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9화 (59/199)

59화

황녀 전하의 태도에서 힌트를 얻기라도 한 걸까. 정말이지……. 솔깃한 말이었다.

공작은 웬만한 에스퍼들 못지않은 각성자임이 분명했고, 그와 함께 지구로 돌아가면 맹탕 가이드란 말도 더는 듣지 않아도 된다. 여느 가이드들이 그런 것처럼, 어엿한 가이드로서 협회의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유능한 에스퍼를 대동한 채 지구로 돌아갈 수 있다. 이보다 더 나은 선택지가 또 있을까.

지안은 대답을 기다리는 악시온을 응시했다. 숨 쉬는 것조차 멈춘 채 잔뜩 긴장한 얼굴로 앞만 바라보는 공작의 모습은…… 그간 봐 왔던 에스퍼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협회에 방문할 때마다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가이드에게 절절매는 에스퍼. 가이드를 위해서라면 뭐든 불사하던 에스퍼. 그렇게나 강한데도, 가이드 잘못 만나 신세를 망치는 에스퍼들이 얼마나 많았나.

그걸 보며 생각했다. 나는 저러지 말아야지.

매칭률이 0%가 아닌 에스퍼가 나타난다면, 정말 잘 대해 줄 것이다. 가이딩을 가지고 협박하는, 그런 일은 벌이지 않을 것이다. 가이드에겐 별것 아니라지만 에스퍼에겐 목숨이 달린 일 아닌가.

결혼까진 잘 모르겠지만, 등급이 높든 낮든, 잘났건 못났건 가이드의 역할에 충실할 것이다. 아무리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더라도, 가이딩 거부는 절대 하지 않으리라.

그땐 그렇게 결심했었다.

‘매칭률 나오는 에스퍼 나타나면 잘 대해 줘.’

‘두말하면 잔소리를. 저는 절대 가이딩 거부 같은 건 안 할 거예요.’

하지만 이 얼마나 허약한 결심인가. 옛날의 각오를 되짚어 생각하니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언젠가 나타날 에스퍼를 기다리면서, 가이드로서의 이권을 나는 내려놓을 수 있을 거라고 감히 장담했다. 에스퍼에게 말도 안 되는 일을 강요하거나 기대할 일은 없을 거라고, 함부로 나를 믿었다.

“……후회하지 않겠어요?”

“무엇을 선택하든, 그대를 잃는 것보단 나을 거다.”

체념에 가까운 대답에 심장이 철렁였다. 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흔들려온 건, 힘껏 내달리는 말 위에 탑승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지안은 꿀꺽 침을 삼켰다.

깨달음처럼 발견하고 만 감정은 엉킨 실뭉치처럼 복합적이어서 정확히 무엇인지 뜯어볼 수가 없었다. 고맙고, 미안했고, 창피했다. 그리고 이 모든 감정의 토대 위에서, 불쑥 호감이 솟았다.

“북부가 그리우실지도 몰라요. 향수병이 생길지도 모르고요. 그리고 제가 살던 곳은 이곳과 많이 달라서……. 하나부터 열까지 낯선 것들뿐일 거예요.”

“그래도 좋다. 내가 모르는 혼란을, 그대 역시 그간 경험해왔을 것 아닌가.”

“신중히 결정하셔야 해요. 저처럼 원래 살던 곳으로 다시 되돌아간다거나 할 수 없을 테니까요. 저는 공작님과 달라서 다시 돌아가는 방법 따윈 몰라요. 결정을 돌이키고 싶어도…… 그럴 수 없을 거예요.”

“괜찮다. 허락만 해 준다면, 나는 그것으로 족해.”

그 말이 마음속 단단히 닫아 걸린 빗장을 열었다. 미세하게 열린 문틈 사이로 무언가 새어 나오려 했다.

“그럼…….”

바로 그 순간, 쏘아져 온 화살이 말을 맞췄다.

히힝―!

말의 울부짖음과 함께, 지안은 공작의 품에 안긴 채로 바닥을 굴렀다.

“헉!”

땅과 하늘이 반전되는 아찔함에 지안은 질끈 눈을 감았다. 단단한 품속에 빈틈없이 안겨 있었지만, 땅 위로 내동댕이쳐지는 추락감이 가시는 건 아니었다.

