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5화 (65/199)

65화

어떤 무리한 요구도 군말 없이 수용하는 에스퍼들을 보며 한때는 안쓰러움과 불쌍함, 그리고 약간의 우월감을 느꼈던 적이 있다. 맹탕 가이드 주제에 우월감을 느낀다니 누가 들었다면 웃다 자지러질 이야기겠지만……. S급 가이드로 판정받았던 초기엔, 얼마나 떠받들어졌는지 모른다.

그것은 마치, 시류의 흐름 같은 것이었다.

가이드임을 판정받고 등급 확인을 위해 협회로 불려간 날, 드디어 한국에도 S급 가이드가 나왔다고 온 사방이 난리였다. 그 환호성과 관심에 어리숙하게 휩쓸리다 말고 정신을 차리니 모두가 자신을 떠받들고 있었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국회의원들이 사진 하나, 악수 한번을 위해 찾아오고, 뉴스에선 자신을 마치 한국을 구할 영웅이라도 되는 양 묘사했다. 정작 게이트에서 죽어 나가는 건 에스퍼임에도 불구하고 다들 그것을 잊은 양 S급 가이드의 출현에 열광했다.

‘하지만 다 헛거였지.’

모든 관심과 집중은 시간의 흐름에 편승하듯 차츰차츰 모래성처럼 허물어졌다. 기대는 실망이 되고, 실망은 분노가 되었으며, 분노는 비난이 되었다. 시기적절하게 터진 몇 개의 게이트가 아니었더라면 아마 전국민적으로 욕을 먹지 않았을까.

상승과 추락의 낙폭이 너무도 커서 마음을 추스르기 힘들었다. 우울증은 티 나지 않게 일상으로 스며들었고, 생활은 빠르게 망가져 갔다. 보다 못한 협회의 연구소장이 정신과 상담을 권유했지만 극구 거부했다.

스물 초입. 법적으론 성인이지만 어른은 아니었던 그런 시기였다. 일상이라는 것도 나름의 노력을 기울여야 굴러간다는 걸 몰랐던, 스스로를 돌본다는 게 뭔지 잘 몰랐던, 그런 나이.

문제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인정하기 싫었다.

고집을 부리며 속으로 곪아가던 자신을 케어하고 설득해온 건, 역설적이게도 협회의 어느 F급 에스퍼였다. 협회의 가이드들이 가이딩을 기피하는 걸로 유명한 F급 에스퍼, 이라영.

“지안아, 우울증 그거 별거 아니다? 원래 그런 건 놔두면 더 심해지는 거야!”

그 말과 함께 불쑥 다가온 그녀는 깜빡이 없이 밀고 들어오는 차량처럼 멋대로 들러붙었다.

처음엔 그런 그녀가 몹시 거슬렸다. 떡고물 하나 떨어질 것 없이 바닥을 찍은 내게 왜 접근해오는지 알 수 없어 경계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라영 언니는 친언니처럼 정성을 기울여 주었다. 시간을 내 정신과에 함께 가 준 사람도 그녀였다. 상담 후 펑펑 울고 나온 내 손에 아이스크림을 쥐여 주며 씩 웃던 얼굴을 기억한다.

그러면서 자신도 옛날에 우울증을 앓았다는, 묻지도 않은 이야길 주절주절 하는 그녀에게 왜 나를 돕는 거냐고 묻자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너도 알겠지만, 난 가이딩 기피 에스퍼 1순위잖아. 가이드한테 하도 데여서, 솔직히 가이드라면 진절머리 날 때가 많아.”

“그런데 왜…….”

“잊어버렸구나? 내가 가이딩 거부당하고 숨어서 울고 있을 때, 네가 짠 하고 나타나서 ‘제가 해 드릴게요, 가이딩!’ 그러면서 내 손 잡아 줬잖아. 기억 안 나?”

“……그랬나요?”

“진짜 까먹었구나? 하긴, 벌써 3년 전 일이니까. 하여간 그때, 나는 네가 날 놀려먹는 줄 알았거든? 가이딩 해 준다고 해놓고선 정작 기운은 하나도 안 흘러들어오고……. 잔뜩 실망했지. 그래서 내가 엄청 화내면서 꺼지라고 막, 그랬었잖아. 나중에 S급 가이드란 말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원……. 인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그땐 미안했어. 난 그땐 정말…… 네가 날 놀리는 줄 알았거든.”

