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7화 (57/199)

57화

지안이 남긴 인상 역시 그 못지않았다. 타오르는 화염 속에서도 그토록 오연하다니.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황태자 알레인이 애써 상황을 수습하긴 했으나,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축하 연회는 흐지부지 끝나버리고 말았다. 이번 연회의 주인공은 생일을 맞이한 그가 아니라 홀연히 나타난 북부 공작, 그리고 그와 대치한 삼황자, 타오르는 불 속에 갇힌 시녀와 바로 그 시녀에게 울며불며 매달린 황녀였다.

이처럼 귀족들의 구설수에 오르게 된 지안은 막 삼자대면을 시작한 상태였다.

“우선, 그간의 일을 간추려 설명해야겠네요. 저는 이동 능력자로 인해 북부에서 벗어나게 되었어요. 그러다 노예상을 만났고, 제도로 이송되었죠.”

말하다 말고 지안은 입술을 앙다물었다. 어찌어찌 잘 해결되었다곤 하지만 재차 떠올리기 힘든 일인 탓이었다.

짧은 시간이었다곤 하나 제가 당한 건 무려 인신매매였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훼손당했고, 충격과 트라우마 역시 만만찮게 남았다. 침을 삼킨 지안은 최대한 건조하게 사실을 읊었다.

“노예로 팔려 갈 뻔한 저를, 삼황자 전하께서 구해 주셨어요. 그리고…….”

지안은 옆자리의 황녀를 살짝 바라보고 말끝을 흐렸다.

“저를 전속 시녀로 삼으셨죠. 북부로 돌아가고 싶다고 거듭 부탁했지만, 들어주지 않으셨어요.”

“그랬군. 혹시 그때 그 이동 능력자는…….”

“죽었어요. 절 데리고 이동한 것이 그가 할 수 있었던 마지막 행동이었죠.”

“……황녀 전하의 전속 시녀가 된 것은, 어떤 연유에서지?”

“본래는 삼황자 전하의 전속 시녀였어요. 그랬었는데……. 습격이랄까, 납치 시도랄까, 하여간 봉변을 당할 뻔한 일이 있었어요. 이 일로 황녀 전하의 전속 시녀가 되었죠. 사실 노예 경매장에서 제가…….”

방사 가이딩을 했거든요.

지안은 이 말 또한 꿀꺽 삼켰다. 황녀의 앞에서 가이딩 운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제가 이능을 사용해버린 탓에…… 제 존재가 일부 노출되었거든요. 그 탓에 제도의 능력자들이 무리를 지어서 황성을 습격해 왔어요. 그 사람들이 노린 건…….”

“그대를 납치하는 것이었겠군.”

지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이 눈치껏 알아들어 주어 다행이었다. 반응으로 보건대 공작이 자신을 황실에 팔아넘기거나 할 것 같지도 않았다.

죄책감 어린 얼굴로 악시온이 말했다.

“모두 내가 부주의했던 탓이다.”

“부주의라면 저도 했어요. 이제 와 잘잘못을 따지는 건 그만두죠.”

한숨과 함께 말한 지안은 고개를 돌려 잠자코 듣고 있던 이비엔을 바라보았다.

“중요한 건 삼황자 전하가 멋대로 저를 약혼자로 만드셨고, 이능을 사용해 강제로 붙잡으려 하셨단 거예요. 그 탓에 공작님은 화상을 입으실 뻔했죠. 직접 목격하셨으니 황녀 전하도 아실 거예요. 전 삼황자 전하께서 깨어나시기 전에 황성에서 벗어나길 바라요.”

“지안. 오라버니의 잘못은 내가 어떻게든 만회할게. 다 무마시킬 수 있어. 그렇게 만들게. 제도에 남아달라고도 하지 않을 테니…… 나도 같이 가.”

“안 된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싫어! 날 구해주었잖아! 구했으면 책임지란 말이야! 나는, 난 오라버니와 달라. 그간 증명해 보였잖아. 네가 싫다는 건 하지 않을게. 그러니 그런 말은 하지 마. 함께 떠나는 것도 안 된다고 하면, 난 대체 어쩌면 좋단 말이야?”

