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에를랑겐이라는 성을 들어본 기억이 있다. 황녀 전하가 연 티 파티에서, 난처한 얼굴을 하면서도 전하의 파혼 소식을 죄 알려온 기막힌 영애였다.
시간이 지나 인상이 조금 흐릿해지긴 했지만, 다시 보니 확실히 기억이 났다. 황녀 전하가 기껏 마련한 티 파티를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 유유히 자리를 떠난 그 영애가 분명하다.
지체 높은 후작 영애에게 시비 한 번 잘못 걸린 것 정도야 별 대수롭지도 않았다. 다만, 왜 내게 그런 적의를 드러낸 걸까.
찰나였지만 쏘아보는 눈동자가 무척 호전적이었다. 황녀 전하가 아니었다면 어떤 식으로든 봉변을 당했으리라 확신할 수 있을 만큼, 또렷한 적의였다.
무슨 이유로 싸움을 걸어오는지는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지안에게 이멜다는 철저히 관심 밖의 인물이었으니까.
그러나 이비엔이 슬쩍 흘린 말로 인해 이멜다 에를랑겐은 단번에 지안의 관심 인물로 떠올랐다.
“그 영애가, 공작님의 약혼녀였다고요?”
지안이 저도 모르게 공작이 타고 있는 마차를 바라보았다.
“한때는 그랬지. 뭐, 결국 파혼했지만.”
어깨를 으쓱여 보이는 이비엔에게 지안은 가볍게 눈을 흘겼다.
“그 말, 일부러 하신 거죠? 저 들으라고.”
“모르고 있는 것보단 낫지 않아?”
질문으로 받아치는 황녀의 말에 지안은 슬그머니 대답을 회피했다.
“……저를 못마땅해한 걸 보니 그 영애는 아직 공작님께 마음이 남아 있는 모양인가 봐요.”
“딱히 그렇지도 않아. 북부로 떠나지 않아도 된다고 좋아하던 게 아직도 기억나는걸. 이멜다가 아쉬워한 거라곤 북부의 광산 정도였을 거야. 양질의 다이아몬드는 죄다 북부에서 산출되니까. 에를랑겐 후작가에서도 그걸 꽤 탐냈었거든. 왜? 신경 쓰여?”
“신경 써야 하나요?”
“흐응…….”
황녀는 지안의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이내 재미없다는 듯이 툭 던졌다.
“네 마음이 공작에게 기울어 있는지 확인하려고 슬쩍 흘려 본 건데. 별 반응이 없네.”
어딘가 정곡을 찌르는 듯한 말에 가슴이 뜨끔했다. 지안은 동요를 감추기 위해 단단히 표정을 굳혔다.
“전하니까 봐 드리는 거예요. 다른 사람이 이런 식으로 절 떠보려 했다면 화냈을 거예요.”
“큼, 알았어……. 주의할게. 그나저나 제도의 거리가 벌써 새하얘졌군. 그러고 보니 곧 성축일이던가?”
“성축일이요?”
“주신 에다를 기리는 일종의 축제야. 봐. 거리에 깃발을 내걸고 있잖아. 아마 다 신전에서 고용한 사람들일 거야.”
이비엔의 말대로, 제도의 대로엔 새하얀 깃발이 내걸려 있었다. 작업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분주하게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흰 깃발을 걸었다.
“그러고 보니 신전엔 가 보았어?”
“아니요.”
“그럼 다음 외출 장소는 신전으로 정하자! 성축일에는 일반인에게도 잠시 성소를 개방하거든. 신전은 제도 파가디안에서도 명소로 손꼽히는 곳이야. 누구든 신전을 처음 본 사람이라면 감탄을 금치 못하지. 너도 좋아할 거야.”
기다렸단 듯 다음 약속을 잡는 이비엔의 모습에 지안은 난처히 웃어 보였다. 이런저런 변명을 늘어놓으며 그 주장을 꺾어 보려 하였지만, 소용없었다. 오히려 대화를 하면 할수록 말려드는 것 같아 지안은 끝내 입을 다물어야 했다.
하여간 황녀 전하는, 사람을 꼬여 내는 것엔 도가 튼 것이 분명했다.
* * *
자말은 건달이나 질 낮은 용병들을 주로 상대하는 뒷골목의 치료사였다. 그 탓에 웬만큼 험한 부상은 거의 다 보아온 그였지만, 아론의 부상은 그중에서도 특히 심각했다.
