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나가지 않으면 안 되나? 표적이 될지도 모른다.”
“이번만은 나 역시 공작과 생각이 같다.”
결코 한 장소를 공유하지 않았던 두 사람이 의견까지 일치시키며 외출을 말리고 들자 지안은 꽤 난처해졌다. 반대 이유가 영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어서 더더욱 난감했다.
하지만, 그런 말은 황녀 전하가 도착하기 전에 했어야 했다. 삼황자 전하가 당연히 동행해주리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건가? 아무래도 소통에 문제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외출 직전에 이러면 기껏 방문해 준 사람에게 무슨 실례란 말인가? 지안은 나직이 항변했다.
“제가 당일 통지를 한 것도 아니고, 사흘 전에 분명 알려드렸는데요. 황녀 전하와 외출 약속을 했다고. 그런데 왜 이제 와 반대하시는 거죠?”
“혹시 이동 능력자가 나타나기라도 하면, 어쩌려는 거냐.”
“그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에요. 당연히, 삼황자 전하께서 동행해 주시는 줄 알았는데요.”
지안의 말에 일리아스의 구겨진 얼굴이 펴졌다.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동행하는 수밖에.”
그러나 밝아졌던 표정은 이내 다시 구겨져 버리고 말았다. 뒤이어 악시온이 나섰기 때문이었다.
“그럼 나 역시 함께 가겠다.”
“공작님도요?”
“그대 혼자 보낼 순 없다.”
혼자라니? 황녀 전하도, 삼황자 전하도 동행하는데 혼자는 무슨 혼자인가. 말의 어폐를 스스로도 눈치챘는지 공작이 서둘러 부연했다.
“……세간의 여론이 좋지 않다.”
“여론이라뇨?”
반문하자 악시온이 뭐라고 답하기도 전에 이비엔이 나섰다.
“공작은 걱정이 지나치군. 황녀인 내가 동행하는데 누가 감히 지안을 모욕하겠나?”
“황녀의 말대로다. 세간의 눈을 신경 쓴다면, 우르르 몰려나가는 것보단 인원을 하나라도 더 줄이는 게 낫지 않겠나?”
황녀와 일리아스의 반박에 공작의 입이 짐짓 다물렸다. 이대로라면 지안이 없는 집을 지켜야 할 판이었다. 분기를 애써 누른 악시온은 반박 대신 지안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 한껏 애처로운 표정을 지었다.
삼황자와 황녀가 결정권자처럼 굴고 있지만, 실제로 결정을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그는 확실히 알고 있었다.
“당장 레스토랑의 주방장을 저택으로 불러오겠다. 그러니 외출은, 단념하면 안 되겠나?”
처연한 물음에 지안은 막 고개를 끄덕이려 했다. 하지만 미처 고갯짓하기도 전에 이비엔이 나서 버럭 소리쳤다.
“단념이라니, 무슨 헛소리를? 저택에서 먹는 저녁이 무슨 소용이란 말이지? 식사도 식사지만, 지안과 나는 레스토랑에서 내려다보이는 제도의 전경을 보러 가는 거야!”
“고작 그런 걸 위해서…….”
“고작이라니! 지안이 거길 얼마나 좋아하는데! 점심을 먹고 난 후에 에르데네트 쥬얼에도 방문할 예정이었단 말이다! 그리고 저택의 정문에서 바로 마차를 타고 이동할 건데, 지안의 얼굴이 드러날 틈이 어디 있지?”
“그래도…….”
황녀에게 볼품없이 밀리는 악시온의 모습에 지안은 한숨을 삼키며 말했다.
“그만두세요, 전하. 공작님도 이유가 있어 반대하시는걸요. 공작님도 괜찮으시다고 하니 차라리 저희 모두 외출하는 것으로…….”
“그런 건 싫어. 저 덩치를 좀 봐 지안. 마차가 좁아진단 말야!”
