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6화 (56/199)

56화

할 수 없지. 방사 가이딩으로 최대한 진정시켜 놓고 설득하거나 뭐라도 핑계를 대는 수밖에. 최악의 경우엔 도망도 좋다. 뒷감당은 공작님이 어떻게든 해 주겠지.

지구로 돌아가는 방법만 알면 나머지는 모두 남겨진 사람들의 몫이다. 무책임하지만, 이외엔 마땅한 대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우선 나부터 살고 봐야 할 것 아닌가. 가이드 하나 없이 미쳐 돌아가는 이곳 세상에서의 탈출이 몹시도 간절했다.

그러나 미처 가이딩을 시작하기도 전에 일리아스가 선언했다.

“넌 폐하께서 허가한 내 약혼자다.”

그 말에 공작이 믿을 수 없단 얼굴로 지안에게 물었다.

“……사실인가?”

“그럴 리가요! 당사자의 동의 없는 약혼이 세상에 어디 있죠? 전 오늘 처음 듣는 이야기예요!”

“무슨 말을 하든, 폐하의 승인은 절대적이지. 그러니 이리 와. 네 파트너는 나다. 누가 뭐래도…… 넌 내 혼약자야.”

명령조였으나 일리아스의 목소리는 전에 없이 위태로웠다.

저토록 고압적인 명령이 애원으로 들려오는 건 어떤 이유에서일까. 그의 파장이 한층 더 불안정해져서? 일그러진 표정 때문에? 아니면, 그가 에스퍼라 그런 걸까. 고민하는 사이 공작의 팔 힘이 더욱 강해졌다. 혹시라도 내가 삼황자에게 돌아갈까 봐 불안한 모양이었다.

지안은 말없이 방사 가이딩을 펼쳤다. 부드럽게 몰아친 기운이 파도처럼 밀려와 악시온과 일리아스를 적셔 놓았다. 황녀는 물론, 연회장에 참석한 낯선 에스퍼들 역시 예외 없이 가이딩에 걸려드는 게 느껴졌다.

이러고 싶지 않았지만, 방사 가이딩은 에스퍼간의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는 과정 중 하나다. 흥분한 에스퍼를 말로 설득 가능할 정도로 진정시키려면 방사 가이딩은 필수였다.

그리고 일단 시작해버린 이상, 가이딩을 함부로 멈춰선 안 된다. 자칫 사태를 악화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지안이 말했다.

“다시 말하지만, 저는 북부로 돌아갈 거예요.”

“그렇게 두지 않겠다.”

“지금까지 절 붙잡아 놓으셨던 걸론 부족했나요?”

“……그건!”

“전하께선 제 의사를 존중하실 생각이 조금도 없으시군요. 기억하세요. 바로 그게, 제가 북부로 되돌아가려는 이유니까!”

일리아스의 말을 끊어놓으며 그간의 울분을 터뜨린 지안은 서둘러 공작을 재촉했다.

“지금 당장 여기서 벗어나는 게 좋겠어요.”

지안의 말에 악시온은 곧바로 몸을 돌렸다. 하지만 그 앞을 황녀가 두 팔 벌려 가로막았다. 눈물로 흥건한 황녀의 얼굴은 두려움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지안. 가지 마. 부탁이야…….”

고개를 가로저으며 온몸으로 공작을 막아서는 황녀의 모습에 지안은 잠시 망설였다. 삼황자와 달리 황녀에겐 조금도 유감이 없었다. 어린 에스퍼의 애원에 속수무책으로 마음만 약해질 뿐이다. 이비엔은 그 흔들림을 예민하게 눈치채고서 목소리를 높였다.

“정 가겠다면 나도 함께 가. 날 두고 가면 안 돼! 나는, 난 네가 없으면……”

무섭단 말야.

“전하…….”

흐느끼는 황녀의 목소리에 번민하는 사이, 화르륵 타오른 불길이 지안을 휘감았다. 노예 경매장에서 겪어본 바 있는 삼황자의 이능이었다. 지안은 화들짝 놀라며 악시온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하지만 서둘렀음에도 불구하고 공작의 옷에 불이 옮겨붙었다. 악시온이 놀라 버둥거린 지안을 품에서 놓지 않으려 한 탓이었다.

“위험해요, 잠깐만……!”

간신히 그를 떼어내고 보자 다행히 불이 옮겨붙은 것은 공작의 망토뿐으로, 그가 걸친 갑옷은 약간의 그슬림 외엔 멀쩡했다.

하지만 하마터면 공작이 다칠 뻔했다. 그가 강철 갑주가 아니라 일반적인 면 직물로 만든 옷을 입었다면 어쩔 뻔했나! 십중팔구 화상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손을 뻗어오는 공작을 제지한 지안은, 타오르는 불 속에 갇힌 채 일리아스를 노려보았다.

