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그 말이 생경한 좌절감을 주며 쿵쿵 뛰는 일리아스의 심장을 짓이겨 놓았다. 일순간 무겁게 가라앉는 파장의 흐름에 지안은 서둘러 뒷말을 내뱉었다.
“북부로 되돌아가지도 않을 거고요.”
“……그 말은.”
간신히 되묻는 목소리는 쇳소리처럼 꺼끌꺼끌했다.
“제 판단으론, 공작님과 삼황자 전하 두 분 모두 물러서지 않으실 것 같네요. 해서, 타협점을 찾아 당분간 중간지점인 제도에서 거주할까 해요.”
“……타협?”
“조건도 있어요. 싫으면 관두시고요.”
“뭐든, 좋다.”
터져 나온 대답은 헐떡이는 숨처럼 다급했다. 오만한 황족의 표상과 같던 그에게서 결코 볼 수 없으리라 여긴 절박함이었다.
* * *
애써 도망친 길을 되짚어 다시 제도로 향하려니 속이 쓰리다 못해 아렸다. 그래도 상거지 꼴로 공작에게 안겨 있는 게 민망하고 신경 쓰이는 걸 보면, 아까와는 다르게 상황이 얼추 정리되긴 한 모양이다. 연신 힐끔대는 삼황자의 시선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것까지 신경 쓰기엔 너무 피로했다.
제대로 목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피곤이 몰려들었다. 너무 많은 일이 한꺼번에 들이닥쳐서 뭘 어떻게 대처해 나갔는지, 제대로 대처를 하긴 했는지조차 되짚기 어려웠다. 저도 모르게 꾸벅거리는 지안의 머리를 악시온은 슬쩍 제 가슴팍에 기대 놓았다.
“도착하면 깨워 주겠다.”
대답할 힘도 없어 지안은 까무룩 두 눈을 감았다. 할 수만 있다면 한 사흘쯤 내리 잠만 자고 싶었다.
이런 지안의 바람은 열병이란 형태를 통해 실현되고 말았다. 과도한 긴장, 무리해서 펼친 가이딩, 밤새 도망치느라 바닥을 찍은 체력, 내내 곤두선 신경과 지나친 스트레스가 병을 불러온 것이다.
어렵게 삼킨 약을 토하고 넘어가지 않는 수프와 죽을 억지로 먹었다가 다 토해내며 지안은 내리 사흘을 앓았다. 열에 들뜬 머리로 알 수 있는 것은 침대가 있고, 거기에 몸을 누이고 있다는 것뿐. 이 외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어떤 병이든 죽지만 않으면 사람은 다시 일어나는 법이다. 지안 역시 닷새쯤 되었을 땐 기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어렵사리 명료해진 정신을 반가워하면서도, 지안은 응급 키트를 탈탈 털어 쓴 과거의 자신을 원망했다. 해열제 하나만 있었으면 사흘 내리 아프진 않았을 것이다. 이제 와선 소용없는 생각이었지만 아쉬운 건 아쉬운 거였다.
“필요한 사람에게 다 쓴 걸 어쩌겠어.”
중얼거리며 응급 키트를 향한 미련을 애써 털어버린 지안은 비실거리는 걸음으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크게 아프고 난 뒤라 그런지 한결 몸이 가볍게 느껴졌다. 목도 마르고 배도 고프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확인해야 할 게 있었다. 커튼을 걷으며 창가에 다가서자 저 멀리 황성이 보였다. 침구나 가구 따위로 이미 짐작한 것이긴 하지만, 황성으로 돌아가지 않겠단 말이 정말 받아들여진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여긴 제도의 저택쯤 되는 걸까.
“그런데 왜…….”
삼황자가 여기 있지?
두 눈으로 확인하지 않더라도 그가 가까이 있단 걸 느낄 수 있었다. 게다가 착각이 아니라면, 황녀 전하도, 공작도 이 저택에 있는 것 같았다.