“멈추십시오!”

화살을 쏜 건 삼황자 휘하의 기사였다. 눈에 익은 갑주와 기사들의 면면을 확인한 지안은 창백한 얼굴로 입술을 떨었다. 삼황자가, 벌써 깨어난 건가? 설마, 기사단까지 동원하기로 한 거야?

“무슨 짓이지?”

공작의 물음에 기사들 중 하나가 답했다.

“황태자 전하의 명입니다. 그 시녀에게 삼황자 전하의 시해 죄를 묻겠다 하십니다.”

시해라니. 삼황자는 가이딩 충격으로 기절한 것뿐이다.

“시해라니요? 삼황자 전하는 단순히 기절하신 것뿐이에요. 그리고 제가 왜 그런 짓을 하죠? 좋든 싫든 저를 노예상에서 구해주신 건 삼황자 전하세요. 바로 그것 때문에 전 여태 전하의 전속 시녀로 충실해 왔어요!”

“해명은 황태자 전하의 앞에서 하도록.”

황태자에게 직접 해명하라니. 무엇을, 어떻게? 하지도 않은 일을 뭘 어떻게 증명하란 말인가. 입술을 깨문 지안은 떨리는 눈으로 공작을 바라보았다. 당장 이 상황을 타개할 만한 사람, 기대를 걸어볼 수 있는 사람은 공작뿐이었다.

하지만 이어진 공작의 말에 지안은 서둘러 검 손잡이를 잡은 악시온의 손을 붙잡아야 했다.

“비켜라. 비키지 않으면 베겠다.”

“안 돼요! 칼부림까지 나면 해명은 물 건너가는 거예요. 그리고 저 사람들, 전부 에스퍼라고요. 너무 불리해요. 맞서지 말고 여기서 벗어나요.”

그 말에 악시온은 지체 없이 지안을 끌어안았다.

“……!”

잠깐 사이 익숙해진 그 품에서 지안은 잠시 중력이 사라진 것 같은 부유감을 느꼈다. 밤하늘의 별이 조금 더 가까워져 보이는 건, 기분 탓일까? 어마어마한 속도감. 도약 한 번으로 가까워진 허공. 저 아래서 기사들이 뭐라 뭐라 소리치는 게 들려왔다.

놀라움으로 입을 벌린 사이, 공작은 이미 황성의 담벼락을 딛고 서 있었다. 훌쩍 높아진 시야에 별이 쏟아지는 제도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훅 불어온 바람이 머리카락을 흔들고, 공작의 것임이 분명한 체취가 희미하게 코끝을 맴돌았다.

이토록 위태로운 상황인데도 밤하늘은 여전히 아름답고, 별들의 운항 역시 찬란히 이어지고 있었다.

* * *

입 안의 단내를 눌러 삼킨 지안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새벽이 밝아오는 것을 바라보았다.

길고 긴 밤이 드디어 물러가고 있었다.

황성의 높은 담벼락을 넘고, 제도의 성벽을 넘었다. 기사들의 추격이 몹시 끈질겼지만, 다행히 공작을 상회하는 실력을 지닌 에스퍼는 없었다. 몇 차례의 난전과 추격을 수월히 따돌린 공작은 여관을 찾아 말을 챙겼고, 덕분에 지안은 다시금 달리는 말 위에 탑승한 채였다.

유일하게 안타까운 것이 있다면, 도망치느라 갈아입을 새가 없어서 여전히 드레스 차림이란 점이다. 치맛자락은 찢어졌고, 천 위로는 언제 생겼는지 모를 흙먼지와 얼룩이 묻었다. 그나마 굽 낮은 구두를 신어 다행이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강줄기를 따라 제도 너머의 평원을 가로질렀다. 그런 공작과 지안의 머리 위로 까마귀 한 마리가 부드럽게 선회를 반복했다. 누군가 지켜보고 있단 걸 꿈에도 모른 채 지안은 연신 뒤를 돌아보았다. 힘겹게 기사들의 추격을 따돌렸지만 언제 뒤를 따라잡힐지 몰랐다.

지안이 다섯 번쯤 이 같은 행동을 반복하자, 악시온은 밖으로 내민 지안의 머리를 제 가슴팍으로 거두며 안심시켰다.