“뭐, 오해는 자연스럽게 풀렸겠네요.”

“네 소문이 하도 짠하게 알려져 있어서 모를 수가 없긴 했지. 아무튼, 지나고 나니까 진짜 고맙더라고. 에스퍼 불쌍하게 생각하는 가이드, 생각보다 많지 않거든. 이용해 먹으려는 사람이라면 몰라도…….”

“정작 가이딩은 해 드리지도 못했잖아요. 그래서 욕먹은 거고.”

“아이참, 미안하다니까? 괜히 말했나 봐 정말! 하여간 난 그때 진짜 고마웠거든? 바로 실망하긴 했는데, 그래도 누가 나서서 가이딩 해 주겠다고 하니까 글쎄 눈물이 핑 도는 거 있지.”

그리고 라영 언니는 씁쓰레한 미소를 감추듯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너무 걱정하지 말고! 나중에 매칭률 나오는 에스퍼 나타나면 잘 대해 줘. 에스퍼들이 바라는 거, 진짜 단순하다?”

그렇게, 자신은 그녀에 의해 다시 일으켜졌다. 비 온 뒤에 땅이 단단해진다고, 한번 크게 앓고 나니 세간의 수군거림도 스스로에 대한 실망에도 무던해질 수 있었다. 노력으로 안 되는 일엔 신경을 끄는 법을 배웠다.

그러나 그만큼 무던해질 수 있었던 건, 혼자만의 노력 때문이 아니었다. 매칭률 0%는 그냥 결과일 뿐이라고, 그건 네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 준 라영 언니 덕분이다.

언젠가 능력 좋은 에스퍼 찾게 되면 그때 보답하라고, 언니는 늘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일 년 후, 라영 언니는 거듭된 가이딩 거부로 인한 폭주로 사망했다. 협회의 가이드들이 언니를 죽인 거나 다름없었다.

통상 F급 에스퍼는 이능이 약해서 잘 폭주하지 않는다. 폭주하더라도 B급, A급 에스퍼들처럼 외부에 영향을 미칠 만큼 위협적이지도 않다. 그저…… 속에서부터 천천히 장기가 망가져 갈 뿐.

언니를 발견했을 땐 이미 늦은 뒤였다.

거기까지 떠올린 지안은 아픈 기억을 다시 구석으로 밀어 넣었다. 이제 와 옛 기억을 더듬어봤자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니 이미 떠난 사람보다는 눈앞의 에스퍼에게 집중하는 게 그나마 이로우리라. 상념을 털어내며 지안은 일리아스의 주먹 쥔 손을 잡았다.

그대로 그의 두 손을 끌어와 가이딩을 시작하자 질끈 감겨 있던 삼황자의 두 눈이 천천히 열렸다. 불신과 기쁨이 한데 엉켜 있는 얼굴을 바라보며 지안이 말했다.

“시녀 노릇이 좀 불만스럽긴 했지만…… 전하를 싫어하진 않아요.”

“……정말인가?”

“팔려 갈 뻔한 저를 구해 주셨잖아요. 웬만한 잘못은 얼마든지 덮어 주고도 남을 은혜를 입었죠, 제가. 여기서 이러고 있지 말고, 들어가서 저랑 얘기 좀 하실래요?”

이끄는 대로 딸려오는 일리아스를 의자에 앉힌 지안은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은 뒤 본래의 용건을 상기했다.

“그때 제가 내건 조건은, 제도로 돌아가는 대신 저를 보호해 달라는 것이었죠.”

“……그랬지.”

“추가로 제안하고 싶은 것이 있어요.”

“제안?”

“폭주를 진정시켜 드리는 조건으로……. 함께 북부로 가 주실 수 있나요?”

그 말에 일리아스는 자신의 손등을 덮은 지안의 손을 천천히 떼어놓았다. 그는 마치 배신이라도 당한 듯한 얼굴이었다.

“결국 북부를 선택한 건가? 내게 그걸 도와 달라고……?”

