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그렇게까지 최악으로 생각하진 않는다. 다만, 지안은 에스퍼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를 잘 아는 사람이었다. 실제로 가이드의 불법 위치추적이나 스토킹을 하는 에스퍼들이 종종 사회적 물의를 빚지 않았나.
게다가 이곳에선 거듭된 납치 위기도 겪었다. 작은 일 하나에도 민감히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저렇게 억울해하는데. 암만 봐도 거짓으로 여겨지진 않았다. 결정적으로, 파장의 흔들림이 삼황자의 억울함을 선명히 알려오고 있었다.
“그럼 벽에는 왜 그렇게 바짝 붙어 계셨던 건데요.”
질문하자마자 일리아스의 파장이 덜컥 추락했다. 곧바로 답하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는 일리아스의 모습에 지안의 눈초리가 점점 가늘어졌다.
사색이 된 채로 얼굴을 검푸르게 물들인 일리아스는 밑도 끝도 없는 사과를 토해냈다.
“……미안하다.”
“뭐가요?”
“내가 네 이능을 도둑질했다.”
도둑질이라니 무엇을?
질끈 두 눈을 감아버린 일리아스를 내버려 둔 채 지안은 잠시 그 말을 해석해보았다. 이능이 물건도 아니고, 결코 도둑질의 대상이 될 수 없는데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혹시 가이딩을 말하는 건가?
지안은 잠시 삼황자가 자신처럼 술이라도 한잔 마신 게 아닌가 하는, 나름 합리적인 추론에 다다랐다.
어쨌든 파장의 뒤틀림을 보건대 가이딩이 필요한 상태긴 했다. 지안은 성큼 일리아스에게 다가갔다. 혹시 특성이 개화한 건지 파악도 할 겸, 가이딩으로 살살 달래가며 대답을 끌어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삼황자가 주춤거리며 뒷걸음치는 탓에 좀체 그를 붙잡을 수가 없었다.
아니, 기껏 가이딩해 주려고 하는데. 왜 도망치지? 술기운이 안겨준 용기에 힘입어 지안은 다소 목소리를 높였다.
“왜 자꾸 도망가요! 이리 오지 못해요? 자꾸 이러면 다시는……!”
다시는 가이딩 안 해 줄 거예요!
외치려다 말고 지안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찰나간 술이 확 깰 정도였다. 무심코 가이딩을 운운할 뻔하다니! 자칫 정체가 드러날 뻔했다. 그것도 내 입으로!
소리치다 말고 돌연 심각한 얼굴로 굳어 버린 지안의 모습에 일리아스는 덜컥 멈춰 섰다.
‘다시는, 다시는 그다음은 뭐지?’
지안의 입에서 흘러나올 이후의 말이 몹시 두려웠다. 돌이킬 수 없는 통보를 앞둔 것만 같았다. 심장이 쿵쾅거리고 주먹 쥔 손이 덜덜 떨렸다. 잘못을 저질렀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이래선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창고의 곡식을 훔치는 쥐새끼처럼 미약하게 새어 나오는 지안의 이능에 기대 연명해보려 했다. 조금이라도 편해지려고 벽에 바짝 붙어 서는 추태를 마다치 않았다.
그리고 결국 들켜 버렸다.
참담했다. 당장 이 저택에서 꺼지란 통보가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간 지안의 입을 통해 들은 자신의 평가는 늘 부정적이었고, 아슬아슬하게 최악 어딘가에 배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오늘로서 최악마저 넘어섰다.
‘아니, 아직 아니야……. 아직 내 이능은 그녀에게 쓸모가 있어.’
그토록 원하지 않았던 제 능력이 지금 유일한 구원줄이었다. 그는 필사적으로 이성을 부여잡았다. 그럼에도 코앞에 닥쳐온 공포를 상대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두려움에 등을 떠밀린 채로, 일리아스는 비틀비틀 지안의 앞에 가 섰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지안은 그에게 당장 사라지라거나, 다신 얼굴을 보고 싶지 않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덥석 일리아스의 손을 잡아 왔을 뿐.
지안이 천천히 기운을 불어넣자. 일리아스는 크게 휘청였다. 갑작스런 가이딩에 힘이 빠진 탓이었다.