선명히 진동해오는 세 개의 파장이 어떤 파란을 예고하는 것 같아 지안은 지긋이 두 눈을 감았다.
* * *
“단순 기절일 뿐, 제가 멀쩡하단 걸 아셨을 텐데요. 답하십시오. 지안에게 황족 시해의 누명을 씌운 이유가 뭡니까.”
음울한 일리아스의 물음엔 억누를 수 없는 사나움이 묻어나 있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언제나 사나웠으므로 알레인은 대수롭지 않게 일리아스의 물음에 대답했다.
“그야 그 시녀의 이능이 널 해코지했기 때문 아니냐. 제도의 귀족들 모두 이를 목격했다. 능력자라 하나 너 역시 테리온 황가의 일원. 본보기로 삼아 마땅하다.”
황태자다운 논리에 일리아스는 이를 악물었다. 사실이 아니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자칫 지안의 이능이 밝혀질 수도 있는 탓이었다. 지안의 이능이 밝혀지면 그녀는 어떤 식으로든 희생양이 되고 말 것이 분명했다.
바로 그 점을 염려해 황태자에게도, 폐하에게도 지안의 이능에 대해 함구해 왔다. 이비엔 역시 동의한 일이었다.
“오해입니다. 겉보기엔 제가 그녀의 이능에 당한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르나…… 그녀는 제게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지금 일개 시녀를 감싸는 거냐? 네 권위를 바닥에 처박은 여자를? 쯧, 한낱 시녀를 둘러싸고 공작과 치정 싸움을 벌일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이 무슨 멍청한 짓이냐. 사교계의 명사들이 널 가리켜 뭐라 하는지 아느냐? 아직도 능력자 티를 못 벗고 망나니처럼 군다고. 다들 그렇게 말한다. 그런 널 위해서라도 뒷말이 나오지 않도록 손을 써 둬야 했다.”
돌연 급격히 낮아진 목소리에 일리아스는 망연히 되물었다. 손을 써 둬야 했다니……. 무엇을?
“……무슨 말입니까?”
“출신도 모르는 여자가 황실의 위엄을 실추시키도록 내버려 둘 순 없는 일 아니냐. 그러니 별수 있느냐? 원인을 제거할 수밖에. 황족에게 상해를 입혔으니 겉으로 드러난 명분 또한 완벽하다. 공작이래도 감히 반박할 수 없는 명분이지.”
그런데 하필 살아 돌아오다니……. 황태자는 그렇게 마저 말하려 했다. 하지만, 그는 다음의 말을 이어서 말하지 못했다. 얼굴 앞으로 훅 끼쳐온 열기 탓이었다.
“이, 이게 무슨……!”
어처구니없게도 황태자의 집무실은 이미 천장과 바닥 가릴 것 없이 화염에 휩싸인 채였다. 고작 1, 2초나 되었을까 싶은 짧은 순간이었으나, 온 사방의 벽면에 불을 두르는 건 일리아스에겐 숨 쉬듯 쉬운 일이었다.
터져 나온 분을 참지 못한 일리아스는 황태자의 멱살을 잡아 그대로 불 속에 던져넣었다. 산 채로 태워 죽여도 속이 시원치 않았다.
……않았으나, 일리아스는 황태자가 비명을 지르며 화염 속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문밖에 대기하던 기사들이 황태자의 비명을 듣고 놀라 뛰어들고, 물을 길어 황태자의 옷에 달라붙은 불을 껐음에도 개의치 않았다. 어쨌건 혈육이었고. 그간 받들어 온 황태자였기 때문이었다.
일리아스는 잠깐 사이 타다 만 생쥐 꼴이 된 황태자에게 거칠게 일갈했다.
“네가 황태자인 걸 다행으로 생각해라. 그 알량한 지위가 아니었다면 산 채로 뼈째 불탔을 테니.”
