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7화 (67/199)

67화

공작과 삼황자가 장식물로 이뤄진 파티션 너머에 자리 잡은 걸 곁눈질로 확인한 지안은 식전주를 마시며 연신 감탄했다.

“굉장하네요. 정기적으로 레스토랑 내부를 달리 꾸미나 봐요.”

“힉스니까. 이 레스토랑을 꾸리는 사람은 알마즈 백작 부인이고, 부인의 안목은 사교계에서도 특히 이름 높아. 제도의 귀족들도 최고로 꼽는 레스토랑인걸.”

“잘은 모르지만, 예술에 조예가 깊으신 분이 운영한다는 건 알겠어요.”

“그저 그런 구성과 장식으론 최고의 자리를 유지할 수 없는 법이니까. 주문은 내가 미리 해 두었는데, 괜찮지?”

“아무래도 좋아요. 뭐든 맛있을 테니까.”

그리고 그 기대는 배신하지 않았다. 당장 식전주에 나온 입가심 안주부터 맛있었다. 단순한 올리브인데 마치 마법이라도 부린 것처럼 바삭하면서 부드러워, 지안은 한 입 먹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안의 반응에 이비엔은 흐뭇해하며 설명했다.

“올리브 속에 치즈를 채우고 겉에 소금과 꿀을 발라 말린 거야. 힉스의 대표 메뉴 중 하나지.”

술과 음식을 주제로 한 무해한 이야기가 한 차례 오갔다. 속 깊은 이야기는 단 하나도 꺼내두지 않은 화기애애하고 즐거운 식사였다. 혼자서 깨작이며 먹던 것보다 배로 좋았다.

비록 파티션 너머 테이블에 자리 잡은 두 남자는 그리 유쾌한 시간을 보내지 못하는 듯하지만……. 무슨 상관인가. 어렵게 외출을 강행했으니 이쯤에서 신경을 끄고 되도록 기분 좋게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하지만 동석한 상대가 황녀이기에, 즐거운 가운데서도 자꾸만 스스로의 잘못을 되짚어 보게 되는 것이다. 손수건 한 장 덜렁 쥐여주고 떠나버린 건 결코 잘한 짓이라 볼 수 없었다.

지안은 와인을 다섯 잔쯤 비웠을 때야 간신히 속내를 꺼내놓을 수 있었다.

“전하. 그날 연회장에선…… 정말 죄송했어요.”

“흐응. 뭐가? 우는 날 뿌리치고 공작과 함께 떠난 거?”

눈치 빠른 이비엔의 반문에 지안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떠나는 것은 황녀 전하가 뭐라 하든, 어떻게 말리든 필수불가결한 선택이었다.

시녀의 신분으로 누릴 수 없는 과분한 호사를 죄다 누렸지만, 그렇게 살 순 없었다. 목표는 명확했고, 제때 공작이 나타나 줌으로써 가야 할 길 역시 선명히 드러나 보였지 않았나. 돌부리에 채인 듯 중간에 엎어져 버리긴 했지만 선택은 불가피했다. 길이 있다는 걸 안 이상, 가야만 했다.

더구나 이곳 세상의 에스퍼들과 과하게 친분을 쌓는 건 처음부터 경계해왔던 일이지 않나.

가이드 없는 에스퍼들의 면면을 알아봤자 하등 좋을 일이 없었다. 기껏해야 도덕과 윤리에 재단당하는 것밖에 더하겠는가. 마음이 무거워지면 지구로 돌아가는 길 역시 험난해질 것이다. 하지 않아도 될 번민이라면 가능한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사람이라면 도의적인 사과나마 해야 마땅하다. 눈앞의 황녀는 응당 사과받아야 할 인물이었다.

“……저는 북부의 공작이 누군지 모르는 양 행세해왔죠.”

“그냥 말을 아낀 것뿐이잖아. 난 다 이해해. 오라버니 탓에 그런 거잖아. 그렇지?”

“더 있어요. 저는 전하의 호의를 이용해 북부에 소식을 보내려 했어요.”

