴박하던 와중에도…… 자신을 향해 목이 잘리고 싶어 작정한 모양이라 말하는 듯한 주변인들의 표정과 눈빛을 잊은 적 없었다.
당시 황녀 전하가 상황을 수습해주지 않았다면 아마 연회장에서 쉽게 빠져나가지 못했을 것이다. 생각하니 더욱 고마워져서 지안은 스리슬쩍 방사 가이딩을 진행했다.
기운의 방향을 모조리 틀어 황녀에게 향하게 한 지안은 놀라 돌아보는 이비엔에게 입술을 벙긋거렸다.
‘감사해요, 전하.’
악시온은 분한 얼굴로 단박에 밝아지는 이비엔을 바라보았다. 찰나였으나 허공에 퍼졌던 기운. 그리고 활짝 웃음 짓는 황녀를 보건대 지안이 남몰래 가이딩을 진행한 게 틀림없었다. 그러나 차마 그 사실을 짚어 지적할 수도, 문제 삼거나 항의할 수도 없었다.
지안은, 자신이 아닌 황녀 이비엔 테리온을 의지처로 삼고 있었으니까.
그 사실을, 악시온은 뼈아프게 깨달았다.
* * *
신전에 도착한 지안은 몰려든 인파에 조금 질린 얼굴을 해 보였다. 마차가 좀처럼 앞으로 나가지 못할 때부터 짐작 가능했고 창문 너머로 직접 확인도 했지만, 막상 나와보니 생각보다 규모가 더 어마어마했다.
특히 신전 앞에 어마어마하게 늘어선 대기줄에는 입이 쩍 벌어질 정도였다. 그러나 권력의 힘은 대단해서, 지안은 쪽문을 통해 신전에 들어설 수 있었다. 심지어 안내역을 맡은 사제까지 있었다.
“에다의 축복이 함께하기를. 두 분 전하를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로웰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간결히 인사를 마친 로웰은 곧장 대신전의 중앙 홀을 향해 몸을 틀었다. 황족이 방문했으니 응당 대신전에 모여 있는 귀족들과 통성명하겠거니 한 것이다.
“대신전의 중앙 홀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아니. 우선은 축성부터 받고 싶다.”
“축성 말입니까? 두 분 전하께선 일곱 살에 이미 축성을 받으신 것으로 압니다만…….”
“그랬지. 축성 받을 사람은 우리가 아니다.”
이비엔의 설명에 로웰은 지안과 악시온을 바라보았다.
얼굴이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탓에, 로웰은 악시온이 북부의 공작이란 사실을 전혀 몰랐다. 게다가 나란히 선 지안과 악시온은 로웰의 눈에 꽤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아. 알겠습니다. 결혼을 앞두고 축성을 받으러 오신 거군요.”
실제로 신전에는 결혼 전에 함께 축성 받으러 오는 커플이 종종 있었다. 제도에서 먼 곳에 거주한 탓에 어릴 적 미처 축성 받지 못한 연인이 그 대상이었다.
난처한 오해에 지안은 짐짓 얼굴을 붉혔다. 악시온 역시 당황해하면서도 굳이 신관의 오해를 풀려 하지 않았다. 발칵 성질을 낸 건 일리아스였다.
“누가 결혼을 앞뒀단 거냐.”
차가운 일갈에 로웰은 핼쑥해진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이글거리는 삼황자의 눈빛에 절로 기가 죽은 탓이었다.
“아. 아닙니까?”
“사실입니다.”
대응하듯 떨어진 공작의 말에 지안은 이마를 부여잡았다. 사실은 뭐가 사실이란 말인가. 하지만 대놓고 뻔뻔하게 구니 문제 삼기가 더 힘들었다.
그래도 끽해야 말장난에 불과하다. 지안은 애써 그렇게 생각하려 했다.
문제는, 삼황자가 이것을 자신을 향한 도발로 받아들였단 사실이다. 뭐라 말릴 겨를도 없이 순식간에 두 사람은 대치 상태가 되었다. 말실수를 좀 줄이려고 삼황자를 곁에 둔 건데…… 이거야말로 진짜 실수였던 모양이다.
어떻게 뜯어말려 보려고 입을 여는 순간, 이비엔은 냉큼 지안을 잡아끌었다.
“그만둬. 네가 나서면 보란 듯 더 싸울걸. 저 멍청이들은 알아서 싸우도록 내버려 두고 우린 축성이나 받으러 가자. 거기, 로웰이라 그랬나? 저 두 사람은 신경 쓰지 않아도 좋다. 엄한 곳에서 시간을 허비하기 싫으니 안내를 부탁하지.”