“운이 좋으셨습니다. 검이 조금만 더 깊이 들어왔다면…… 그 자리에서 즉사했을 겁니다.”
그렇게 말하며 자말은 질린 눈으로 아론을 바라보았다. 생살을 무려 서른네 바늘이나 꿰맸는데도 신음 하나 내지 않다니……. 아무리 입에 나무토막을 물렸다지만, 그간 치료해 온 사람들 중에서도 손꼽힐 만큼 지독했다.
하나 상대는 밤까마귀의 길드장. 제도의 능력자들 사이에서도 가장 악명 높은 아론 베르그만이다. 그 스스로도 능력자이면서 동류를 도구로 써먹는 데 주저함이 없는 악한. 폭주를 앞둔 능력자들에게는 필수인 의약품과 진통제의 유통 및 생산을 꽉 쥐고 흔드는 지하의 왕.
자말이 알기론, 이권과 이익을 얻기 위해서라면 그가 하지 못할 일은 없었다. 그간 그에게 목숨을 잃은 능력자 수는 겉으로 드러난 것만 서른을 훌쩍 넘겼다. 확실하게 알려진 것만 해도 그 정도인데, 소리소문없이 살해당한 사람까지 다 포함하면 그 머릿수조차 퍽 우스워지리라.
어쨌건 이상한 일임은 틀림없었다. 제도에서 능력자 간에 전투가 일어난 것도 아니고, 구역을 다투는 대규모 세력전이 벌어진 것도 아닌데 아론 베르그만이 심각한 상처를 입다니……. 자말이 알기로 아론에게 이만한 부상을 입힐 수 있는 능력자는 제도에 없었다.
“당분간 요양하십시오. 거친 움직임은 피하시고, 이능을 사용하는 것도 가능한 한 자제하셔야 합니다.”
자말의 경고에 아론이 피식 웃으며 답했다.
“송장처럼 누워만 지내라 이 소리군.”
“치명상입니다. 그렇게 하셔야 합니다.”
“뭐, 노력해 보지.”
자말을 돌려보낸 아론은 노력해 보겠단 말이 무색하게도 곧장 파비안을 불러냈다. 부상으로 만 하루 정신을 잃고 있던 동안 길드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공작과 여자의 행방은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야 했다.
파비안은 호출을 받자마자 기다렸단 듯 그간의 일을 보고해 왔다. 잠자코 파비안의 말을 듣던 아론은 순간 기막혀하며 되물었다.
“공작이 제도로 되돌아왔다고?”
“네. 그리고 제도 외곽의 저택을 매입했습니다. 삼황자 역시 공작의 저택에서 거주 중이라고 합니다.”
“삼황자까지?”
“황녀 전하께서도 저택에 방문하셨다는군요. 아마도 거기 황녀 전하의 시녀가 있는 모양인데……. 아, 세간에는 그 시녀가 빼어난 미모로 북부의 공작과 삼황자 전하를 농락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파비안의 말에 아론은 작게 실소했다. 빼어난 미모라니…. 예쁘장하게 생기긴 했지만, 정말 탐나는 건 그녀의 이능력일 뿐인데.
게다가 아론이 본 지안은 딱히 눈이 번쩍 뜨일 만한 미녀가 아니었다. 하지만 놀란 지안의 얼굴을 떠올리면 입가에 뜻밖의 웃음이 걸리는 건 사실이었다.
다만, 아론은 입꼬리에 내건 웃음을 오래 유지하지 못했다.
가슴을 가로지르는 통증과 함께 떠오른 기억 때문이었다. 놀란 얼굴을 떠올리며 즐거웠던 것도 잠시, 무덤을 뚫고 나온 시체와 조우하기라도 한 듯 공포에 질린 지안의 얼굴이 뇌리에 떠올랐다.
두려움으로 일그러진 양미간. 흥건히 흘러내리던 눈물이 잊히질 않았다.
‘싫어!’
태연히 여자의 턱을 잡고 싫어도 해야 할 거라며 비꼬았지만, 비명이라 해도 좋을 격렬한 거부에 움찔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어디에서 기인하는지 알 수 없는 망설임이 찰나간 전신을 구속해 왔고, 주춤거리게 만들었다.