비산하는 불티를 등지며 일리아스는 그대로 황태자궁에서 빠져나왔다.
그러나 그의 분노가 지펴낸 화염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황성의 시종과 하녀들, 물을 다루는 능력자까지 모두 동원되어 불을 끄려 노력했으나 허사였다. 지안의 처분을 입에 담은 황태자의 말이 강한 촉매제가 되어 불을 지폈기 때문이었다.
“물! 물을 더 가져와!”
일리아스는 사람들의 아우성과 비명을 등진 채 한낱 장작으로 전락한 황태자궁을 뒤로했다. 불타는 궁의 전경과 시종들의 호들갑은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열없는 걸음으로 황태자궁을 벗어나며 일리아스는 생각했다. 충동적으로 아르킨을 단장직에서 해임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그가 남아 있었다면, 기사단이 황태자의 명령을 받아 지안을 죽이려 뒤쫓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엉터리 누명을 쓰고 쫓기면서 지안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먹먹히 미어졌다.
지안은 열이 나는 것 같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이틀째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따금 정신을 차릴 때도 있었지만, 그마저도 물을 마시거나 애써 먹인 약을 토해낼 때 잠깐잠깐 이성을 부여잡는 것에 불과했다.
오늘 밤엔 깨어날까? 내일은? 약도 제대로 삼키지 못했는데 죽이나마 제대로 삼켰을까? 끝없는 상념을 껴안은 채 일리아스는 걸음을 서둘렀다.
그날 밤, 황태자궁은 하룻밤을 채 넘기지 못하고 전소하고 말았다. 제도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황성에 난 큰불을 감상할 수 있었다.
* * *
그나마 가장 마음 가고 신경 쓰이는 사람. 반갑다고 해도 좋을 사람은 황녀 전하가 유일했다. 일말이라도 이런 마음이 드는 건 아마 동성이란 이유가 크게 한몫할 것이다.
지안이 깨어난 이후. 괜찮으냔 물음 외엔 아무것도 묻지 않은 이비엔은, 화병에 새로 꽃을 장식하고 있었다. 작은 종 같은 보라색 캄파눌라로 협탁을 장식한 그녀는 조곤조곤 그간의 일을 지안에게 설명해 주었다.
“그간 앓느라 정신없어 몰랐겠지만…… 여긴 제도 외곽의 저택이야. 공작이 급히 사들인 곳이지. 기사들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으니 안심해도 좋아.”
“기사라면…… 삼황자 전하의?”
“아, 네게 씌워진 오라버니를 시해했단 죄목은 이제 없어졌어.”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지안은 제게 화살을 쏜 기사들의 말을 기억해 냈다.
‘해명은 황태자 전하의 앞에서 하도록.’
“절 추격해온 기사들이 그러더군요. 해명할 것이 있다면 황태자 전하의 앞에서 하라고. 황태자 전하께선…… 대체 왜 저를?”
피하고 싶은 주제에 이비엔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지안이 확실하게 지목해 물어보는데 말하지 않을 수도 없다. 이비엔은 한숨을 쉬며 사실을 털어놓았다.
“맞아. 황태자 전하께서 네게 오라버니의 시해죄를 물으셨지.”
“그분은 왜 제게 그런 짓을?”
“전해 듣기론, 네가 황실의 위엄을 실추시켜서 그랬다는군.”
“제가요?”
“표면상으론 그래. 오라버니가 그, 너와…… 키스한 후 쓰러졌었잖아. 상황을 오인하는 자들이 많았어.”
“으음. 그렇군요. 오해하실 만하네요.”
지안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답하자 이비엔은 냉소하며 눈썹을 구겼다.
“오해는 무슨. 어차피 오라버니가 일어나면 해결될 문젠데. 아마 황태자 전하는 공작과 오라버니가 본인의 연회를 망쳤다고 생각하실걸. 이건 일종의…… 본보기 같은 거였을 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