눈을 맞추지 못하는 지안의 모습에 이비엔은 도리어 궁지에 몰리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망설임 없이 공작을 선택한 지안이 미웠고, 섭섭했다.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다. 긴장과 낙담 끝에 처량함만이 남았던 그날 밤을, 어떻게 잊을까.

하지만 사과를 받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사과는 됐어. 난 그런 것보단, 네가 누군지 알고 싶어.”

“네? 그게 무슨…….”

“너는 공작에게 바라는 답이 있었지. 본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넌 그렇게 말했어.”

“…….”

“그래서 처음엔, 네가 타국의 인물일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했지. 어쩌면 몰락한 국외의 귀족일수도 있겠다 여겼어. 하지만 그간 아무리 수소문해봐도 너와 같은 귀족 영애는 없더군. 범위가 너무 광범위한 탓도 있었겠지만, 검은 머리의 귀족 영애가 어디 한둘이었어야 말이지. 지안, 난 네 고향이 어딘지. 네 신분은 뭔지. 그런 걸 알고 싶어.”

“……왜 그런 걸 궁금해하시죠?”

“왜냐면, 그날 네가 떠나고 난 후에……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 지안이라는 이름. 그 이름은 과연 진짜였을까 하는 생각. 사실 나는 네 이름조차 제대로 모르고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그런 의심.”

“전하…….”

“오래전 내가 했던 말을 네가 아직 기억하는지 모르겠어. 나는, 널 붙잡을 수 있다면 뭐든 할 거야. 네가 기어코 북부로 떠나겠다 해도 두말없이 따라서겠어. 지안, 넌 이것만 기억하면 돼. 도움이 필요하면 도움을, 지지가 필요하다면 지지를, 보호가 필요하다면 보호를 제공할 거란 걸. 공작이 아닌, 황녀인 내가.”

“…….”

“그러니 날 두고 어디 갈 생각은 마. 만약 가야 하는 곳이 있다면 꼭 내게도 알려줘야 해. 내가 널 찾아갈 수 있게.”

자신에 찬 이비엔의 음성은 말을 꺼낸 스스로를 현혹시킬 만큼 힘 있었다. 누구라도 그 말을 들었다면 흔들릴 수밖에 없을 만큼, 강한 확신을 심어주는 말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확고함을 지닌 건 황녀만이 아니었다. 종류는 달랐지만 지안에게도 나름의 확신과 그것이 가리키는 방향이 있었다. 지안은 가만히 입을 열었다.

“필요로 하는 게 있는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전하께선 제가 바라는 걸 이뤄주실 수 없어요.”

“공작은? 그는 이뤄줄 수 있나?”

“……아마도.”

씁쓸한 대답에 이비엔은 암담하고 울적한 기분을 어쩌지 못했다. 싸우지도 않았는데 이미 패배한 기분이었다.

“…….”

단번에 침체된 테이블 위의 분위기를 지안은 굳이 바꾸려 들지 않았다.

침묵을 견디는 것도 자신이 감당해야 할 일 중 하나였다. 이대로 입을 다물어 황녀 전하와 관계가 틀어진대도, 그건 그것 나름대로 나쁘지 않다. 지구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조금은 덜 무거워질 테니까.

하지만, 상심이 깊이 드러난 황녀 전하의 얼굴을 보자 도무지 생각의 중심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양심이 조근조근 속삭여 댔다.

‘내가 누군지 궁금하다는 황녀 전하에게 침묵으로 대응하는 건 너무 매정하지 않아? 그녀는 네게 내내 잘 대해 주었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뼈아픈 지적에, 지안은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제가 누군지 알고 싶다고 하시니 답해드릴게요. 이름을 속이진 않았어요. 신분이랄 건 정말 없고. 고향은…… 제도에서 많이 멀어요. 북부에선 조금 가깝고요.”

“……그리고?”

“그리고…… 제가 곁에 머물길 바라시는 전하의 의사는, 잘 알겠어요. 하지만 제게도 바라는 것이 있어요. 제가 지금처럼 전하를 조금 더 솔직히 대하고 가까이하는 걸론 부족한가요?”

부족하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 지안은 지금보다 더 거리를 두려 할 게 틀림없다. 이비엔은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입술을 달싹였다.