“전하께도 나쁜 제안은 아닐 거예요.”

“공작과는 무슨 관계지?”

억눌린 목소리로 추궁해 오는 삼황자의 모습에 지안은 짐짓 대답을 골랐다. 이와 같은 질문을 예전에도 받은 적 있었는데. 당시에 뭐라고 대답했더라.

“공작님과는…….”

“그는 남자로서 널 원해. 나도 그렇고.”

“전하.”

“네 동의 없이 약혼을 추진한 건 분명 내 잘못이었지만…… 다시 그때로 되돌아가도 난 같은 선택을 할 거다. 그러니 떠나지 마. 내 옆에 있어. 그럼 내가 널 지키겠다. 약속해도 좋아. 원하는 건 뭐든 들어 주겠다.”

패배를 선언하듯 비통한 말이었으나. 그 말을 듣는 지안의 눈빛은 한 점 흔들림 없이 고요했다. 태연한 지안의 기색에 일리아스는 점점 초조해졌다.

“전 이미 원하는 걸 말씀드렸어요.”

“……내가 너의 이능을 이용할까 봐 그러는 건가? 널 이용해 폭주를 피하려 들까 봐? 그런 거라면 걱정 마. 그런 짓 따위, 절대 하지 않을 테니.”

“왜죠? 처음엔 제게 기사단에 들어오라고 하셨잖아요.”

“그땐! 널 사랑하게 될 줄 몰랐어!”

“…….”

“네 능력에 기대 연명하다가, 그다음엔? 그러다 결국 네가 폭주하기라도 하면? 나는, 그런 건 견딜 수 없어. 그러니 그 제안은 거절하겠다.”

완강한 거절이었다. 표정을 보건대 협상의 여지조차 없어 보였다. 하지만 기껏 공작에게서 지구로 돌아가는 방법을 들을 수 있게 되었는데, 이제 와 포기할 순 없는 일 아닌가.

망설이는 사이 삼황자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를 붙잡아야 한다. 붙잡아야 하는데…… 차마 그럴 수 없었다.

팩 돌아서는 삼황자의 뒷모습을 보며, 지안은 안도와 한탄을 동시에 느꼈다. 하필 공작이 북부를 포기하겠다고 선언한 지금, 그에 뒤지지 않겠다는 듯 삼황자까지 이런 식으로 나오다니.

결국,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하는 것일까.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지안은 직감했다. 무엇을 선택하든, 그 결과는 엉망일 것이다.

* * *

며칠간, 저택은 고인 물처럼 고요했다. 단순히 침묵을 넘어서 넘실대는 긴장감이 먼지처럼 저택 곳곳에 포진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북부의 기사들과 삼황자가 선별한 인선이 어수선하게 뒤섞였으니 나름 소란할 만도 한데 그런 일도 없었다. 그들 모두 제각기 주인의 눈치를 보며 숨을 죽였기 때문이었다.

언제고 폭발할 것 같은 화약고 안에서의 생활은, 매 순간이 위태롭고 불안정했다. 이 같은 분위기가 조성된 건 모두 삼황자와 공작의 대치 탓이었다.

조마조마한 건 지안도 마찬가지였다.

파장을 느낄 수 있기에 더욱 살 떨리는 환경이랄까. 만약 삼황자와 공작의 심사가 뒤틀려 싸움이 난다면…… 제도 외곽의 저택 한 채쯤은 손쉽게 불타 사라질 것이다. 삼황자가 황태자궁을 전소시켰다는 사실을 미처 몰랐던 지안은, 어처구니없게도 이러한 것을 걱정했다.

고등급일 것으로 예측되는 에스퍼간의 싸움이다. 저택의 소실은 사실상 두 번째 문제고, 싸움에 휩쓸려 죽는 사람이 나타나도 이상하지 않다.

‘물론 절대 그렇게 되지 않도록 막을 테지만…….’

여차하면 가이딩을 하면 될 것이다. 당장 걱정한들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니 한시적 평화나마 잘 누리자고 지안은 생각했다.

그러나 뜻밖에 분란은 두 사람의 다툼이 아닌, 황녀 전하와의 외출 약속으로 인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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