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처음엔 그가 이동 능력을 사용해 근처로 접근해온 줄 알았으나 아니었다. 균형을 잃으며 풀 위에 풀썩 주저앉고 나니 그제야 알 수 있었다. 그가 가까워진 게 아니라 그의 능력에 삼켜져 바로 코앞으로 끌려오고 말았단 걸.
“아…….”
공간을 넘으며 생긴 낯선 소양감이 무서운 속도로 전신을 뒤덮었다. 등 뒤로 비명 같은 공작의 외침이 들려왔지만 그에 반응할 수도, 대답할 수도 없었다.
가까이서 마주한 남자는 한눈에 그 위험스러움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질이 나빴다. 어쩌면, 노예상들보다 더 위험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아니, 그런 것 같았다. 이대로라면 만달렌에서 있었던 일이 고스란히 재현될 판이었다.
“싫어!”
비명을 지르며 지안은 힘껏 기운을 내뿜었다. 에스퍼의 상태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방사 가이딩이었다.
그러나 겁에 질린 채 펼친 가이딩은 강도도, 효율도 그리 좋지 못했다. 내심 가이딩으로 인한 통증을 염려했던 아론에게 이는 좋은 기회나 다름없었다. 지안을 일으켜 세운 아론은 보란 듯 지안의 턱을 올려잡으며 말했다.
“싫어도 해야 할 텐데.”
비웃음 섞인 목소리에 절로 눈물이 터졌다. 최악이었다.
* * *
공작이 달려오고 있었으나 거리가 멀었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뜻밖에 위기를 타파한 건 예상치 못한 이였다. 화르륵 타오른 불길이, 순식간에 몸집을 키우며 지안을 감싸 안았던 것이다.
“쯧…….”
얼굴이 닿을 듯 밀착해 있던 남자는 혀를 차며 물러났고, 어느새 달려온 공작이 검을 휘둘렀다.
지안은 놀란 눈으로 제 주변의 불을 바라보았다. 이 같은 일이 가능한 건, 삼황자뿐이다. 사방 어디에서도 그가 보이지 않았지만, 이건 분명 그의 이능이었다. 타오르는 불꽃이 트라우마처럼 재현되는 상황을 지워냈다.
난데없고 어리둥절한 일이었으나, 더는 이동 능력에 당하지 않으리란 사실을 깨닫은 것만으로 충분했다. 순식간에 이성이 돌아오고, 엄습하던 두려움 역시 자취를 감췄다. 희미하게 감지되기 시작한 삼황자의 파장 역시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지안은 지친 얼굴로 아론과 악시온의 전투를 응시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전신을 감싼 불길은 날름거리며 타올랐다.
삼황자가 지금과 같은 상황을 알고 이능을 발현시켰을리 없다. 아마 그는, 공작이 나를 북부로 데려가는 걸 막기 위해 이 같은 짓을 감행했으리라.
화가 나야 할 이유였지만, 상관없다. 타이밍 좋게 그의 이능에 도움을 받았고, 당장은 이걸로 충분했다.
덜덜 떨리는 두 손을 잡아 모은 지안은 차오르는 무력감을 애써 외면했다. 코앞에서 폭발음이 연신 울리고 지진이 난 듯 대지가 흔들리고 있었지만, 이러한 충격에도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피로했다.
어디로든 도망가고 싶었다. 기왕이면 침대가 있는 곳이 좋겠다. 하지만 눈앞의 수습 불가능한 상황을 앞두고 어떻게 현실도피를 하겠는가? 지안은 힘껏 입술을 사려 물었다. 정신 차려야 한다.
어쨌건 삼황자 본인이 오고 있으니 삼황자 시해죄니 뭐니 하는 건 성립되지 않을 것이다. 돌아가는 상황으로 보건대 삼황자는 날 붙잡아 두기 위해서라도 이능을 유지할 것이고, 그가 오면 저 이동 능력자도 포기하고 떠날 것이다.
