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그러나 영문도 모를 황태자에게 보복하는 것보다는…… 여자를 차지하는 것이 더 시급했다.
공작과 삼황자가 기거하는 저택에 그녀가 있다. 북부의 주인을 처리하는 것도 골치 아픈 일인데, 여기에 삼황자까지 가세해 왔으니 빼돌리기 쉽지 않을 것이다.
생각 끝에 도출된 결론은 단순했다.
공작과 삼황자를 죽이자.
황성에 침입했던 것처럼 노골적으로 여자를 노리는 건 경계심만 돋울 뿐이니. 이번엔 조금 우회해서 주변을 무너트리며 접근하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마침 가시적인 기회가 생기기도 했다. 뜻밖에 황태자와 삼황자의 사이가 나빠지지 않았나. 불을 다루는 삼황자의 이능이 가장 거슬리는 만큼, 황태자에게 접선해 삼황자부터 확실히 처리하는 것이 좋을 듯했다.
황태자의 성정에 제게 반기를 든 삼황자를 내버려 둘 리 없으니, 일이 어렵진 않으리라.
결정을 마친 아론의 눈이 불길하게 빛났다. 무수히 많은 능력자에게 죽음을 내려 온 검은 까마귀의 눈빛이었다.
* * *
외출 이후 한결 밝아진 지안의 모습에 악시온은 드물게 안도했다. 자발적으로 저택에 갇혀 있으면서 나날이 울적해졌던 지안의 표정이 이전과 확실히 달랐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호위로 붙여 두었던 헤롤드의 보고에 그는 심장이 철렁 떨어지는 기분을 맛보아야 했다.
“지안이…… 이멜다에 대해 물었다고?”
“뭘 그리 걱정하십니까? 그게 다 공작님께 관심이 있어 여쭤본 것 아니겠습니까.”
말하다 말고 헤롤드는 애매하게 말문을 닫았다. 숯을 칠한 듯 새까매진 악시온의 안색 탓이었다.
“불쾌해하지는 않던가?”
“절대 아닙니다. 그런 기색은 일절 없으셨습니다. 언제적 약혼인데 누가 그걸 불쾌해합니까. 그리고 미혼 영애가 힉스에서 식사할 만한 일이라면, 분명 고위 귀족가의 영식과 함께하는 자리 아니겠습니까? 가이드…… 아니, 영애께서도 오해하는 기색은 일절 없으셨습니다. 그냥 지나가듯 물으신 것을요.”
“그럼 대체 왜 이멜다에 대해 물은 거지?”
“그야 호기심 아니겠습니까? 좋은 신호임이 틀림없습니다! 애초에 일방적으로 약혼을 파기한 것도 후작가 아닙니까. 신경 쓸 필요 없으십니다.”
헤롤드가 열변을 토했지만, 악시온은 좀처럼 시름을 덜어낼 수가 없었다. 당장 지안에게 달려가 말하고 싶었다. 그 여자와는 약혼이 파기된 지 오래되었다고. 얼굴조차 초상화로만 알고 있으며,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타인일 뿐이라고.
하지만 이런 해명이 다 무슨 소용인가? 자칫 안 하느니만 못한 말이 될 수도 있었다. 제게 관심이 있어 던진 질문일 거라는 헤롤드의 말을 믿고 싶었지만, 그 말을 믿었다가 실망하게 될까 봐 두려웠다. 일생 무엇에도 겁먹은 적이 없었건만, 지안과 관련된 일이라면 더럭 두려움부터 치밀었다.
그런 주제에, 이런 쓸모없는 용건이나마 들고 가고 싶을 정도로 지안이 보고 싶었다.
한 저택에서 함께 머무는데도 지안을 마주칠 수 없는 날이 많았다. 어색하게 지안의 기척 근처를 맴돌며 전전긍긍하는 것이 하루 일과의 전부라 해도 좋을 정도였다.
‘날 데려간다고 했어.’
오직 그것만이 악시온을 견디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지안이 황녀나 삼황자를 능력자를 선택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그를 잠식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일전의 외출에서 지안이 황녀에게 다소 마음을 여는 것 같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나.
어떻게 해서든 지안과의 관계를 진전시키고 싶었다. 없는 핑계라도 만들어 찾아가고 싶었고. 실제로 그럴싸한 명분을 고심하다 하루가 다 가기 일쑤였다.
그러나 분명한 용건이 없다면 되도록 찾지 말아 달라는 지안의 요청 때문에 그는 한 번도 그런 생각이나 계획을 실행에 옮겨본 적이 없었다.
상심을 감추며 악시온은 생각했다. 한 번이라도 그녀가 먼저 날 찾아준다면, 분명 기쁠 거라고.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
유년 시절, 어머니를 찾는 아버지의 모습은 늘 보아 왔어도 아버지를 찾는 어머니의 모습은 단 한 번도 목격한 적 없지 않은가.
그러니 생각해내야 했다. 그녀를 찾아갈 만한 용무를. 보석이나 드레스보다 더 그녀가 반색하며 반길 만한 것을.
오랜 고민 끝에 악시온은 대안을 들고 지안을 찾았다.
* * *
지안은 싫은 낯 없이 악시온을 반겨 주었다. 자신 역시 공작에게 볼일이 있던 탓이었다.
“안 그래도 공작님을 만나러 갈 참이었는데…… 이렇게 찾아와 주시네요. 황녀 전하가 절 대신해서 미리 언질해 주신 건가요?”
“언질이라니?”
“황녀 전하와 함께 신전을 방문하기로 했어요.”
“신전이라면…… 성축일 말이로군. 숙지하겠다.”
“반대하지 않으시네요?”
“반대하면, 가지 않을 텐가?”