“전하…….”

“나도 이렇게 떼쓰고 싶지 않아. 하지만, 흑. 네가 아무런 여지도 주지 않으니까…… 흐윽…….”

눈물짓는 이비엔의 모습에 지안은 난처한 눈빛으로 공작을 돌아보았다. 삼황자에게 가차 없어지는 건 쉬웠지만, 황녀 전하에겐 그러기가 힘들었다. 연회장에서 소란을 피우고도 제지 없이 빠져나올 수 있었던 건 모두 황녀 전하 덕분이 아닌가.

짧은 기간이었으나 그녀의 비호 아래 맘 편히 생활해 왔다. 제도 구경을 나설 수 있었던 것도, 맘껏 정원과 온실을 거닐었던 것도 황녀 전하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호감 어린 눈빛으로 이런저런 제안을 건네오던 그간의 태도를 왜 모르겠는가? 격의 없이 친분을 쌓으려 애쓰던 모습을 어떻게 잊겠는가? 이를 알기에 더더욱 매몰차게 말하기 어려웠다. 같은 여자지만 미녀의 눈물엔 성별을 불문하고 누구나 마음 약해지는 법.

게다가…. 그 모습은 지안의 머릿속 한편에 단단히 묻어둔 기억을 조금씩 들썩이게 했다.

‘…잘 대해 줘.’

누구의 말인지, 무슨 말이었는지 채 인식하기도 전에 지안은 그 기억을 다시 밀어넣었다. 그러나 감정은 이미 물 먹은 솜처럼 무거워진 뒤다. 지안은 저도 모르게 머뭇거렸다. 황녀를 단념시키려 미리 준비해 둔 날 선 말들이 도무지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멈칫한 지안과 달리 악시온은 가차 없었다.

“전하의 고집이 지안을 힘들게 한다는 걸 왜 모르십니까? 더구나 북부로 따라오시겠다니요. 폐하께서 절대 허락하지 않으실 겁니다. 또한 삼황자 전하와 황녀 전하께선 북부로 돌아가려 한 지안을 반감금했습니다. 당사자의 동의 없는 약혼도 그렇습니다. 이 일은 추후 정식으로 항의할 것입니다.”

“항의? 그러는 공작은 대체 지안과 무슨 관계지? 말 좀 해 봐, 지안. 대체 공작과는 무슨 사이야?”

지안은 말없이 입을 다물었다. 솔직히 삼황자나 공작이나 자신에겐 오십보백보였다. 게이트에 휘말린 줄 알고 에스퍼인 공작을 졸졸 따라나섰다가 공작성에 감금당했고, 운 좋게 노예상들에게서 구해졌지만 삼황자로 인해 황성에 갇히다시피 했다. 떠올리자니 하나같이 열불 터지는 일들뿐이었다.

게다가 황녀 전하의 질문을 듣고 나니 정말로 의아해지는 것이다. 공작과 나는 대체 무슨 사이지? 에스퍼와 가이드란 것 외에, 그와 나 사이를 지칭할 만한 단어가 달리 있던가?

없다.

애초에 북부로 되돌아가려 한 것도, 공작이 그토록 반가웠던 것도, 그가 지구로 되돌아가는 방법을 아는 유일한 에스퍼기 때문이었다.

야심 차게 이곳 세상의 가이드를 찾겠노라 나섰지만, 노예상을 만나고 집단을 이룬 에스퍼들에게 습격당하고 나니 그것이 얼마나 이상적이고 어처구니없는 계획이었는지 알겠다.

유일한 가이드 운운했던 공작의 말을 허황된 이야기로 치부하는 게 아니었다. 공작을 동정하는 게 아니었다. 그에게 가이드를 찾아준 뒤 떠나려 할 것이 아니라, 공작의 멱살을 쥐어서라도 지구로 돌아가는 방법을 먼저 캐물었어야 했다.

어쩌면 지금 무턱대고 공작을 따라 북부로 돌아가 봤자…… 공작성에 다시 감금당하는 것 아닐까. 초기에 공작성에서 있었던 일들을 생각하면 충분히 의심스러웠다.