깔끔한 상황정리에 지안은 경탄한 얼굴로 이비엔을 바라보았다.
“……멋져요, 전하.”
작은 중얼거림에 이비엔은 승자의 미소를 지으며 보란 듯 뒤를 돌아보았다. 덕분에 속이 꼬인 건 뒤에 남겨진 두 남자뿐이었다.
“내 동생이지만 정말…….”
허탈해하는 중얼거림이 들려왔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이비엔과 지안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로웰을 따라 자리를 벗어났다.
로웰의 안내로 지안은 신전의 여러 기도실 중에서 가장 짧은 줄 뒤에 설 수 있게 되었다. 얼마 걸리지 않을 거란 이비엔의 장담대로 줄은 금방금방 줄어들었다.
그만큼 지안의 등 뒤로 줄 서는 사람들의 숫자가 빠르게 늘어나긴 했지만, 차례가 흐트러지는 일은 없었다. 이마에 성수를 묻히고 짧게 축복을 받는 것이 축성의 전부인 탓이었다. 경건하고 복잡한 기도문이나 예식 같은 걸 상상했는데 생각보다 더 간단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다들 들뜬 얼굴이었다. 사제들에게 과자를 나눠 받은 아이들은 함박 웃음을 지었고, 아이들의 부모로 보이는 사람들은 저마다 삼삼오오 모여 밀린 근황을 나눴다. 사람이 워낙 모여든 탓에 북적거리긴 했지만, 대체로 온화하고 조용하며 질서 잡힌 분위기였다.
게다가 신전의 내부는 황녀 전하의 장담대로 몹시 고색창연하고 화려해서 마치 동화 속 궁전 같았다. 화려하고 웅장한 건물이라면 황성에서 질릴 만큼 봐 왔지만, 이런 곳은 또 처음이었다.
그 때였다.
“황녀 전하? 어머. 정말 전하시군요!”
단순히 아는 척을 한다기엔 어딘가 얄미운 목소리였다.
목소리의 주인은 시에나 셀스하임 백작 영애였다. 잘 아는 얼굴은 아니었지만, 스쳐 지나가는 그녀를 가리켜 까탈스런 영애니 조심하라 주의를 주던 황성 시녀들의 말이 기억나는 것도 같았다.
씩 웃음 지으며 가까이 다가온 백작 영애의 옆에는 어딘가 안색이 창백한 청년이 있었다. 다정히 팔짱을 낀 걸 보아 남매 혹은 연인 비슷한 관계인 듯싶었다.
귀족 영애라면 황녀 전하를 발견한 즉시 인사를 건네오는 것이 법도에 맞긴 했지만, 한참 멀리 떨어져 있었던 듯한데 굳이 말을 걸 필요가 있나? 지안은 무심코 이비엔을 돌아보았다가, 섬뜩한 눈빛으로 뿌득― 이를 가는 황녀의 모습을 목격하게 되었다.
“꼴을 보니 내게 반드시 알려야 할 용건이 있는 것 같은데……. 어디 들어 볼까. 셀스하임 영애.”
“그런 것은 아니옵고, 전하를 뵈었다면 응당 인사를 드리는 것이 의무 아니겠나요? 오해는 마셨으면 해요. 그렇지, 그간 강녕하셨나요?”
“보다시피 멀쩡하다. 그대도 그런 것 같아 기쁘군.”
묘하게, 어딘가 핀트가 어긋나는 대화였다. 게다가 황녀 전하가 말을 건넨 대상은 어째 백작 영애가 아닌 그 옆의 영식처럼 느껴졌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전하.”
“빈말로도 반갑다는 말은 못 하겠지만, 그래. 오랜만이야, 오티스.”
오티스라니! 지안은 화들짝 놀라 영식의 얼굴을 다시 바라보았다. 그건 황녀 전하의 약혼자를 가리키는 이름 아니던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백작 영애가 무엇을 노리고 황녀 전하에게 알은체를 해 온 건지. 제도의 영애라면 전하께서 일방적인 파혼을 당했다는 걸 익히 알고 있을 텐데 이런 도발이라니…….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짓을?
지안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짧은 시녀 생활이었지만 테리온 제국의 위계와 신분제가 얼마나 공고한지 몸소 체감한 바 있다.
하나 신분 때문이 아니더라도, 이비엔은 이런 식으로 모욕당해선 안 되는 사람이었다. 도발을 받아치려는 듯 위험스럽게 꿈틀대는 이비엔의 파장에 지안은 더 생각할 겨를 없이 황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일단 진정시켜야 했다.
하지만 지안이 미처 가이딩을 펼치기도 전에, 화르륵 타오른 불길이 셀스하임 백작 영애의 드레스를 불태웠다.
“꺄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