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어, 음. 저 때문에 소란이 일어난 건 사실이지만, 본보기라니? 무엇을 위한 본보기죠? 황족 모욕죄? 역시 그건가요?”
“그럴 리가! 넌 잘못한 게 없어. 피해자일 뿐이라고. 정말로 네가 오라버니를 모욕한 것도 아니고, 설령 그랬더라도 당사자가 아무것도 문제 삼지 않았는데 다짜고짜 시해죄를 묻다니? 이 일은 전적으로 황태자 전하의 잘못이야.”
일방적으로 두둔해주는 황녀의 모습에 지안은 씁쓸히 웃었다. 말은 저렇게 해도 황태자 역시 황녀 전하의 혈육이 아닌가.
그래도 잘못이 없다고 말해준 것만은 고마웠다. 마음속으로는 황태자의 편을 들고 있다 해도, 말이나마 저렇게 해 주는 게 어딘가. 이비엔이 알았다면 기함했을 짐작을 마친 지안은 쓴 물처럼 올라오는 침을 삼켰다.
그런 지안의 눈치를 보며 이비엔은 미처 말하지 못한 몇 가지 사실을 이어 말했다.
“이 일로 오라버니와 황태자 전하가 정면으로 충돌했어. 황태자가 전하가 네게 사과하지 않았거든. 뭐, 덕분에 황태자 궁이 전소되긴 했지만…….”
뒷말은 아주 작아서 지안에게 잘 들리지 않았다. 황녀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
“하여간, 나는…… 네게 미안하게 생각해. 바라는 보상이 있다면 말해 봐. 뭐든 좋아.”
“보상이라뇨? 오해할 만한 일이었고, 황녀 전하께서 잘못하신 일도 아닌걸요.”
“아니. 이 일은 명백히 황실의 독단이었고, 나 역시 그 일원이야. 황태자 전하의 결정을 막지 못했으니 내게도 책임이 있어. 그리고 억울함은 원래 돈으로 푸는 거야.”
마지막 말은 확실히 위안이 되었다. 지안은 굳은 얼굴을 풀고 푸스스 웃었다. 그 웃음에 덩달아 얼굴을 밝힌 이비엔이 물었다.
“그…… 지안. 몸을 다 추스르고 나면 제도의 레스토랑에…… 또 가지 않을래?”
조심스러운 제안에서 조마조마한 마음이 읽혔다. 지안은 기꺼이 황녀의 제안에 응했다. 일이 이렇게 되긴 했지만, 황녀는 잔뜩 울음 섞인 얼굴을 하면서도 순순히 나를 배웅해주었던 유일한 에스퍼 아닌가.
“술도 사 주시는 건가요?”
장난스러운 되물음에 이비엔은 놀라 소리쳤다.
“당연, 당연하지!”
지안이 거절해도 할 수 없다고 여겼는데, 이런 질문이 돌아오다니! 저도 모르게 말까지 더듬은 이비엔은 얼굴 가득 웃음을 띠며 말했다.
“몇 병이라도 좋아! 잔뜩 사 오자!”
들뜬 목소리로 외친 이비엔은 외출 날짜까지 정한 뒤에야 문밖에서 전전긍긍 맴돌고 있을 일리아스에게 생각이 미쳤다.
마음 같아선 지안에게 아무런 언질도 하고 싶지 않았다. 않았지만……. 창백히 굳어버린 채 문 너머를 지키고 있을 오라비가 아주 조금, 불쌍했다. 무엇보다 지안을 뒤쫓아 붙잡아 세우고 다시 제도로 불러들인 것 모두 그가 한 일 아닌가.
기사들의 목격담을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그토록 사납고 오만한 오라비가 누군가에게 굴복한다니. 자의로 무릎을 꿇다니. 도무지 상상이 가질 않았다.
하지만 그 대상이 지안이라면 왠지 모르게 납득이 되는 것이다. 이비엔은 조금 야윈 채로 웃음 짓는 지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금이야 이렇게 얼굴을 맞대고 있지만, 지안은 병을 이기고 일어난 후로도 이틀간을 더 병치레했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약을 삼키고 죽은 듯 잠들어 있는 모습을 잠깐 본 것이 전부다. 그러니까 이것은 사흘째 되는 날이야 간신히 받아들여진 병문안이었다.