지안은 그를 소파로 이끌어 앉히며 물었다.
“제 이능을 도둑질했다는 건 무슨 말씀이세요?”
지안의 물음은 짐짓 다정했다. 술기운은 이미 다 가셨고, 그 대신 집 나갔던 이성이 되돌아와 실수를 만회하려 맹렬히 일하고 있는 덕분이었다. 대답 없는 일리아스의 모습에 지안은 상냥히 말을 돌렸다.
“제가 놀란 나머지 전하를 함부로 의심했어요. 너무 과민했고, 그 탓에 전하께 실례를 저지른 것 같아요. 역시 기분 상하셨나요? 그렇다면 그렇다고 말해 주세요. 이만 제 방으로 돌아갈 테니.”
말하며 슬쩍 일리아스의 손을 놓자 덥석 손이 잡혀 왔다. 정신없이 가이딩을 받다가 접촉이 끊어져 저도 모르게 손을 뻗은 모양이었다. 꽉 잡아 오는 악력에 지안은 양미간을 구기지 않으려 노력해야 했다.
“전하. 아파요.”
그 말에 일리아스는 얼른 손에서 힘을 풀었다. 그가 어쩔 줄 몰라 하는 지금이 기회였다.
“재발현이라도 한 듯 제가 한 말이 들려왔다고 하셨죠. 혹시 이에 대해 제가 알아야 할 게 더 있을까요? 지금 알려 주시면 화내지 않을게요.”
“거짓말 마라.”
“그럼 이대로 제가 전하를 오해해도 괜찮으세요? 전하께서 설명해 주시지 않으면 저는 아무것도 알 수 없어요. 그리고 전하가 없는 곳에선 입도 벙긋할 수 없게 될 거예요. 왜냐면, 전하께서 다 엿듣고 계실 테니까요.”
“…….”
“제가 그러길 바라세요?”
일리아스는 초조한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다.
“그날, 연회장에서…… 너와 입 맞춘 이후로 전에 없던 능력이 생겼다. 그 뒤로 네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는데…….”
“그렇군요. 그리고?”
“……이후로 네 표정과 위치를 읽어낼 수 있게 됐다.”
기막힌 실토에 지안은 얼굴을 구기지 않으려 노력해야 했다. 공작은 접촉으로 감정을 읽어 대더니, 삼황자는 아예 실시간 위치추적과 도청을 특성으로 개화시킨 건가. 기함할 노릇이었다.
이곳에 온 후로 딱히 사생활이랄 것도 없었지만, 얼마 없는 일상마저 와장창 파괴되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마음 같아선 왜 그걸 이제야 말하느냐고 버럭 화내고 싶었다. 그러나 파장으로 에스퍼의 구분 및 위치 추적이 가능한 건 자신도 마찬가지였으므로 할 말이 없었다. 화를 내기도 우습다.
지안은 침착하게 다음 질문을 내던졌다.
“그럼 벽에 붙어 계셨던 건? 제 이능을 도둑질했단 건 대체 무슨 말씀이세요?”
“너와 가까이 있으면 조금이나마 네 이능이 스미는 게 느껴져서……. 나도 모르게 벽에 가 붙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기운이 흘러나온 건가? 매일 신경 써서 가이딩 차단을 하고 있었는데, 술에 취해 가이딩 차단이 조금 느슨해진 건가.
그렇다면 삼황자가 벽에 바짝 붙어 있었던 것도 이해가 된다. 저도 모르게 가이딩에 홀린 거라면, 그래. 그럴 수도 있지.
납득을 마치는 사이 슬그머니 삼황자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아직 한참 더 가이딩 해야 하는데 왜 이러는 거지? 의아해하며 바라보자 일리아스가 죄책감 어린 얼굴로 말했다.
“이젠 괜찮으니…… 내게 이능을 쓰는 건 그만둬라. 네게 위험하다.”
사탕 뺏긴 어린아이 같은 얼굴로 그런 말을 하다니. 지안은 헛웃음을 삼키며 다시 일리아스의 손을 쥐었다.
“위험한지 어떤지 그런 건 제가 판단해요. 잠깐은 괜찮으니까 그냥 이대로 계세요. 그보다 궁금한 게 있는데, 제가 황녀 전하와 외출하려고 할 때 반대하다 말고 슬그머니 찬성으로 돌아선 거……. 그리고 제가 이동 능력자에게 납치당할 뻔했을 때 화염이 치솟았던 건, 제가 어디 있든 위치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셨나요?”