하물며 지금 공작과의 싸움에서도 조금씩 밀리고 있지 않은가. 비등비등하게 싸우는 것 같지만, 점점 벌어지는 무력의 차이가 자신의 눈에도 보일 정도다. 이 싸움은, 공작이 이길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아직 승리한 건 아니었다. 지안으로서도 이대로 두 손 놓고 있을 순 없었다. 대놓고 날 납치하려 한 자가 아닌가. 그런 이가 눈앞에 있는데, 관객마냥 구경만 할 순 없는 노릇이다.
얼마 없는 용기를 끌어모은 지안은 천천히 방사 가이딩을 펼쳐 냈다.
이동 능력자는 살벌하게 휘둘러지는 공작의 검을 피하느라 여념이 없는 것 같았다. 가이딩을 그에게 집중시켜 주의를 조금만 흐트려 놓는다면…… 공작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지안은 지체 없이 기운을 아론에게 집중시켰다. 에스퍼를 살리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가이딩이었지만, 이번만은 아니었다.
이윽고, 공작을 피해 함정처럼 퍼뜨려 놓은 기운에 마침내 아론이 걸려들었다.
“윽?”
순간 균형을 잃고 비틀거린 아론의 가슴팍을, 악시온의 검이 갈라냈다. 치명상이었다. 그와 동시에 훅 사라져 버린 아론의 파장을 감지한 지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문제는 여전히 상주해 있었다. 당장 제 주변의 풀무더기가 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지 않은가. 전신을 감싼 불길은 점점 더 커지기만 할 뿐, 줄어들 기미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계속 이러고 있다간 주변 일대가 불에 뒤덮일 판국이었다.
“지안! 괜찮은가?”
“위험하니 오지 마세요.”
개의치 않고 제게 다가오려는 악시온을 만류하며 지안은 고민했다. 바로 옆에 강이 있으니 큰불은 나지 않겠지만, 이 상태론 말을 탈 수 없다.
달려서 도망치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불타는 인간 횃불이 된 채로 도망칠 수 있을 리 없었다. 어떻게든, 불을 꺼야 한다. 고민을 마친 지안은 그대로 강줄기를 향해 달렸다.
하지만 물에 뛰어들기 직전, 그녀는 보고 만 것이다. 강 건너편 나무 덤불 사이에 찍힌 검은 점 하나를.
“저건……!”
잘못 본 게 아니었다. 덤불 속에 있는 건 분명 까마귀였다. 교묘히 숨어 이쪽을 바라보는 두 눈이 교교히 빛났다. 동시에 전신의 솜털이 쭈뼛 일어났다.
치미는 소름을 이기지 못한 지안은 주춤거리며 물가에서 멀어졌다. 당장이라도 불을 꺼야 했지만, 차마 물속으로 뛰어들 수 없었다.
삼황자가 도착하고, 몰려든 기사들을 본 까마귀가 울부짖으며 날아갈 때까지 지안은 꼼짝없이 물가에 서서 번민해야 했다.
* * *
뒤통수에 눈이 달린 건 아니지만, 삼황자가 얼마나 화났는지 정도는 뒤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날카로운 파장과 점차 거세진 제 주위의 화염만으로도 그의 감정이 선명히 읽혔다.
호위하듯 가까이 다가온 공작이 말했다.
“충돌은 불가피하다. 그대는 내가 어떻게 하길 바라나.”
“……제게 묻는 건가요?”
“싸움이 일어나는 걸, 싫어하는 듯해서.”
“싫어해요. 가능하면 다툼은 없는 편이 나으니까. 하지만, 그럴 순 없겠죠?”
“아마도.”
“고단하네요.”
한숨을 내뱉은 지안은 뭘 어째야 할지 모르겠단 얼굴로 강줄기를 바라보았다. 흐르는 물살이 되어 이 자리를 벗어날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우선은…… 대화를 해 보죠. 아주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은 아니니까.”
“내가 그렇듯 삼황자 역시 그대를 포기하지 않을 거다.”