하지만, 허용된 건 자신뿐이었다.
‘만나고 싶지 않다고 합니다.’
오데르겐 공작이 이 사실을 전해왔을 때, 이비엔은 일리아스가 당장 공작의 멱살을 쥐리라 예상했다. 서로를 의식하며 긴장과 경계로 날을 바짝 세우고 있던 둘의 대치를 떠올리면 싸움이 나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라버니는 마치 지안에게 직접 의사를 전해 듣기라도 한 듯 맥없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이는 조금도 그답지 않은 반응이었다.
병에 걸린 병아리처럼 맥없이 고개를 숙이던 일리아스의 모습을 떠올린 이비엔은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어렵사리 열었다.
“저, 그런데…… 오라버니가 청한 병문안은 왜 거절한 거야? 역시 화가 나서 그런 거야? 아니면, 그, 약혼 문제로?”
“그것도 있지만, 아무래도 껄끄러워서요.”
지안은 거기까지만 말하고 입을 다물어 버렸고, 이비엔은 눈치껏 더 묻지 않았다. 그러나 궁금증만은 여전했다. 당장 눈앞의 지안의 출신이나 정체조차도 전혀 모르고 있지 않나.
언뜻 보면 평범하기 짝이 없어 보이지만, 지안은 탄광 속의 노란 카나리아처럼 예민하고 섬약했다. 몇 마디 말로도 알 수 있는 높은 자존감이 대체 어디서 나오는지 의아할 정도였다. 그처럼 예민한 사람들은 대개 주눅 든 인상인데 지안은 그렇지도 않았다.
단단한 자존감. 한없는 예민함. 공존하지 못할 것 같은 두 가지를 지안은 모두 가지고 있었다. 마치…… 살면서 단 한 번도 차별받지 않은 것처럼. 제약에 시달리지도, 강요에 굴복한 경험도 없는 사람마냥 자유롭다.
그래, 자유.
지안은 한 번도 자신의 자유를 침해당한 적 없는 사람 같았다.
* * *
일리아스는 지안의 목소리를 반복해서 곱씹었다. 오데르겐 공작이 병상에서 막 일어난 그녀에게 뭐라고 말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그에 답하는 지안의 표정과 목소리만은 생생히 보고 들을 수 있었다.
‘병문안이요? 황녀 전하와 삼황자 전하께서요?’
반문한 지안은 잠깐의 공백 후 이렇게 말했다.
‘삼황자 전하와는, 만나고 싶지 않아요.’
단지 목소리만 들려온 것이었다면 이렇게나 진창에 빠진 기분은 아니었을 것이다. 얼핏 구겨진 얼굴에 서린 선명한 기피. 부지불식간에 혐오의 대상을 발견한 듯한 표정. 찰나간 드러나 보인 피로한 눈빛.
‘혹시라도 싸움이 날 것 같으면 그냥 들여보내시고요.’
체념에 가까운 목소리 끝에 깊은 한숨이 매달렸다.
그 한숨에 모든 것이 녹아내렸다. 잘못을 시인할 기회도, 돌아선 마음을 되돌리겠단 용기도, 다시 처음부터 다가가리란 다짐도 속수무책으로 사라져 버렸다.
파도 위로 떠오른 포말이 부서지듯 일리아스는 부서져 내렸다. 타다 만 재가 바스러지듯 바스러졌다. 아스라한 공포가 기어코 드러내 보인 맨얼굴은 그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맨얼굴을 목도한 이상, 얼어붙는 것 외엔 다른 대안이 없었다.
무력하게 압사당하는 벌레의 기분이 이러할까.
어째서 갑자기 이런 능력이 생겨났는지, 어디서 이런 맹목적인 마음이 샘솟아 자신을 망쳐 놓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단순히 병문안을 거절당한 것뿐인데도 절벽에서 떠밀린 듯한 충격이, 추락감이, 공포가 온몸을 지배했다.
왜 나와 만나고 싶지 않은 건데.
