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그녀는, 너무나도 효과적으로 나를 침묵하게 한다.
‘제겐 삼황자 전하나 공작님이나 별반 다르지 않아요. 두 분 다 제멋대로고, 절 강제하신 것마저 똑같은걸요.’
담백한 목소리엔 질책 한 점 없었다. 있는 것은 오직 차분함 뿐. 가벼운 흥분 하나 없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짚어주는 지안의 말에 수치심과 죄책감이 번갈아 밀려들었다. 무엇이든 용서할 것처럼 부드러운 말씨로 지적해 오지만, 건조한 시선과 타이르듯 잔잔히 전해져 오는 그녀의 기운이 알려왔다.
너 역시 나를 잡아다 놓고 유린할 생각 아니었느냐고.
인간인 나를, 귀중품 보관하듯 금고에 넣어 가둘 생각 아니었느냐고.
북부의 전대 공작들이 밟아왔던 수순을, 너 역시 따를 생각 아니었느냐고.
손가락 하나 닿지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신뢰의 부재와, 얼음처럼 굳어버린 울분을.
서서히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한번 닫혀 버리면 다시는 열리지 않을 문이.
닫힌다. 닫히고 있다.
눈앞의 가이드는 미소 띤 얼굴로 마치 타인에게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듯 사실을 짚어내고 있었다. 사죄한들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용서는 없다. 그녀는 떠날 것이다. 어쩔 수 없단 이유로 그녀를 공작성에 구금한 대가였다. 지안의 가이딩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것을 인식함과 동시에 눈앞이 빗물에 얼룩진 유리처럼 젖었다. 악시온은 숨을 멈추고 눈물을 쏟아냈다.
“왜 울죠?”
덕분에 난처해진 건 지안이었다. 압박 조금 했다고 세상 다 잃은 것 같은 얼굴로 울면, 내가 정말 나쁜 사람이라도 된 것 같잖은가. 아니, 나쁜 게 맞긴 한가.
그래. 공작의 말대로 에스퍼인 그에게 너무 가혹했긴 했다. 내가 돌아가고 나면 그는 가이드 없이 남겨질 것이다. 그걸 생각하면서 저렇게 숨죽여 우는 거라면…….
너무 서둘렀다. 어르고 달래서 잔뜩 안심시킨 뒤에 캐물었어야 했는데, 조급해지고 말았다. 팔자에 없는 시녀 노릇과 연회, 느닷없는 약혼 통보, 가지 말라고 매달려오는 황녀 전하까지, 차곡차곡 쌓인 스트레스를 저도 모르게 공작에게 풀어 버린 듯했다.
이게 다 그가 이런저런 투정을 너무 잘 받아준 탓이다. 휘두르는 대로 휘둘리면 어쩌잔 말인가. 지안은 한숨을 삼키며 악시온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뺨을 잡고 엄지손가락으로 공작의 눈 아래를 쓸었다. 닦아냈는데도 다시 주룩 흘러내린 눈물이 손가락을 타고 흘러 손등을 적셨다.
여기서 더 압박하면 공작은 결국 진실을 토해내고 말 것이다. 엉엉 울면서 지구로 돌아가는 방법을 내게 알려주겠지. 그리고 폭주할 것이다. 그의 파장이 그 사실을 알려오고 있었다.
“나는, 그대를…….”
잠긴 목소리로 뭐라고 말하려는 공작을, 지안은 입술로 막았다.
처음이 어려웠지, 두 번째는 쉬웠다. 공작의 입 안으로 혀를 밀어 넣자. 그의 어깨가 움찔 굳었다. 황녀 전하가 놀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보다는 패닉에 빠진 공작을 진정시키는 게 먼저였다.
고작 말 몇 마디로 훅 폭주에 가까워지면 어쩌잔 말인가. 어쩌면, 정말 스트레스에 취약한 건 공작인지도 모르겠다.