“조금 실망은 하겠지만, 반대하시면 굳이 외출하진 않으려고요. 아직 시간이 남아 있으니까 황녀 전하께 말해서 약속을 취소할 수도 있고요. 그보다, 절 찾아오신 용건은?”
“…….”
“가이딩 요청인가요?”
“그런 게 아니다.”
전에 없이 대답을 망설이는 공작의 모습에 지안은 잠자코 기다렸다. 불안으로 떨리는 그의 파장이 실타래마냥 손바닥을 간질였기 때문이었다.
“돌아가는 방법을…… 알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이어진 말에 지안은 아연한 얼굴로 입을 벌렸다.
“알려 주시려고요?”
“그러기로 약속했으니까. 그간은 경황이 없어 차마 말하지 못했다.”
뜨문뜨문 말하는 공작의 목소리엔 짙은 망설임이 남아 있었다. 지안은 꿀꺽 침을 삼키며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치미는 조바심 탓에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갑자기 왜 이런 결정을 내리신 건지 궁금하네요. 북부에 도착하면 그때 알려 주시기로 한 것 아니었나요?”
“그대 홀로 북부에 당도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지금 말하나 그때 가서 말하나 별다를 건 없겠지. 무엇보다 지금 말해 두는 편이…… 그대의 신뢰를 사기에 더 적합하지 않겠나.”
“신용을 얻겠다 이 말이군요. 좋아요. 저로선 손해 볼 것 없는 일이니까. 다만, 이러시는 이유를 모르겠네요. 왜 이렇게 갑자기?”
이유를 묻자 한참 기다린 끝에 답이 나왔다.
“그대가 날 멀리하기에…….”
멀리했다니. 내가 언제? 지안은 반문하려다 말고 그간 공작을 대한 자신의 행동을 반추해 보았다. 생각해 보니 삼황자와 함께 저택에서 지내게 된 것이 신경 쓰여 다소 기피하긴 했다.
하지만 그건, 공작이 싫어서라기보다는 자칫 한 에스퍼를 편애하다 사고를 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에스퍼간의 다툼이야 워낙 흔한 것이지만, 가이드가 일방적으로 한쪽만 편애하면 문제가 더 심각해진다. 심지어 공작과 삼황자는 가이드 하나에 여러 에스퍼가 배정되는 게 일반적이란 것도 잘 모르는 이들 아닌가.
지구에선 가이드와 에스퍼간의 특수성이 일찌감치 알려지고 용인되어 왔지만, 그건 지구에서의 일이다. 그 탓에 적당히 거리를 둔 건데……. 대놓고 멀리한 걸로 읽혔을 줄이야.
어떻게 오해를 풀어야 할지, 이 오해를 풀어도 괜찮은 건지 고민하는 사이 악시온이 말했다.
“그대를 처음 발견했던 곳은, 북부의 신전이었지.”
운을 떼는 악시온의 말에 지안은 고민을 다 내던진 채 귀 기울였다.
“그건…. 그곳이 그대의 세계를 잇는 입구이기 때문이다.”
그 말에 반짝하고 머릿속에 불이 켜졌다.
“그럼! 그곳에 다시 가기만 하면……!”
“단순히 방문하는 것으론 부족하다. 샤먼을 대동한 후 제단에 피를 묻히면…… 통로가 열린다.”
통로라면…… 게이트? 게이트인가?
“샤먼은 어디에 가면 만날 수 있죠?!”
“북부에 있겠지. 원한다면 이곳으로 불러오겠다.”
선선한 대답에 지안은 꾹 입술을 깨물었다. 당장 그렇게 해 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여긴 북부가 아니다. 더구나 북부를 벗어나면 힘을 전혀 쓰지 못하는 게 샤먼 아닌가. 그런 이를 제도로 불러온들 무슨 소용인가?
어차피 북부로 가야만 하는 마당이다. 그냥 북부에서 만나면 되지. 굳이 제도로 불렀다가 다시 데려갈 여력은 없다. 생각할 필요도 없이 번거롭고 멍청한 짓이다.
지안은 허탈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샤먼을 불러온들 당장은 별 소용 없는 일이겠네요. 그래도…… 알려 주셔서 감사드려요.”
돌아갈 방법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당장은 충분히 만족스럽다. 희망이 눈앞에서 반짝이는 것 같은 기분에 지안은 밝은 얼굴로 웃었다.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은 그 모습에 악시온은 넋을 놓고 지안을 바라보았다.
“아. 그리고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전 공작님 멀리한 적 없어요.”
“……더는 내가 식사를 챙기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하지 않았나.”
“네? 아니, 그건 기사님들 눈치가 보여서 그런 거예요. 공작님이 저택의 하인도 아니고, 다들 말리고 싶단 얼굴을 하고 있는데 제가 뭘 어떻게 하겠어요? 눈치껏 만류한 것뿐이에요.”
“그럼 용건 없이 찾지 말라고 한 건…….”
“그건 제가 공작님과 시간을 보내는 게 전하의 눈에 어떻게 비칠지 걱정돼서 그런 거고요.”
“그가 신경 쓰이나?”
“아무래도 그렇죠.”
어떤 의미로? 좋은 의미인가? 아니면 나쁜 의미인가? 악시온은 이같이 되묻고 싶었지만, 차마 질문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다른 말을 했다.
“……사람을 풀어 그대를 납치하려 한 이동 능력자를 찾고 있다. 수색과 처리가 끝나면 곧장 북부로 떠나지. 그 이동 능력자만 찾으면 삼황자의 효용도 끝난다.”
삼황자의 효용. 지안은 그 말에 담긴 의미를 애써 모른 체하며 입을 다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