그리고 공작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곰곰히 패배의 원인을 곱씹는 아론에게 파비안이 말했다.
“아. 그리고, 이 건과 관련하여 추가로 아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삼황자에 의해 황태자궁이 불탔습니다. 건물이 무너지지만 않았다 뿐이지, 새까맣게 전소했지요. 사상자는 없지만 부상자가 다소 속출했다고 합니다. 부상만 아니셨으면 어젯밤 제도 어디에서든 황성이 불타는 진풍경을 구경하실 수 있으셨을 텐데……. 좋은 구경을 놓치셨군요.”
“황태자궁이 불탄 이유는?”
“삼황자가 이능을 제대로 다루지 못해서 그렇다. 폭주의 전조증상이다……. 뭐, 대충 삼황자의 잘못으로 포장되고 있습니다만…… 아마 그 여자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황태자가 공작과 함께 도주하던 시녀에게 황족 시해죄를 물었다더군요. 다들 쉬쉬해서 그렇지, 실상은 그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 합니다.”
“하하. 그렇다고 황궁 하나를 통째로 불태우다니. 제정신이 아니군.”
삼황자를 평가하는 아론의 말에 파비안은 잠시 기가 막혀오는 걸 느꼈다. 지금 누가 누구더러 제정신이 아니라 평하는 건가.
‘황궁에 잠입해 사람을 훔쳐 오려고 한 건 제정신이고?’
심지어 이쪽은 사상자가 다수 나왔다는 점에서 더욱 질이 나쁘다.
더구나 아론은 그간 파비안이 겪어온 인간군상 중에서도 가장 짐승 같은 인간이었다.
잔혹하고 비정한, 인정이라곤 손톱만큼도 없는 인간쓰레기. 중독성 진통제를 독점 유통하며 능력자들의 약점을 잡아 휘둘러온 말종 중의 말종.
물론, 그런 아론 밑에서 일하는 자신도 별 다를 바 없는 쓰레기이긴 했다.
“뭐, 제정신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요. 이 일로 황성에서 삼황자의 입지가 크게 줄어들었습니다. 본래도 능력자인 탓에 차별을 받아왔는데……. 이만큼 큰 사고를 쳤으니 황족이라 한들 돌이키기 힘들겠지요. 돌아가는 정황을 보건대 처벌이 확정되는 즉시 제도에서 추방당할 것으로 보입니다. 가뜩이나 좋지 않았던 여론이 혹평과 비난 일색으로 바뀌었으니……. 잘해 봐야 출정이나 명받지 않겠습니까? 뭐, 이러나저러나 죽은 목숨이죠.”
“큭. 다들 놀랐겠군. 황태자의 맹견이라 불려 온 삼황자가 주인에게 이를 드러냈으니 말이야.”
“전부 그 여자 때문이지요.”
그 여자.
파비안의 지칭에 아론의 눈빛이 검게 가라앉았다. 삼황자를 비웃었지만, 기실 그 비웃음은 스스로를 향한 조소이기도 했다. 파비안은 천천히 침잠하는 아론의 눈빛을 읽어내지 못한 채 지안을 주제로 느물거렸다.
“덕분에 황태자를 지지하는 귀족들은 그 여자의 머리채라도 잡을 듯 굴더군요. 삼황자와 공작이 끔찍하게 싸고돌지 않았다면 진작 죽은 목숨이었을 겁니다. 변변한 출신도 없는 시녀 하나 처리하는 것쯤이야 아무것도 아니니까요. 덕분에 현재 삼황자와 공작은 그 여자를 중심으로 기묘한 협력 관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우스운 일이지요. 황태자에게 이를 드러낼 만큼 가치 있는 여자도 아닌데 말입니다.”
파비안의 말에 아론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지안의 가치를 운운하는 파비안의 총평 탓이었다.
그 여자만큼 가치 있는 능력자는 없다. 온 세상을 뒤져도 결코 그녀와 같은 능력자를 찾아낼 수 없을 것이다. 사막의 모래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를 찾을 수 없는 것처럼. 심해에서 타오르는 화염을 찾아볼 수 없는 것처럼. 그녀는 유일무이했다.
그런 여자를 죽이려 했으니 그간 고분고분했던 삼황자가 미쳐서 돌변한 것 아닌가. 당장 자신조차도 황태자의 멱을 따버리고 싶은 충동이 거세게 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