지안은 두 팔을 벌려 악시온의 목을 끌어안았다. 코끝으로 그의 뺨을 문지르며 재촉하자 공작의 입술이 재깍 열렸다. 파들거리며 떠는 모습이 퍽 애처로웠다. 잔뜩 굳어선 입술을 물거나 슬며시 핥을 때마다 온몸을 파르르 떤다.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영락없이 한낱 시녀가 공작을 희롱하는 줄 알았을 것이다.
두 눈을 꼭 감은 채 애달프게 가이딩을 받아먹는 그가 불쌍했다. 허겁지겁 혀를 내밀어 오는 것도, 쉼 없이 타액을 삼키는 것도 아마 자의는 아닐 것이다.
단순 접촉 가이딩에 그대로 기절한 사람이다. 입술을 통한, 성적 뉘앙스가 포함된 가이딩은 처음일 테니 정신을 못 차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삼황자가 그러했듯 말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삼황자를 대하듯 작정하고 가이딩을 펼치지 않아서 기절까진 하지 않았단 것 정도일까.
어느 정도 가이딩이 진행된 후 슬며시 공작의 가슴을 짚자 그는 재깍 의사를 알아듣고 입술을 뗐다. 거칠어진 공작의 호흡이 한숨처럼 흩어졌다.
* * *
공작이 얼굴을 씻기 위해 잠시 자리를 피하자, 남은 두 사람 사이로 어색한 침묵이 먼지처럼 부유했다. 굳어버린 채 한껏 눈치를 보던 황녀가 물었다.
“공작과는, 연인이었던 거야?”
“설마요. 방금 그건 일종의 의료행위였어요. 아무 사이 아니니 오해 마세요.”
“하지만…….”
“못 볼 꼴을 보여드려 죄송해요. 그대로 놔두면 공작님이 폭주라도 할 것 같아서…… 저도 모르게 행동이 앞섰네요.”
폭주라니? 방금 전 공작의 기세가 심상찮았다는 건 이비엔도 알았다. 그런데 그게, 폭주 증상이었단 말야? 이비엔이 심각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가 황성에서 폭주하는 건 아니겠지?”
“제가 있으니 괜찮을 거예요.”
지안의 확언에 이비엔은 뭐라고 되물어야 할지 모를 표정이 되어 버렸다.
발현을 진정시켜 준 것도 그렇고, 오라버니를 기절시킨 것도 그렇고, 지안의 이능은 너무 희귀했다. 오죽하면 능력자들이 집단을 이뤄 지안을 노리겠나. 지안을 데려가려는 공작을 맹비난했지만, 사실 공작이나 자신이나 별다를 바 없단 것 정도는 이비엔도 잘 알고 있었다.
이 사실을 깨닫고 나니 지안이 왜 황성을 떠나려는지 알 것 같았다. 엄습해오는 위기감과 울컥 치솟는 서러움을 애써 삼키며 이비엔이 물었다.
“북부로 돌아가겠단 생각엔 정말 변함이 없는 거야?”
대답 대신 씁쓸하게 웃어 보이는 지안의 얼굴 위로 옅은 죄책감이 드러났다. 평소라면 바로 그 죄책감에 호소하며 매달렸을 테지만, 더는 그럴 수 없었다. 이비엔이 말했다.
“……네가 공작에게서 무슨 답을 얻으려 한 건지 난 몰라. 하지만 나 역시 네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게 뭐든 제공할 수 있어. 너를 황성에 머물게 할 수 있다면 뭐든 할 거야.”
더는 인정에 호소할 수 없다면, 지안이 뭘 원하는지라도 알아내야 했다. 하지만 이비엔의 설득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공작이 돌아온 탓이었다.
서둘러 돌아왔는지 공작의 뺨 위로 미처 닦지 못한 물기가 남아 있었다. 발개진 눈가와 눈치 보는 아이처럼 도르르 굴러가는 눈동자가 가엾기까지 하다. 머뭇대는 공작에게 지안이 말했다.
“다 우셨으면 그만 북부로 돌아가죠.”