“게다가 저는, 전하께서 시녀로서의 저를 원하시는 건지, 아니면, 능력자로서의 저를 원하시는 건지 전해 들은 바가 없어요. 그러니 대답해 주세요. 어떤 심정으로 저를 곁에 두고자 하시는지. 저와 어떤 관계를 이루려는 건지, 알려 주세요. 저는 그걸 들어야겠어요.”

말을 마친 지안의 얼굴은 후련한 듯하면서도 어딘가 어두웠다.

실제로 지안은, 되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넌 기분이었다.

관계라니. 언제고 다시 떠날 생각뿐이면서 이런 걸 따져 물어 뭘 하겠다는 건가. 스스로 발목에 족쇄라도 채운 기분이었다.

이건 실수다. 지금까지 한 수많은 실수 중에서도 가장 손꼽을 만한 실수였다. 그 사실을 깨닫자 낭패감이 물씬 피어올랐다. 술김에 실수한 거라고 믿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미 말을 뱉어버린 뒤다. 시간을 되돌리지 않고선 결코 이 실수를 만회할 수 없으리라. 뼈아프게 자책하는 지안에게 이비엔이 못 박듯 말했다.

“네가 좋아.”

“……그 말은?”

“오해는 마. 이성적으로 네가 좋다는 건 아니야. 나는 그런 게 아니라……. 잘 모르겠어. 네가 좋아. 너는 나를 구해주었고, 그날부터 나는…… 너와 가까워지고 싶었어.”

에스퍼다운 고민에 빠진 황녀를 지안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런 방향이 아니라니 다행이긴 한데, 그 뒷말이 왠지 두려웠다.

“처음엔, 너와 친분을 쌓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을 줄 알았어. 그랬는데, 그것만으론 충분치 않더군. 친구란 건 결국, 언제고 사이가 틀어질 수 있는 관계잖아? 그래서 나는 차라리…… 네가 오라버니와 잘 되길 바랐어. 그렇게 되면, 가족이란 틀 안에 네가 존재할 테니까.”

“전하. 저는 삼황자 전하를…….”

“알아. 좋아하지 않는 거.”

거침없는 이비엔의 말에 지안은 흘끔 파티션 너머를 바라보았다. 목소리를 낮춰 조용히 말하고 있긴 하지만, 혹시 삼황자에게 들리는 것은 아닐까?

“좋아하지 않는다기보단,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 없는 것뿐이에요. 부담스럽기도 하고요. 황족이시잖아요.”

“오라버니가 황족이라서 싫은 거야?”

“그런 건 아니지만…… 타고나길 강압적이시니까요. 까딱 잘못했다간…….”

휘둘린다고요. 속삭이듯 목소리를 낮추는 지안의 모습에 이비엔이 물어왔다.

“나는? 나도 테리온의 황족인데…….”

“전하는 예외예요.”

냉큼 나오는 대답에 이비엔의 눈이 가늘어졌다. 의심하는 게 분명했다. 지안은 차분히 근거가 될 설명을 보충했다.

“진심이에요. 전하만큼 제게 잘 대해 주신 분이 없는걸요. 지금 같은 외출도…… 전하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거예요. 덕분에 이렇게 바깥 공기나마 쐬어 보는 걸요. 맛있는 것도, 술도 실컷 먹고요.”

“흐응. 오라버니에게 말해 둬야겠네. 널 챙겨서 어디로든 외출 좀 하라고.”

“글쎄요. 언제 어디서 이동 능력자가 나타나 절 노릴지 모를 일이니 외출은 최대한 삼가려고 해요.”

“고집스럽긴. 지안. 네 불안은 이해하지만, 오라버니를 좀 믿어 봐. 성격이 조금 글러먹긴 했어도 상위의 능력자야. 이동 능력자에게서 널 지켜준 것도 오라버니잖아?”

“그렇긴 하지만……”

난처한 지안의 모습에 이비엔은 곧바로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렸다. 덩치와는 달리 곱상한 외모를 한, 북부의 군주. 반응을 보건대 그를 마음에 걸려 하는 것이 분명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