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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화 (71/199)

71화

“지안.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 거야? 네 차례야.”

황녀의 지적에 지안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졸다 깬 듯 놀라는 그녀의 모습에 이비엔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졸려?”

“……조금 취했나 봐요.”

“별일이네. 아직 와인 한 병밖에 안 비웠으면서. 피곤하면 게임은 여기서 끝내자.”

그렇게 말하며 이비엔은 테이블에 흩트려 두었던 카드를 정리했다. 지안은 불콰해진 얼굴로 손 안의 카드를 힘없이 내려놓았다. 그걸 본 이비엔이 놀라며 말했다.

“뭐야. 어쩐지 패가 안 좋더라니……. 좋은 패는 네가 다 가지고 있었네. 계속 진행했다면 내가 졌겠는데?”

지안은 쓰게 웃었다.

술과 카드 게임. 안주로 먹을 이국의 과일과 제도의 유명 과자점에서 공수해온 치즈 타르트. 심지어 서역의 물담배까지 챙겨온 황녀 전하다. 그 정성을 생각해서라도 좀 더 잘 어울려야 하는데, 도통 게임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자꾸만 어제 들었던 공작의 말이 떠올랐다.

삼황자의 효용.

그의 말대로 이동 능력자를 찾아내기만 하면 거리낌 없이 북부로 떠날 수 있다. 나를 납치로부터 보호한다는 이유로 삼황자 전하가 저택에 머무는 일도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그 이후엔?

지안은 흔들리는 눈으로 이비엔을 바라보았다. 황녀의 얼굴 위로 사납고 날카로운 남자의 얼굴이 불현듯 겹쳐지고 있었다. 이를 억지로 흩어버린 지안은 애써 답답함을 삼켜야 했다.

삼황자 전하도 전하지만, 황녀 전하 역시 두고 떠나야 한다. 그 생각을 하니 영 속이 좋지 않았다.

북부 어디든 따라나서겠노라 당당히 선언한 전하였지만, 과연 그것이 다른 세상이라 해도 그 결심에 변함이 없을까? 바로 이 지점에서 지안은 회의적이었다.

타고난 황족의 신분. 평생 누릴 수 있을 영예와 권력을 다 저버리고 떠난다니. 누가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아마 민주 사회에 적응하는 것만도 황녀 전하에겐 큰 모험이자 고난이 될 것이다.

게다가 차원을 넘어 온 가이드라니. 그 말을 믿어 주기나 할까? 지안은 이 엄청난 비밀을 스스럼없이 털어놓을 수 있을 만큼 이비엔을 신뢰하진 않았다.

겉보기엔 아무 문제 없이 잘 지내고 있긴 하지만, 실상은 한쪽에서 보이는 일방적인 호의로 유지되는 어설픈 관계에 불과하지 않나. 서로 알아가게 된 것도 고작해야 몇 달 남짓이다.

그쯤 생각하니 달콤한 디저트와 향긋한 술이 이물질처럼 속에서 부대껴왔다. 체할 것 같았다.

이비엔은 이런 속사정을 조금도 모른 채 어두운 지안의 표정을 살피며 눈치껏 자리를 정리했다. 영 카드 게임에 집중하지 못하는 게, 말 못 할 고민거리라도 있는 듯했다. 그녀는 짐짓 창밖을 바라보며 놀라는 척했다.

“벌써 날이 어두워졌네. 비도 오는 것 같고. 게임하느라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몰랐어. 마침 오늘은 나도 저녁 약속이 있어서…… 이만 가 봐야겠어.”

지안은 서둘러 이비엔을 따라 일어났다. 배웅을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비엔이 손사래 치며 만류한 탓에 고작해야 응접실 문턱까지 뒤따른 게 전부였다.

“피곤해 보이니 얼른 들어가 봐. 이틀 후에 나랑 같이 신전에 가기로 한 거 잊지 말고.”

약속을 상기시킨 이비엔이 서둘러 돌아가자 지안은 벽에 기대선 채 고뇌에 빠졌다. 창밖으론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층층이 쌓인 공기에선 우울한 물 냄새가 났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상념을 깨며 호위인 듯한 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피곤해 보이십니다. 그만 침실로 돌아가시죠.”