그만 북부로 돌아가자 했는데도 공작의 얼굴은 밝아지지 않았다. 돌아간다는 말 자체에 거부감이라도 생긴 것마냥 망설인다. 지구로 돌아가는 방법을 말하란 단서를 달았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지안은 재차 설명했다.
“우린 황성에서 소란을 일으켰어요. 삼황자 전하가 깨어나시면 무슨 짓을 할지 몰라요. 그러니 일단은, 돌아가요. 북부로. 이외 다른 요구는 하지 않을 테니 안심하시고요.”
지안의 말에 이비엔은 다급히 입을 열었다.
“나, 시간을 내서 북부로 갈게, 그건 괜찮은 거지?”
“찾아와주시면 기쁠 거예요. 전하께선 제게 무척 잘 대해 주셨는걸요. 만약 공작님이 제때 절 찾아오지 못했다면…… 전하의 전속 시녀로 황성에 그대로 눌러앉아 버렸을 거예요.”
“……정말로?”
“그럼요. 그간 감사했어요. 제도 구경도, 황성의 후원에 드나들 수 있도록 해 주신 것도요. 바늘과 실패도 정말 많이 받았는데 다 쓰지도 못하고 가네요. 그래도 전하의 손수건은 다 만들 수 있었어요. 여기, 전하 것이에요.”
“…….”
“오늘 드리려고 했는데. 이별 선물이 되어버렸네요.”
그렇게 말한 지안은 그대로 이비엔을 끌어안았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가이딩을 펼치며 황녀의 등을 쓸어내렸다.
그런 지안과 황녀의 모습을, 창 너머의 까마귀가 물끄러미 응시했다.
* * *
순록은 타 봤어도 말을 타는 건 처음이었다. 게다가 드레스 차림이라 뭘 어떻게 해도 탑승은 불가능할 것처럼 보였다.
악시온은 난처한 얼굴을 한 지안을 지나쳐 훌쩍 말 위에 올라탔다. 조금 감탄한 얼굴로 이를 지켜본 지안의 앞으로 그의 손이 내밀어졌다.
“……고마워요.”
공작의 손을 머뭇머뭇 붙잡자마자 단숨에 끌어 올려져 안장 위에 안착했지만, 역시 어색했다. 지안은 불안한 얼굴로 말 갈기를 움켜잡았다. 그 불안을 눈치챈 공작이 말했다.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위험하지 않도록 붙잡아 주겠다.”
그 말과 함께, 악시온이 말의 배를 걷어찼다. 두 사람이 탄 말은 황녀의 궁을 빠르게 빠져나갔다.
지안은 순식간에 휙휙 바뀌는 풍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생각보다 빠른 속도였지만, 무섭지는 않았다. 드레스 차림만 아니었다면 썩 즐거운 경험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 만큼 모든 감각이 이색적이었다.
등 뒤로 악시온의 단단한 몸이 그녀를 받치고 있었고, 질주하는 말 위에 올라타 있음에도 모든 게 안정적이었다. 조금만 더 가면 금방 황성을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감탄하며 말 갈기를 움켜쥔 지안에게 공작이 속삭였다.
“북부에 도착하면…… 돌아가는 방법을 알려주겠다.”
뭐? 이렇게 갑자기 마음을 바꾸다니 어째서? 돌아보자 씁쓸한 미소를 지은 공작의 얼굴이 훅 가까워졌다. 이마에 가볍게 닿아온 입술이 다음 말을 토해냈다.
“대신, 약속해. 나와 함께 돌아가겠다고.”
“……함께라면?”
“그대가 이곳에 남길 바라는 건 지나친 과욕이란 걸 알았다. 그러니…… 따라가겠다. 그대가 허락하기만 한다면 나는, 어디든 좋다.”
“무슨 말씀이세요? 공작성은 어쩌고요? 북부는요?”
“한때는 나를 대변하는 모든 것이었지. 하지만 그대 없이 그게 무슨 의미인가? 당신이 없으면…… 나는 곧 폭주할 텐데.”
“…….”
“그러니 나도 함께 데리고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