확실히, 네 사람이서 한 마차를 타면 조금은 비좁은 감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공작 혼자 저택에 남아 있으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의견이 너무 상충하니, 차라리 외출을 다음으로 미루는 건 어떨까요?”
“지안, 너까지!”
배신이라도 당한 양 목소리를 높이는 이비엔의 모습에 지안은 난처하게 웃었다.
“네게 주려고 얼굴을 가릴 모자도 챙겨왔는걸!”
황녀가 서둘러 내보인 챙 넓은 망사 모자에 슬그머니 마음이 기울었다. 지안은 곤란한 얼굴로 악시온과 일리아스를 번갈아 보았다.
“으음. 황녀 전하께서 모자도 챙겨와 주셨으니…….”
그 말에 악시온은 다급한 얼굴로 지안을 붙잡으려 했다. 그녀를 붙잡고, 가지 말라고 애원할 요량이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붙잡지 못했다. 지안을 향해 뻗어진 손을 일리아스가 쳐 냈기 때문이었다.
“결정은 끝났으니 물러나는 게 좋겠군.”
듣는 이를 멈칫하게 할 만큼 사나운 경고였으나. 공작은 그 말을 조금도 듣고 있지 않았다. 그저 불안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지안을 바라볼 뿐이었다. 처연한 그 모습을 외면할 수 없어, 지안은 일리아스의 말을 곧장 정정했다.
“좋네요. 그럼 두 분 다, 한발 물러서서 지켜봐 주시겠죠?”
“……뭐?”
“애초에 황녀 전하와 한 약속인걸요. 마차가 비좁다면 하나 더 동원하면 될 일이고요. 황녀 전하와 제가 같은 마차를 타고, 다른 한 대에는 삼황자 전하와 공작님이 함께 탑승하시는 게 좋겠어요.”
“아니…….”
악시온을 동행자로 끼워 넣은 지안은, 반박하려는 일리아스의 모습에 서둘러 말을 이었다.
“전하께선 가까이 있지 않더라도 충분히 능력을 사용하실 수 있다는 걸 증명해 보이셨죠. 거리를 좀 두었다고 해서 저를 보호하지 못하실 리 없어요. 그렇지요? 이해하셨다면, 두 분은 조금 떨어져서 동행하시는 게 좋겠어요.”
그 말에 악시온과 일리아스의 낯빛이 나란히 어두워졌다. 반대로, 이비엔은 누구보다 더 환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다는군. 알아들었으면 두 사람 다 비키지 그래?”
이비엔의 턱짓에 일리아스는 이를 갈며 물러섰다. 악시온 역시 별반 사정이 다르지 않았다.
* * *
마차 밖으로 보이는 거리의 풍광에서 지안이 시선을 떼지 못하자, 이비엔은 내심 흐뭇해하며 물었다.
“그렇게 좋아?”
황녀의 물음에 지안은 가볍게 코끝을 찌푸렸다. 티 내지 않으려 했는데 그렇게나 티가 났나.
“저택에서만 지내야 해서 답답했거든요. 보름 동안 방 밖으론 한 발자국도 못 나간 데다…… 혹시라도 그 이동 능력자가 제가 어디 있는지 알게 되면 또다시 노려질지도 모르니까요.”
“걱정 마. 그런 일은 없을 거야. 오라버니도 동행했고, 나도 있는걸. 어쨌든, 네가 기분전환을 한 것 같아 다행이야. 저번에 커튼도 함부로 걷을 수가 없어서 불편하다고 그랬잖아. 그래서 꼭 널 데리고 저택을 나와야겠다고 생각했지.”
“그냥 한 말이었는데…… 기억하고 계신 줄 몰랐어요.”
이비엔의 말에 지안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지나가듯 한 푸념을 그렇게까지 세세하게 기억하고 있을 줄이야. 하지만 고마운 건 고마운 거였다.
“핑계를 만들어 주셔서 감사해요. 전하.”