지안은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황녀 전하의 방문에 잠시 방 밖으로 물러나 있던 호위가 어느새 제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그리고 그는 지안이 아는 얼굴이었다. 오전까지만 해도 낯선 기사가 호위를 맡았는데, 오후 담당은 헤롤드인 모양이다.

그라면 뭔가 아는 게 있지 않을까? 침울함으로 흐려져 있던 지안의 두 눈에 빛이 돌아왔다.

“저. 혹시, 이동 능력자 수색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나요?”

“아직 성과가 없습니다. 그래도 제도를 이 잡듯 뒤지고 있으니. 곧 잡힐 겁니다.”

“그 사람이 잡히면…… 아니, 아니에요. 못 들은 걸로 해 줘요.”

지안은 비척이며 침실로 돌아갔다. 뒤늦게 술기운이 올라오는 건지 조금 몽롱했다.

시야가 어지러운 건 침실로 돌아가는 길이 힘들어서일까. 아니면 오늘따라 한층 더 난폭하게 느껴지는 파장 탓일까. 눅눅한 대기 위로 두 에스퍼의 파장이 위태로이 넘실댔다.

침실로 들어서다 말고 지안은 잠시 멈칫했다. 제 방과 맞닿은 벽에 바짝 붙은 삼황자의 파장 탓이었다. 바로 옆 방에 있는 게 확실한데도 찰나간 그가 침실에 있는 게 아닌가 착각할 정도로 가까웠다.

어쩐지 꺼림칙해서 지안은 불쾌감을 담아 작게 중얼거렸다.

“아니…… 대체 왜 벽에 붙어 있는 거야?”

의문과 동시에 삼황자의 파장이 크게 일렁였다. 파장의 출렁임이 어찌나 심한지 움찔 벽에서 물러서는 게 고스란히 느껴질 정도였다. 굳이 파장에 신경을 집중하지 않아도 슬금슬금 벽에서 떨어지는 행보까지 죄 읽혔다.

그쯤 되니 적잖이 찝찝해져서 지안은 곧장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적당한 취기가 몰고 왔던 졸음이 단번에 깨 버렸다. 곧바로 방을 나서서 옆 방을 두드리자 뒤따르던 헤롤드가 당황하며 물었다.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전하께 물어볼 것이 있어서요. 전하, 거기 있는 거 다 아니까 나오세요. 좋은 말로 할 때.”

과격한 언행에 헤롤드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었다. 아무리 그래도 황족인데, 좋은 말로 할 때 나와라 마라 하다니……. 이래도 되는 건가? 말려야 하는 것 아닌가?

기겁한 것도 잠시, 헤롤드는 지안에게서 옅게 술 냄새가 나는 것을 깨닫고 서둘러 손을 뻗었다. 세상에 아무리 취했어도 그렇지, 황족에게 술주정을 하려 들다니! 기함할 노릇이었다.

하지만 헤롤드가 만류하기도 전에 슬그머니 문이 열리고 만 것이다.

“……무슨 일이지?”

“몰라서 물으세요? 혹시 제 방에 도청기……. 아니, 이게 아니지.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지…….”

그래, 그런 게 있을 리가 없다. 도청기라니. 퍼뜩 그것부터 떠오르긴 했지만,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수상쩍다. 그것도 무척.

지안은 파장을 보다 잘 읽어내기 위해 감각을 확장한 후 질문을 던졌다.

“방금 제가 중얼거린 거, 들으셨죠.”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일리아스의 대답에 지안은 푸핫 웃음을 터뜨렸다. 파장을 읽어가며 진위 여부를 가릴 필요도 없이, 삼황자의 얼굴 위로 고스란히 거짓말이 드러나고 있었다.

바로 그 표정 탓에 자신 역시 덩달아 표정 관리에 실패할 정도였다. 실상은 취기 탓에 통제력을 잃은 것이었으나, 여느 주정뱅이가 다 그렇듯 지안 역시 이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

그리고 술에 취한 사람은, 누구든 세상에서 가장 용감한 법이다.

