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초조한 심정을 어쩌지 못하며 일리아스는 지안의 기척에 집중했다.
아득히 먼 거리였으나 제도에서 점점 더 멀어지는 지안의 움직임이 선명히 느껴졌다. 이동 속도를 보건대 말이나 마차를 이용하는 중이리라. 그리고 그녀의 곁에는, 분명 그가 있을 것이다. 북부의 공작, 악시온 오데르겐이. 일리아스는 함께 도주하는 남녀를 상상하며 뿌득―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불현듯, 지안의 일갈이 뇌리에 떠오른 것이다.
‘전하께선 제 의사를 존중하실 생각이 조금도 없으시군요. 기억하세요. 바로 그게, 제가 북부로 되돌아가려는 이유니까!’
그 말을 떠올리고 나니 새삼, 자신에게 입 맞추던 지안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무런 표정도 떠올라 있지 않던 그녀의 얼굴. 결심을 마친 냉담한 눈빛.
닿아온 입술에 감탄하고, 농밀히 흘러드는 그녀의 이능에 취해 미처 깨닫지 못했던 그 표정이 날카로운 유리가 되어 심장에 틀어박혔다. 바로 그 통증이 말하고 있었다. 그녀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걸. 어차피 폭주로 죽을 운명이라면, 남은 삶은 지안을 위해 쓰고 싶었다.
극단을 달리는 이 선택을 이해받지 못해도 좋다. 미움받아도 좋다. 가서 말할 것이다. 떠나지 말라 매달릴 것이다.
하지만 이조차 욕심이라면?
지안을 곁에 두고 싶다는 조바심에 눈 멀어 저지른 행동이 이런 결과로 돌아올 줄 몰랐다. 그간의 공로를 빌미로 폐하께 청원하는 게 아니었다.
제도를 이용해서라도 지안을 붙들어 놓고자 한 내 바람은, 선을 넘은 욕망이었나.
하지만 그만큼 간절했다. 지안과 함께 잠드는 이비엔을 치우고. 대신 그 자리에 눕고 싶었다. 손을 뻗으면 검은 머리카락이 만져지고, 작은 숨소리가 언제든 들려올 거리를 원했다.
과욕임을 알면서도, 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허나 조급함으로 벌인 일이 이런 결과로 돌아올 줄 알았다면, 결코 약혼을 수단으로 삼지 않았을 것이다.
후회로 점철된 결정들이 일리아스의 눈앞을 휙휙 스쳐 지나갔다.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 감옥에 잡아 가두지 않았더라면. 강제로 시녀 삼을 것이 아니라 손님으로 대우했더라면. 기사들을 시켜 그녀를 감시하라 명하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그녀는 다른 선택을 했을까?
과거의 과오를 똑바로 쳐다보기 힘들었다.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포기하진 않을 것이다. 지안을 붙잡을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그 가능성에 모든 걸 걸리라.
결심을 마친 일리아스는 아득히 느껴지는 지안의 기척에 집중했다. 곧 끊어질 실처럼 가늘고 희미했지만, 분명한 연결감이 지안을 생생히 보고 느낄 수 있게 해 주었다. 온 정신을 집중해 눈을 감자 두려움에 질린 지안의 얼굴이 흐릿하게 엿보였다.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기사들에게 따라잡힌 것일까? 알 수 없으나 위협당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희미한 메아리처럼 지안의 비명이 들려왔다.
‘싫어!’
결코 들릴 리 없는 비명이었다. 절대 들려와선 안 되는 비명이었다. 아득한 거리를 뛰어넘어 곧바로 귓전에 꽂히는 지안의 목소리에 일리아스는 곧바로 능력을 일으켜 지안을 보호했다.
시야가 닿지 않는 범위로는 한 번도 시도해본 적 없던 이능 사용이었지만, 가능과 불가능을 점칠 여유는 없었다. 실패하더라도 황성의 기사라면 누구나 내가 일으킨 화염을 알아볼 터. 시간을 벌기엔 충분했다.
