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8화 (68/199)

68화

“아하. 알 것 같군. 공작이 신경 쓰여?”

“누구 한 사람은 반드시 기분이 상할 테니까요. 그렇다고 셋이서 함께 외출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확실히 그렇겠군. 그럼 이건 어때? 지금처럼 너와 내가 외출하는 걸 두고 질투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 아냐. 안 그래? 널 그 저택에서 끄집어내기 위해서라도 자주 놀러 갈게. 아무래도 널 챙겨 외출하는 건 내가 해야겠어. 그렇지?”

미안하면서도 반가운 말이었다. 폭격처럼 거침없이 내던져지는 호의를, 지안은 차마 거절하지 못했다.

“외출은 좀 그렇지만…… 종종 놀러 와 주세요. 오늘처럼. 염치없지만, 그래 주시면 좋겠어요.”

그렇게 말하며, 지안은 이비엔이 황자가 아닌 황녀라 다행이라 생각했다.

이렇게나 사람의 속내를 무장해제시키는 분이다. 타인을 휘두르는 방법을 본능적으로 타고나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싶었다. 휘둘리는 걸 뻔히 아는데도 기분이 나쁘지 않아 더 이상했다. 이런 걸 가능하게 만드는 사람은, 아마 황녀 전하뿐이리라.

* * *

식사를 마친 지안과 이비엔은 다음 행선지로 향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새 식당 안에는 사람들이 가득 차 있었다. 두 사람은 몰려드는 시선에 의식적으로 모자를 푹 눌러쓰며 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힉스는 제도에서도 인기가 높아 고위 귀족들이 자주 찾는 레스토랑이었고, 그중 이비엔을 알아보는 사람이 나타난 건 필연적이었다. 고작 모자를 눌러 쓴다고 황녀의 특징이 다 감춰질 순 없는 탓이었다.

“어머, 전하. 이런 곳에서 다 뵙네요. 그리고 당신은…….”

자연스럽게 지안에게 고개를 돌린 영애의 얼굴이 얼핏 굳었다. 이어진 뒷말은 사뭇 차가운 것이었다.

“별일이군. 힉스가 손님을 잘못 가려 받은 모양이군요.”

“그대가 여기 있는 걸 보니 그런 것도 같군.”

“전하?”

이비엔은 대꾸 없이 지안을 마차에 먼저 탑승시켰다.

사교계 내에서 지안은 공작과 삼황자를 농락한 겁 없는 시녀로 알려져 있었다. 이를 까맣게 모르는 지안을 위해서라도 입구에서 소란을 피워 괜히 주목받는 일은 없어야 했다.

지안을 뒤따라 마차에 탑승하기 직전, 이비엔은 언짢은 표정을 숨기지 않은 채 뒤돌아섰다.

“이멜다 에를랑겐. 경고하는데, 소문에 함부로 편승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이상하군요. 그녀는 더 이상 전하의 시녀도 뭣도 아닐 텐데요. 삼황자 전하가 여자에 미쳐서 황태자궁을 불태운 걸 보시고도 그 여잘 감쌀 마음이 드시나요?”

“들어. 그러니 그대는 입을 다물어.”

으스스함이 느껴질 만큼 강렬한 경고에 이멜다는 재깍 입을 닫았다. 별안간 돌이 날아들기라도 한 것처럼 당혹스럽고, 낯설기 짝이 없었다.

거기에 더해 이어진 황녀의 말은 당혹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거기, 오라버니도 뭐라고 한마디 하지 그래요? 여자에 미친 삼황자 전하라……. 뭐, 아주 틀린 말도 아니지만.”

그 말에 이멜다는 소스라치며 뒤돌아섰다. 낭패스럽게도 삼황자가 그녀의 등 뒤에 서 있었다. 게다가 그 옆에는…… 공작이 함께였다.

“……전하. 그리고, 공작 각하.”

과거 오데르겐가와의 혼담을 파기하려 애쓴 경험이 있기에 이멜다는 공작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 역시 자신을 알아본 눈치였다.