그렇다고 삼황자에게 그런 짓을 해놓고서…… 겁 없이 황성에 남아 있을 수도 없다. 생각하니 입술에 감촉이 남은 것 같아 심장 어딘가가 뜨끔했다. 키스를 통한 가이딩이 웬만한 접촉 가이딩보다 더 효과가 좋단 걸 알고 벌인 짓이지만…… 잠깐 정신이 나간 게 분명하다.

침묵하는 지안의 모습에 공작과 황녀 모두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지안은 그런 두 사람을 한 번씩 번갈아 보았다.

이윽고, 지안의 입이 열렸다.

“공작님과 저는, 별 사이 아니죠.”

그 말에 악시온의 눈 위로 파문이 일었다. 으깨진 제비꽃 같은 눈동자 위로 슬픔이 자욱이 차올랐다. 공작의 감정이 생생히 보이고 들렸지만 지안은 흔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파장이 위태롭게 꺼져 내리는 것마저 좌시할 순 없었다.

“다만, 굳이 따지자면…… 보호자와 피보호자 정도로 구별할 수 있겠네요.”

“……보호자라면, 어떤 의미의?”

“딱히 의미는 없어요. 저는, 북부인이니까요.”

“뭐야. 그렇담 별 사이도 아니란 거잖아. 그런데 항의? 공작은 대체 무슨 자격으로 항의하겠단 거지? 지안을 데려가겠단 근거가 대체 뭐야? 결국 당신도 지안의 이능을 탐내서 이러는 거잖아!”

“……그러는 전하께선 아니라 부정하실 수 있습니까? 그녀의 이능에 기대 숨 쉰 적 없다고 단언하실 수 있습니까?”

이비엔은 공작의 말에 답하지 못했다. 그의 말에 틀린 것 하나 없기 때문이었다. 변명을 찾아 머뭇거리는 사이 지안이 말했다.

“두 분 다 의미 없는 다툼은 그만두시죠. 저는 북부로 돌아갈 거고, 이 의사엔 변함이 없어요. 다만, 황녀 전하가 마음에 걸린단 사실을 부정할 수가 없네요.”

여지를 보이는 말에 이비엔은 반색하며 중얼거렸다.

“지안…….”

감동이라도 한 듯한 황녀의 모습을 외면한 지안은 초조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공작에게 말했다.

“하지만 공작님은 제가 북부로 함께 떠나길 바라시겠죠. 해서, 조건을 달고 싶어요.”

그 말에 이비엔이 서둘러 나섰다.

“그만둬, 지안. 바라는 게 있다면 내게 말해. 뭐든 좋아. 무슨 조건이든 수용할게.”

“아니요. 저는 전하께 요구할 것이 없어요. 제가 바라는 건 공작님께 있죠.”

물끄러미 바라보자 공작의 눈동자가 유리병 속 사탕처럼 흔들렸다.

“돌아가고 싶어요. 제가 본래 살았던 곳으로요. 공작님께선 제게 길을 알려주실 수 있나요? 알려주겠다고 약속하시면 북부로 가겠어요.”

“알려주면…… 어떻게 되는 거지? 그대는 돌아갈 셈인가?”

“네.”

“……이곳에, 남아줄 순 없나?”

지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이 대답이 되어 전해지기까진 금방이었다.

그리고 공작 또한 한참 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대답이 돌아오길 기다렸지만, 돌아오는 것은 침묵뿐. 그 역시 입을 다물어버림으로써 의사를 전한 것이다. 알려줄 생각, 없노라고.

“답하지 않으시네요. 짐작은 했지만, 저도 공작님도 이 문제 앞에선 입을 다물게 되는군요.”

“…….”

“그 침묵은 제가 황성에 남아도 좋다는 뜻이겠죠?”

“그대는…… 내게 늘 가혹한 선택지만을 주는군.”

“인과응보 아닌가요? 제겐 삼황자 전하나 공작님이나 별반 다르지 않아요. 두 분 다 제멋대로고, 절 강제하신 것마저 똑같은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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