범주를 넘어선 능력의 사용에 한동안 고통받겠으나, 폭주로 치닫는 고통은 매 순간 겪어왔던 것이니 상관없다. 무리한 결과 폭주하더라도 괜찮았다. 해낼 것이다. 해내야 한다.
다짐하며, 일리아스는 핏발 선 눈으로 화염을 일으켰다. 가중되는 부담과 고통은 조금도 문제되지 않았다. 머릿속으로 되뇌는 것은 그저 지안을 보호하겠다는 일념뿐.
마침내 지안의 뒷모습을 눈에 담게 될 때까지, 그는 오직 그 하나만을 생각했다.
* * *
퇴로를 막듯 기사들이 사방을 에워쌌다. 등 뒤엔 삼황자가 서 있었다. 지안은 체념한 얼굴로 일리아스가 버럭 소리치길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무엇하나 들려오는 게 없었다.
감지하려 하지 않아도 분노를 담은 파장이 이토록 강렬히 뿜어져 나오는데…….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일까. 여기까지 날 쫓아왔으면서, 왜 날 돌려세워 다그치지 않지?
들려오는 거라곤 오직 흐트러진 숨소리뿐, 다그침도, 고함도 없었다. 화를 억눌러 참았다가 내가 돌아서면 그때 화낼 생각인 걸까? 그걸 기다리고 있는 거야?
……뭐, 아무렴 어떤가. 이미 붙잡힌 마당인데. 당장 공작과 싸움을 벌이지 않은 것만 해도 감사할 지경이다. 그 성격에 다짜고짜 칼부림 나지 않은 게 어딘가. 고집스레 뒤돌아서지 않고 있지만, 이래 봤자 현실을 직시하는 것만 지연될 뿐이다.
공작에게도 말하지 않았나. 대화를 먼저 해 보자고. 그렇게 말한 이상, 좋든 싫든 삼황자와 대면해야 한다. 지금 공작이 기사들의 포위를 뚫고 나가려 시도하지 않는 것도 모두 내 탓 아닌가.
지안은 마음을 다잡으며 삼황자를 향해 돌아섰다.
“전하, 저랑 잠시 얘기를……?”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삼황자가 없었다. 분명 등 뒤에서 그의 파장이 느껴졌는데, 이게 무슨 일이지?
의문도 잠시, 지안은 곧바로 일리아스를 찾아낼 수 있었다. 뒤돌아선 시야의 정면에 삼황자가 보이지 않은 건, 그가 바닥에 무릎 꿇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왜 이러세요?”
당황스러웠다. 제 얼굴을 보는 즉시 버럭 화부터 낼 줄 알았는데……. 대체 무슨 꿍꿍이로 이런 짓을 벌이는 걸까. 날 난처하게 만들려고?
그렇다면 삼황자는 성공했다. 이렇게 난처한 경우는 난생처음이었으니까. 미동 없이 고개를 숙인 모습이 너무 완고해 일으켜 세우려 해 봤자 소용없을 것 같았다. 억지로 일으키려 한들 힘이 달려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황족 아닌가. 보는 눈이 없다면 모를까, 기사들이 다 보는 앞에서 삼황자를 이렇게 무릎 꿇린 채 내버려 둘 순 없었다. 퇴로를 막고 선 기사들도 하나같이 당혹스런 기색이었다.
무엇보다 그칠 줄 모르고 활활 타오르고 있는 불도 좀 꺼 달라고 요청해야 했다. 고민 끝에 지안은 삼황자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우선은 눈높이부터 맞추고 보자는 심산이었다.
“전하.”
나지막이 부르자 움찔 반응해온다.
“저 좀 보세요.”
천천히 고개를 든 삼황자의 얼굴엔 어떤 간절함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꾹 다 물린 입매와 초점 없이 흔들리는 눈동자가 말하고 있었다. 이렇게 널 잃을 순 없노라고. 그와 얼굴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바로 알 수 있었다.