호의라곤 한 점도 찾아볼 수 없는 공작과 삼황자의 시선엔 상대를 찍어누르는 위압감이 가득했다. 보통의 영애라면 잔뜩 겁먹은 채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도 이상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멜다는 에를랑겐 후작가의 적녀이자 사교계의 꽃이었다. 게다가 여러 사정으로 비밀에 부쳤을 뿐, 그녀는 현재 내정이 거의 확실시된 차기 황태자비이기도 했다. 그녀가 처음부터 당돌하게 황녀에게 말을 걸어온 것엔 그런 배경이 있었다.

비록 여자 하나 때문에 황태자를 등졌으나, 그간 황태자의 충실한 검으로 살아온 삼황자라면 어렴풋이나마 알 것이다. 자신이 황태자에게 어떤 사람인지를.

이멜다는 비난과 책망이 담긴 일리아스의 시선을 받아치며 가볍게 웃어 보였다.

“여기서 이렇게 두 분을 뵙게 될 줄은 몰랐군요. 부주의함을 사죄드리니, 모쪼록 제 말실수를 너무 나무라지 마시길.”

황족을 모욕한 걸 어떻게 말실수로 치부할 수 있는가? 기가 찬 소리에 이비엔이 작게 헛웃음을 터뜨렸으나 이멜다는 시종일관 당당함을 잃지 않았다. 삼황자가 분란을 키우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만 가지.”

예상대로 무대응으로 상황을 일단락지어 버리는 일리아스의 말에 이멜다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덕분에 어이가 없어진 건 이비엔이었다.

“뭐? 그런 모욕을 듣고 이렇게 넘어가다니! 정말 미치기라도 했나요?”

“틀린 말은 아니니까. 체통 없는 말싸움은 그만두고 착석이나 해라. 너 때문에 출발이 늦어지고 있다.”

황녀를 마차 안으로 떠밀어 넣은 일리아스는 마부를 재촉해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이멜다는 먼지를 일으키며 사라지는 두 대의 마차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저 네 사람이 보인 기묘한 조합에 대해서. 그리고 그중 그녀가 아는 두 사람의 낯선 태도에 대해서.

잠깐 사이 삼황자도 황녀도 그녀가 익히 알던 모습에서 무척 동떨어져 있었다. 사교계의 생리에 발맞춰 교묘히 움직이며 군림하던 황녀는 더 이상 없었다. 더는 말조심을 하지 않기로 한 듯 거침없어진 황녀의 언사라니. 퍽 생소했다.

훗날을 생각하지 않는 직설은 전하께서 능력자가 되었기 때문인가?

하지만 단지 그 때문에 예민해진 거라 보기엔 다소 과한 대응이었다. 이는 전혀 황녀 전하답지 않았다.

게다가 더욱 놀라운 건 삼황자 쪽이었다. 분란을 키우진 않더라도 경고 정도는 남기는 것이 삼황자다운 처신이었다. 그는 몹시 성마른 자라서, 자신을 모욕한 사람을 곱게 봐 넘기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삼황자가 그 자신의 입으로 틀린 말이 아니라 인정하다니. 이토록 온유하게 상황을 정리하다니…….

불현듯 이멜다는 셀스하임 백작 영애가 한 말을 떠올렸다.

‘삼황자 전하의 전속 시녀가 능력자들의 폭주를 막을 수 있다던데. 소문이 사실일까요?’

‘어쩌면 황녀 전하의 발현이 유독 짧게 그친 것도 전부 그 전속 시녀 때문이 아닐까요?’

그날, 분명 그런 말들이 오갔었다. 능력자들이 무리를 지어 황성을 습격한 사건을 두고 다들 의견이 분분하지 않았나. 당시엔 다들 뜬소문으로 치부했고, 실제로도 뜬소문으로 가라앉고 있는 참이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소문이 사실이었다면?

그렇다면 능력자들이 황성에 침입하는 만행을 저지른 것도. 황녀 전하가 저 여자를 싸고도는 것도, 삼황자 전하의 변화도, 삼황자와 공작의 싸움도 모두 이해가 된다. 이멜다는 눈을 빛내며 멀어져가는 황녀의 마차를 응시했다.