“……그래.”
어쩐지. 이제 이해가 된다.
잠깐, 그렇다면 앞으로는…… 우중충하게 저택에 틀어박혀 있는 걸 관둬도 되는 것 아닌가? 산책도, 외출도 좀 더 자유롭게 해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하니 조금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여전히 문제가 남아 있다. 어디서 무슨 말을 하든, 삼황자가 다 듣고 있을 게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눈에서 안 보이면 나도 모르게 말실수를 하겠지.’
그런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이전처럼 마냥 그를 피해 다닐 순 없을 것 같았다. 지안은 터져 나올 것 같은 한숨을 삼키며 애써 표정을 관리했다.
“전하. 앞으론 벽에 붙어 있지 말고 그냥 저한테 오세요.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안정시켜 드릴 수 있으니까.”
그 말에 일리아스는 밝아지는 표정을 어쩌지 못했다. 기다렸단 듯 반색하는 걸 티 내고 싶지 않았지만, 선심 쓴 제안 하나에도 힘없이 무너지는 게 자신의 처지였다.
일리아스의 뺨 위로 떠오른 화색을 찬찬히 살핀 지안은 다시금 그의 손을 붙잡고 재차 가이딩을 시도했다. 그러면서 막 생각났다는 듯 못다 한 말을 이었다.
“음. 그리고…… 혹시 신전에 같이 가실래요?”
“신전이라면…….”
“황녀 전하가 곧 성축일이라고 신전에 함께 가자고 하셨거든요. 거절해야 할지 어떨지 고민 중이었는데…… 함께 가 주셨으면 좋겠어요. 내키지 않으시면, 거절하셔도 좋아요.”
“가겠다.”
냉큼 대답한 일리아스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지안을 바라보았다. 분명 화를 낼 줄 알았는데. 벼락같은 비난 대신 이처럼 친절히 굴다니. 쓸모를 조금은 인정받은 건가? 그래서 이렇게 다정히 대하는 건가?
신전으로 함께 가 달라는 제안을 하는 걸 보면 그런 것도 같았다.
하지만 왠지 안심할 수가 없어 일리아스는 불안한 눈으로 지안을 바라보았다. 더없이 상냥한 얼굴로 속내를 가장하고 있지만, 알 수 있었다. 쓸모가 다하면…… 지금 같은 대접은 다신 없으리라는 것을.
* * *
마차 탑승부터 이동까지 난항이 따로 없었다. 공작과 삼황자의 신경전 탓이었다. 삼황자 전하에게 성축일에 동행하겠냐고 물을 때부터 내심 짐작하긴 했지만…… 결국 또다시 이렇게 되었다. 심지어 이번엔 보란 듯 큰 마차를 빌려온 탓에 따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
넓은 마차 안은 사람으로 가득 찼음에도 고요했다. 지안은 짐짓 두 사람의 눈싸움을 모른 체하며 이비엔에게 질문을 건넸다. 숨 막힐 듯한 침묵을 견디느니 먼저 말문이라도 열어보자 싶었던 것이다.
“전하. 제국민들은 모두 주신 에다를 섬기나요?”
“아무래도 그렇지. 국교니까. 나도 어릴 적 축성을 받았는걸. 그렇다 보니 성축일은 아이를 가진 부모들이 손꼽아 기다리는 날이기도 해. 아. 그러고 보니 넌 북부 출신이지. 혹시 아직 축성을 안 받아 보았다면 이참에 한번 받아 보는 게 어때?”
뜻밖의 제안에 지안은 멋쩍은 얼굴로 손사래 쳤다.
“아니요. 괜찮아요. 제가 신도도 아니고. 어린아이들 사이에 끼어 있는 건 창피할 것 같아서 조금……”
“창피라니? 뒤늦게 축성 받는 사람들도 꽤 많아. 막상 가 보면 연령대가 무척 다양할걸? 축성이라고 부르긴 하지만 그리 거창하지도 않아. 신관이 이마에 성수를 찍어 주는 걸로 끝이니 부담스럽게 생각할 필요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