당장이라도 달려가 묻고 싶었다. 그러나 이미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으로 분류된 뒤다. 그것에 허락이나 용인은 없었다.
기실 생각해 보면, 그녀가 그렇게 말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녀의 이능에 기대 몇 초라도 더 삶을 연명하려 몰래 침실에 찾아들지 않았나. 폭주의 고통을 경감시키려 한 일이라지만, 무슨 이유를 가져다 붙여도 구질구질한 변명에 불과하다.
자신이라도 싫을 것 같았다. 세상의 그 누가, 자신의 생명을 좀먹으려는 자와 만나고 싶어 하겠는가.
일리아스는 자조적으로 웃으면서도 닫힌 문 앞을 떠나지 못했다.
* * *
잔뜩 얼굴을 찌푸리는 지안의 모습에 악시온은 재빨리 사탕을 내밀었다. 냉큼 사탕을 입에 문 지안이 툴툴대며 물었다.
“……이거 언제까지 먹어야 해요?”
“다 나을 때까지.”
“아니, 저 다 나았어요. 약 같은 건 이제 그만 먹어도 되지 않나요?”
불만 가득한 목소리에 악시온은 지안의 이마를 짚었다.
“아직 미열이 있다.”
“……거짓말이신 거 제가 뻔히 알거든요?”
악시온은 허를 찔린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조금 더 요양하길 바란 마음이 앞선 탓에 가이드에겐 거짓말이 안 통한단 사실을 까맣게 잊고 말았다. 그러나 손바닥에 희고 매끄러운 이마의 감촉이 남았으니…… 아주 손해만 본 건 아니었다.
“미안하다. 열이 있다는 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해열 때문이 아니더라도 몸에 좋은 약이다. 조금이라도 더 먹는 게 좋지 않겠나?”
“싫어요. 맛없어요. 이제 약은 그만 들고 오세요.”
어차피 가이딩을 무리하게 해서 생긴 증상이다. 이런 건 약이 듣지도 않았다.
단호한 말에 악시온의 눈썹이 아래로 처졌다. 금화를 보따리로 싸 들고 가도 구하기 힘든 약인데 맛없다는 이유로 먹지 않겠다니……. 하지만 싫다는 걸 강요하고 싶진 않았다. 늦었지만 만달렌에서 구한 약차라도 챙겨 먹이면 지금보단 더 건강해지리라.
“알겠다.”
“내일부턴 식사도 죽 말고 다른 걸로 먹고 싶어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이틀 전만 해도 죽조차 잘 삼키지 못하던 사람 아닌가. 그런 그녀가 자진해서 먹을 걸 찾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먹고 싶은 것이 있나?”
“고기요.”
“준비하겠다.”
확답하자 지안의 얼굴이 밝아졌다. 어쩐지 가슴을 설레게 만드는 그 미소에 악시온은 제도 내에 존재하는 고기란 고기는 모두 사 오겠노라 마음먹었다. 그녀가 정확히 어떤 고기를 좋아하는지 모르니 종류를 최대한 갖춰 둘 생각이었다.
“쉬고 있어라.”
빈 죽 그릇과 약 그릇을 챙겨 지안의 침실을 나선 악시온은 걸음을 서두르다 말고 우뚝 멈춰 섰다. 문 앞을 서성이던 일리아스와 마주친 것이다.
“…….”
일반인이 보았다면 멈췄다는 느낌조차 받지 못할 만큼 잠깐이었지만, 일리아스는 그 미세한 움직임을 단번에 포착할 수 있었다.
불쾌함, 못마땅함, 적의와 경계, 이 모든 걸 뭉뚱그린 악시온의 눈빛은 바다 위 빙하처럼 새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아마 이런 감정들이 공작의 걸음을 멈추게 만든 것이리라.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악시온은 아무것도 보지 못한 양 일리아스를 지나쳤다. 의도적인 무시였다. 그러나 힘주어 다물린 아래턱까지 감추진 못했다.
그리고 이는 일리아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각자 다른 방향으로 시선을 두며 서로가 서로를 등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순 흉흉해진 파장이 한데 엉키며 대기를 진동시켰다. 잔떨림에 튕겨 나가는 바람 소리가 스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