공작의 말대로 가이드를 포기하는 에스퍼는 없다. 지안은 말없이 침묵하는 것으로 뻔히 아는 사실을 외면했다.
빠르게 가까워진 말발굽 소리. 거칠게 투레질하는 한 무리의 말과 그 위에 올라탄 기사들. 이제 와 물에 뛰어든다고 해도 도망은 무리일 것이다. 하려고 한들 더는 도망칠 기운도 남아 있지 않다.
마른세수를 하며 지안은 터져 나오는 한탄을 삼켜냈다. 여러모로 진퇴양난인 상황이었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애썼다.
그도 그럴 게, 최악의 상황은 이미 지나가지 않았나. 이동 능력자에게 납치당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또다시 낯선 곳에 홀로 남는, 그런 일은 없는 것이다.
도움을 구할 곳도, 믿을 만한 사람도 없는 세계다. 어떤 현실과 마주하든 의연히 헤쳐나가는 것 외엔 도리가 없다. 무작정 황성을 빠져나온 것도 아니잖은가. 마음에 가시처럼 걸렸던 황녀 전하마저 내버려 두고 떠나왔다. 최악을 상정하지 않고 일을 저지른 건 아니었다.
지안은 쓰게 웃으며 악시온을 돌아보았다.
“저 때문에 괜히 고생만 하셨네요. 애써 주셨는데 죄송해요.”
“그대 탓이 아니다.”
돌아오는 위로에 지안은 말없이 웃었다.
* * *
그 입맞춤을 무어라 불러야 좋을까. 발밑이 아득히 꺼지는 그 감각을 무어라 칭할 수 있을까.
그녀는 마치 중력 같았다. 모든 걸 빨아들이는 동시에 생명을 내뿜는 미지의 능력자였다. 대지를 비추는 태양도 그녀의 입술만큼 따스하진 못할 것이다.
허덕이며 입 맞추느라 미처 말하지 못했다. 네가 좋아. 널 사랑해.
그러니 가지 마.
진하게 흘러드는 안락을 받아 삼키며 일리아스는 생전 느껴보지 못한 안온함에 몸을 떨었다. 그것이 마지막 기억이었다.
그리고 몇 시간 뒤, 일리아스는 소스라치며 깨어났다. 지안이 자신에게서 멀어지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감지한 탓이었다. 저도 모르게 개화되고 만 특성이 일리아스에게 알려왔다. 그녀는 더 이상 여기 없노라고.
“그럴 리 없어……. 지안, 지안!”
본능이 짚어 주는 사실을 부정하며 지안을 찾았지만, 지안은 이미 황성에서 벗어난 뒤였다. 심지어 그녀는 자신을 시해했단 죄목으로 쫓기는 중이었다. 보고를 위해 돌아온 기사를 붙잡고 그간의 상황을 캐묻던 일리아스는 기사의 말에 기함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화살을 쏘았다니? 누구에게?”
“황태자 전하의 명이었습니다. 사살해서라도…….”
일리아스는 기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의 멱살을 쥐었다. 옷을 쥔 손에서 불티가 튀었다 사라졌다.
“사살이라니?! 지안은? 지안은 무사한가?”
“컥, 무, 무사합니다! 낙마를 하긴 했지만 멀쩡히 도망쳤…….”
낙마라니! 일리아스는 그 말을 다 듣지도 않은 채 황성을 박차고 나와 달렸다. 지안이 어디에 있는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온몸의 감각이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으니까.
만일 황태자의 명을 받은 기사들이 정말로 그녀를 해치기라도 한다면……. 눈앞이 검게 물드는 상상에 일리아스는 쉼 없이 말을 채찍질했다.
“전하, 기다려 주십시오!”
기사들이 뒤쫓아오는 게 느껴졌지만, 일리아스는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질주라고 해도 좋을 속도로 달리고 있는데도 너무 느리게 느껴졌다.
무사할 것이다. 무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