기대치 않았던 감사에 이비엔의 얼굴이 밝아졌다. 사심을 채우려고 레스토랑을 내세워 지안과 약속을 잡은 거였는데…… 그게 이런 결과로 돌아올 줄이야! 이비엔은 달아오른 뺨을 숨기지 못한 채 뿌듯한 얼굴로 웃어 보였다.
“……네가 좋아해서 다행이야. 다음에도 또 오자. 오라버니와 공작은 내가 설득할게.”
“그래도 될까요?”
“안 될 게 뭐 있어? 네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영영 그 저택에 갇혀 지낼 순 없는 노릇이잖아. 잠깐이면 몰라도, 평생 그럴 순 없는 일이야. 안 그래? 이런 부당한 일이 대체 어딨단 말이야?”
제 일마냥 분에 차 소리친 이비엔은 돌연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리고…… 공작과 오라버니가 네 방 앞을 맴돌며 신경전을 벌이는 걸 알아. 그래서 네가 불편해하는 것도.”
“……티 났나요?”
“얼굴에 다 쓰여 있던걸.”
심드렁한 이비엔의 말에 지안은 난처히 웃어 보였다. 혹시 싸움이 일어날까 봐 내내 방에 틀어박혀 있긴 했다. 그런데 그게 황녀 전하께 읽힐 정도로 티 났을 줄이야.
전하께서도 아실 정도면, 공작님이야 진작 눈치를 챘을 것이다. 삼황자 전하 역시 두말할 필요 없으리라.
어쩐지 식사를 가져다주던 사람이 어느 순간 공작에서 헤롤드로 바뀌었다 했다. 혹시 나날이 어두워지던 두 사람의 얼굴도…… 나 때문인가?
의문을 삼키는 사이 마차는 미끄러지듯 달려 지안과 이비엔을 제도의 레스토랑에 데려다 놓았다.
지안은 챙 넓은 모자를 깊숙이 눌러쓴 채 마차에서 내렸다. 저택이 아닌 곳에서 숨 쉬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른다. 마차 바퀴가 일으킨 흙먼지가 미처 가라앉지 않은 게 뻔히 보이는데도 들이마신 공기가 유달리 상큼했다.
“어서 오십시오. 황녀 전하.”
미리 예약을 해둔 탓에 레스토랑 앞에는 마차를 알아본 지배인이 나와 있었다. 무려 황녀 전하의 방문이다. 대접에 소홀함이란 절대 있을 수 없었다.
“힉스에 방문하신 걸 환영합니다.”
“자리를 안내해 주겠어?”
“지정석에 이미 세팅을 마쳐 두었습니다. 이쪽으로.”
지배인이 안내한 좌석은 이전과 동일한 자리였다. 제도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시원스러운 전경 역시 이전과 같았다.
전과 다른 것이 있다면 좌석 주변으로 커다란 파티션이 둘러져 있다는 것 정도일까. 테이블 간 간격도 이전에 비해 조금 더 널찍했다. 레스토랑 내부 실내장식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공간을 재구획한 것 같았다.
파티션 자체도 단순하거나 밋밋하지 않았다. 화분과 천, 미술품 따위를 적당히 분배해 놓아 무척 보기 좋았다.
“아름답네요.”
“최근 구성을 바꿔 보았습니다.”
지배인이 가볍게 화답해 왔지만, 그런 단순한 말로 겸양하기엔 꾸밈이 정말 대단했다. 이건 마치, 레스토랑이라기보단…… 섬세히 기획한 야외 미술관 같았다.
싱그러움을 뽐내는 생화와 감탄을 자아내는 석고상, 크고 작은 풍경화에 둘러싸인 식탁이라니. 누가 아이디어를 냈는지 몰라도 적당히 시야를 가리고 소음을 차단하면서 눈을 즐겁게 하는 솜씨가 남달랐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당장 결혼식을 올려도 손색없을 꾸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