“걱정하지 마라. 한동안 따라잡히지 않을 거다.”

“그렇다면 좋겠지만…….”

“오랫동안 달려야 하니 그대는 잠시 눈을 붙이는 게 좋겠다.”

“달리는 말 위에서요?”

“불편하겠지만, 체력을 보전해야 하니까. 밤새 지쳤지 않나.”

다정한 권유에 팽팽히 당겨져 있던 긴장이 탁 풀어졌다.

생각해 보니 한 시간가량 평원을 가로지르는 동안 어떤 습격도 없었다. 기사들의 함성도 군화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게다가 공작이 말하지 않았나. 한동안 따라잡히지 않을 거라고. 그 말을 들으니 기다렸단 듯 눈꺼풀이 비실비실 감기려 했다.

공작이 허튼소리를 할 리 없으니 조금 쉬어도 괜찮지 않을까. 아주 잠깐만, 십 분만 눈을 감았다가 뜨는 거다. 선잠이라도 좋았다. 달리는 말 위에 있단 건 조금도 문제 되지 않았다. 낙마하든 말든 이대로 기절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안심하는 것도 잠시, 지안은 희미한 파장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단 걸 깨달았다.

아니, 아니다. 그것은, 무서운 속도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공포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뒤를 돌아볼 때마다 점점 더 가까워지는 귀신처럼, 낯익은 파장의 에스퍼가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그의 파장은 촛불이 꺼지듯 일순간 훅 사라졌다가 다시 점차 가까이 나타나길 반복하고 있었다.

이러한 파장의 이동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밖에 없다.

엄습해오는 공포감에 지안은 퍼뜩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고개를 들자 낮게 선회하고 있던 까마귀가 기다렸단 듯 까악! 까악! 울음을 터뜨렸다. 소스라치는 감각에 찬물을 뒤집어쓴 듯 졸음이 가셨다.

가까워진 파장은 어느새 지척이었다.

“공작님!”

외침과 동시에 공작의 검이 검집에서 뽑혀 나왔다. 허공에서 뭔가가 쾅! 소리를 내며 대검에 부딪혔다. 형체 없는 공격에 소스라치는 것도 잠시, 낯익은 사내가 허공을 가르며 나타났다.

“당신은!”

“날 기억하고 있다니, 영광이군.”

빙글거리며 웃어 보인 아론은 빠르게 웃음을 거둬야 했다. 달리는 말 위에서 뛰어내린 공작의 검이 어느새 목 언저리에 다다라 있었던 것이다.

“이크.”

재차 이동 능력을 사용해 검의 궤적을 피했으나, 목덜미에 붉은 실선이 그어진 뒤였다. 반응이 조금만 늦어졌어도 그대로 목이 잘렸을 것이다.

“흠. 이만한 실력자는 오랜만인데.”

언제 웃어 보였느냐는 듯 아론의 눈 위로 살기가 떠올랐다. 악시온 역시 주저 없이 검을 휘둘렀다. 상대가 이동 능력자인 이상, 단시간 내 승부를 봐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만달렌에서의 일이 다시금 재현될 터였다.

온 힘을 다해 휘둘러진 악시온의 검은 그대로 공기가 찢고 한바탕 대지를 뒤집어 놓았다. 하지만 아론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사정거리에서 멀찍이 물러난 그는 검압에 찢어진 옷깃을 털어내며 조소했다.

“하하. 북부 공작의 위명은 익히 들어왔지만…… 이제 보니 허울뿐인 명성은 아니었군. 분명히 폭주했어야 할 공작이 아직 살아 있는 건, 역시 당신 덕분인가?”

번들거리는 시선에 지안은 흠칫 어깨를 떨었다. 그의 능력을 익히 알기 때문이었다. 어딘가 위험스러운 아론의 분위기 역시 지안을 겁먹게 하기에 충분했다.

늘 밤에만 마주쳐서 미처 몰랐던 남자의 외양은 어둠의 종착지인 것마냥 시커멨다. 새벽을 가르고 떠오른 태양이 머리 위를 눈부시게 비추고 있는데도 그만은 하늘 아래 한점 그늘로 남은 듯 어두침침했다.

“나도 좀, 구해주지 그래.”

그 말이, 너무 가까이서 들려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