협회에서, 삼황자와 같은 얼굴을 본 적 있다. 지구의 수많은 에스퍼들이 제 가이드를 향해 지어 보인 표정이었다.
뒤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고 여겼던, 영락없이 분노인 줄 알았던 파장의 울림이…… 분노가 아닌 애걸이었다니.
차라리 화를 냈다면 좋았을 것이다. 지안은 치미는 한숨을 삼키며 말했다.
“음. 전하……. 제 몸에 붙은 불 좀 꺼주세요. 그리고, 좀 일어나시고요.”
“들어 줘. 널 존중하지 않은 건 아니었어. 나는 다만 너를 보호하려고…….”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잠자코 귀를 기울이니 더듬더듬, 뒤늦은 해명이 삼황자의 입에서 쏟아져나왔다. 나를 더는 시녀의 위치에 두고 싶지 않아서. 황녀의 전속 시녀인 나를 다시 자신의 궁으로 데려올 명분이 필요해서, 공작이 생일 연회에 초대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불안해져서, 그래서 약혼을 빌미로 삼았노라는, 조금 구차하고 많이 안쓰러운 그런 이야기였다.
“……미리 상의하지 않은 내 잘못인 걸 안다. 나를 시해하려 했다는 억울한 죄목을 뒤집어쓰게 된 것도…… 사과하겠다. 그러니, 가지 마.”
해명을 마치며 떠나지 말란 요구를 가져다 붙이는 그 말에 속이 꽉 막혀 왔다. 미안함을 표시하고 사과해 오지만, 이것이 전부라 생각하니 역시 실망스럽다. 그로선 최선의 사죄였겠지만, 정말 그럴까?
삼황자가 한 행동은 단순히 사과로 넘길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 잘못을 알아서 시인해 주니 고맙긴 한데. 고마움과는 별개로 내가 그의 독단을 다 이해해 줘야 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이쯤 되니 되짚어 보지 않을 수가 없다. 연회장에 공작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지금과 같은 상황이 아니었다면, 그때도 그는 내게 이 같은 사과를 했을까? 내가 여전히 시녀복을 입고 있는 채였다면 어땠을까. 그때도 삼황자는 지금과 같은 선택을 할까?
드러내기 창피한 속내를 밝히며 이토록 순순히 내게 사과해올까? 자신의 결정을 강요하는 일 없이, 멋대로 나를 휘두르는 일 없이 뒤늦게나마 동의를 구하고 해명을 다 하며…… 내게 이해를 구했을까?
회의 어린 미소를 지으며 지안은 질문을 던졌다.
“전하. 저는 결정을 마쳤어요. 하지만 묻고 싶네요. 제가 기어코 북부로 돌아가겠다면, 전하께선 어쩌실 건가요?”
“…….”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지안은 되도록 시큰둥하게 생각하려 애쓰며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걱정하고 고민해 봤자 뭐 하나 달라질 게 없단 걸 알기 때문이었다. 주위를 둘러싼 상황은 난관 그 자체였고, 이를 주시하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쳤다.
게다가 대답이라면 이미 들은 것 같았다. 이능을 좀 거두어 달라고 요청했음에도 제 몸을 감싸 안은 그의 화염이 변함없는 화력을 뽐내고 있지 않나.
삼황자의 숨소리가 천천히 거칠어졌지만 지안은 개의치 않았다. 사실, 그에게는 기어코 북부로 돌아갈 것처럼 말했으나, 그럴 수 없으리란 걸 알게 된 참이기 때문이었다.
공작과는 이미 상의를 마쳐 두었다. 공작의 무력이 이동 능력자의 무력을 웃도는 건 분명하지만, 공작에겐 이동 능력자의 이능을 막을 수단이 없다.
반면 삼황자의 이능은 다르다. 그의 이능 속에서 보호받는 한, 이동 능력자에게 납치당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라도 삼황자가 필요했다.
하지만 북부로 가지 않는다 해도 황성은 싫다.
“전 황성으로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