그런 이멜다에게, 막 힉스에 도착한 영식이 알은체를 해왔다.

“에를랑겐 영애. 오랜만이군요.”

고개를 돌리자 황녀 전하의 전 약혼자인 오티스 영식이 말갛게 웃는 낯으로 안부를 물어왔다.

“못 본 사이 더욱 아름다워지신 것 같습니다. 후작 각하께선 안녕하십니까?”

후작 각하께선 안녕하시냐고? 친근히 안부를 묻는 오티스의 말에 이멜다는 속이 뒤틀리는 걸 어쩌지 못했다.

그녀의 아버지, 에를랑겐 후작은 애석하게도 몹시 건강하고 멀쩡했다. 권력욕만큼이나 건강에 대한 욕구도 대단해서 흔한 감기 한 번 앓는 일이 없었다. 주신 에다의 신전에 방문할 때마다 그의 죽음을 신께 간청했지만, 아무리 많은 헌금을 해도, 아무리 간절히 기도해도 후작은 죽지 않았다.

이제 와 다시 생각하면 참 순진하고 어리석었다. 바보같이 신께 매달려 볼 생각을 하다니, 이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

이멜다는 가볍게 조소하며 오티스를 향해 웃어 보였다. 이렇게나 시기적절하게 인사를 건네는 걸 보니 어디서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가 황녀 전하가 물러나자 냉큼 나타난 게 분명했다.

심지어 그는 시에나 셀스하임 백작 영애를 대동한 채였다.

황녀 전하를 내버리고 선택한 것이 고작 저 여자였단 말인가? 저런 남자가 유서 깊은 알스페트 후작가의 상속자라니……. 이멜다는 차갑게 웃으며 물었다.

“두 분을 힉스에서 뵙게 될 줄은 몰랐군요.”

“아. 오해 마십시오. 시에나와는 신전에서 우연히 만났을 뿐입니다. 곧 성축일이지 않습니까. 그보다, 어떻습니까? 이렇게 뵙게 된 것도 인연인데. 동행이 없으시면, 함께 식사라도…….”

“선약이 있어서 어렵겠군요.”

깔끔한 거절에 오티스는 내심 혀를 찼다. 아무리 에를랑겐 후작가의 영애라지만 여전히 콧대 높은 여자였다. 수치심과 울분으로 헝클어지는 시에나의 표정을 모른 체하며 오티스는 부러 말을 끌었다.

“그거 아쉽군요. 그럼 다음을 기약하는 건 가능하겠습니까?”

대답해온 건 이멜다가 아닌, 그녀의 뒤에서 나타난 알레인 테리온이었다.

“그건 안 되겠군. 그녀는 다음에도 나와 선약이 있을 예정이라서 말이야.”

일반 귀족 영식처럼 변복한 황태자의 등장에 오티스는 소스라치듯 놀랐다. 에를랑겐 후작 영애가 황태자와 교제하는 사이란 소문은 듣지 못했는데. 이게 다 무슨 일이란 말인가?

셔츠 안으로 얼음이 미끄러져 들어온 듯 등줄기가 서늘했다. 하필 작업을 걸어도 황태자가 점찍은 영애에게 작업을 걸다니! 큰 낭패였다.

당혹과 난감함을 감추지 못한 오티스의 얼굴에 이멜다는 가볍게 코웃음 쳤다.

다들 황녀 전하의 때늦은 발현을 비극처럼 받아들이지만, 알스페트 후작가의 오티스 영식을 보면 황녀 전하의 발현이 좋지 않은 일만 양산한 건 아니었다. 황녀 전하는 일견 안 돼 보이는 듯하면서도 운이 좋았다. 발현을 한 덕분에 이런 한심한 작자와 잡음 하나 없이 약혼을 파기할 수 있게 되지 않았나.

그쯤 생각한 이멜다는 우아하게 웃어 보이며 보란 듯 황태자와 팔짱을 꼈다.

“그럼 두 분께서도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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