“들으셨잖아요.”

“다짜고짜 왜 이러는지 나는 잘…….”

“거짓말에 재능이 없으시네요. 말해요. 전하와 입씨름하고 싶지 않아요.”

“나는 벽에 붙어 있었던 적 없다.”

말하고 나서 일리아스는 아차 하는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변명을 하려다 도리어 자백한 꼴이었다. 덕분에 지안은 기가 찬 얼굴로 일리아스를 쏘아 볼 수 있었다. 이쯤 되면 현행범이라 해도 좋았다.

“재미있네요. 제가 그렇게 중얼거리긴 했죠. 대체 왜 벽에 붙어 있는 거냐고. 그런데 전하께서 어떻게 제 중얼거림을 들으신 건지…… 당최 알 수가 없네요?”

“이건, 이건 그러니까……. 그냥 들렸다.”

“제대로 설명하세요.”

다그치자 삼황자의 시선이 헤롤드에게 향했다.

지안은 영문을 몰라 하는 헤롤드에게 양해를 구한 뒤 방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걸었다. 말소리가 새어나가지 않을 만큼 적당히 문에서 떨어지는 것도 잊지 않았다. 취한 채로도 나름의 주의를 다한 것이다. 지안은 얼어붙은 일리아스에게 재차 따져 물었다.

“그냥 들렸다는 걸, 저더러 믿으란 건가요?”

“정말이다.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재발현이라도 한 것처럼 능력이 생겼다.”

“무슨 능력인지는 몰라도 엿듣기에 탁월한 능력인 모양이네요. 청력이 갑자기 좋아지기라도 한 건가? 그렇담 그간 제가 황녀 전하와 무슨 이야길 했는지, 또 공작님과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다 알고 계시겠네요? 제 짐작이 맞나요?”

“아니야! 내가 알 수 있는 건 네가 한 말뿐이다. 주변인들이 뭐라고 말하는지까진 들을 수 없었다.”

“…….”

지안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공작의 말을 듣지 못했다니, 불행 중 다행이었다. 하긴, 효용이니 뭐니 하는 말을 삼황자 전하가 들었다면 진작 난리가 나고도 남았을 테니까.

문제는 따로 있었다. 대화를 죄다 엿듣진 못했다 해도 내가 한 말은 다 듣고 있었단 것 아닌가.

“……언제부터였어요?”

서슬 퍼런 질문에 일리아스는 머뭇대며 답했다.

“나도 정확히 모른다. 처음엔, 환청인 줄 알았다.”

“그래서 언제부터였냐고요.”

“처음으로 인지한 건…… 연회가 있었던 날부터다.”

연회 때부터라니. 지안은 기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지금까지 아무 언질도 없으셨군요.”

저도 모르게 뒤로 주춤 물러서자 일리아스가 버럭 소리쳤다.

“말하려 했어! 그랬는데 네가!”

돌연 삼황자의 파동이 크게 출렁였다. 격랑과 같은 거칠기에 피부 위 솜털이 다 일어날 정도였다. 그러나 이어진 일리아스의 말은 놀라울 만큼 작고 초라했다.

“네가, 나와 마주치고 싶지 않다고…… 그래서…….”

“…….”

“그래서 더더욱…… 말할 수 없었다. 지금보다 더 나를 기피하게 될 게 뻔해서…… 정말이다. 일부러 숨긴 건 아니었어. 말하려고, 몇 번이나 말하려고 했는데…….”

네가 지금보다 더 나를 싫어하게 될까 봐.

일리아스는 힘겹게 뒷말을 삼켰다. 그러나 속내를 끄집어내 보여도 모른 척할 마당에 입마저 다물었으니 지안에게 진심이 전해질 리 만무했다.

“후. 좋아요. 그럼 벽에는 왜 붙어 계셨던 건데요. 설마 벽에 구멍이라든가…… 그런 걸 뚫으신 건 아니시겠죠?”

“너는, 내가 그런 파렴치한으로 보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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