“……무슨 짓이죠?”

“말했잖나. 보내지 않겠다고.”

지안은 말없이 방사 가이딩 강도를 급속히 높였다. 다소 폭력적인 가이딩을 해서라도 삼황자를 단념시킬 생각이었다. 말로 달래고 설득하는 단계는 지났다. 고집을 부리겠다면 이쪽에서도 맞대응할 수밖에.

하지만 가이딩을 아무리 거칠게 휘둘러도 삼황자는 눈썹 한 번 구기질 않았다. 모든 기운을 그에게 집중시키고 있음에도 미동 하나 없다. 그나마 나타난 변화조차 입술을 깨무는 것뿐. 그의 이능은 꺼질 줄 모르고 지안을 휘감고 있었다.

이쯤 되니 초조해진 건 지안이었다. 시간을 끌수록 이쪽이 불리했다. 능력의 사용에 거리상의 제한이 있을지도 모르니…… 불길에 휘감겨 있건 말건 그냥 내버려 두고 공작과 함께 이 자리를 벗어나야 하나?

방사 가이딩만으론 부족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렇게나 가시적으로 사태가 악화 될 줄은 몰랐다. 속내야 어쨌든, 삼황자를 비난하지 말았어야 했던 걸까?

지안은 금방이라도 검을 뽑아들 것 같은 공작과 발을 동동 구르는 황녀를 흘끔 바라보았다. 자칫 잘못하다 칼부림이 나기 전에 상황을 종료시켜야 했다.

‘……어쩔 수 없지.’

마침, 이럴 때 가이드들이 쓰는 수단이 있긴 했다. 이렇게까진 하고 싶진 않았지만……. 삼황자와 공작이 충돌하는 것보단 차라리 이게 나으리라.

방사 가이딩만으로 부족하다면, 접촉 가이딩으로 전환하면 그만이다. 접촉 가이딩으로도 삼황자를 흔들어놓을 수 없다면, 이를 상회하는 것도 얼마든지 시도할 것이다. 지안은 성큼 일리아스에게 다가가 그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

지나치게 가까워진 지안의 얼굴, 뺨에 닿아온 손바닥의 감촉에 일리아스는 돌처럼 굳어 버렸다.

그런 그의 입술 위로 지안의 입술이 닿았다.

* * *

이비엔은 놀란 얼굴로 일리아스에게 입 맞춘 지안을 응시했다. 험악하게 대치하던 와중에 돌연 입맞춤이라니?

바로 그 순간, 지안을 감싼 불길이 힘없이 잦아들었다. 이와 동시에, 일리아스가 풀썩 쓰러졌다. 지안이 무언가 했다는 걸 이비엔은 똑똑히 알 수 있었다. 그녀 역시 방사 가이딩의 수혜자였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가이딩이란 건 몰랐으나, 지안이 펼쳐낸 기운이 넘실거리며 부드럽게 감각을 뒤흔들고 거칠게 신경을 유린하는 것만은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대부분의 가이딩이 일리아스에게 죄다 집중되긴 했으나 에스퍼답게 가이딩의 방향과 강도를 예민하게 감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비엔은 창백한 얼굴로 전에 없이 차분한 지안을 바라보았다. 오라버니마저 쓰러진 마당이니 더는 지안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있다면 그건 자신뿐이다. 하지만…….

“그만 돌아가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공작을 재촉하는 지안의 얼굴은 태연했다.

그 순간, 이비엔은 지안이 자신을 애써 외면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눈물이 핑 돌 만큼 서러웠지만, 서러움은 두 번째 문제였다.

이비엔은 덥석 지안의 소맷부리를 움켜잡았다. 오라버니처럼 바보같이 굴지는 않을 것이다. 지안을 가로막으려 했다간 분명 오라버니와 같은 수순을 밟게 될 게 뻔했다.

“……나도, 나도 같이 가.”

곤란한 얼굴로 바라보는 지안의 시선에 이비엔은 이를 악물었다.

“오라버니처럼 굴지 않을게. 어딜 가든 막을 생각 없어. 그러니까, 나도…….”

대답 없는 지안의 모습에 좌절하면서도 이비엔은 설득을 멈추지 않았다. 어떻게든 지안을 붙잡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황녀는 그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공작이 자신과 지안을 무력으로 떼어놓았기 때문이었다.

“앗……!”

이 갑작스러운 행동으로 인해 냉담하던 지안의 눈빛이 한순간 흔들렸다.

이비엔은 지안이 드러낸 동요를 놓치지 않았다. 순식간에 계산을 마친 황녀는 공작의 힘에 밀쳐진 것 마냥 옆으로 풀썩 쓰러졌다. 실상은 공작에게 가볍게 떠밀려 지안의 소매를 놓친 것이었지만, 지안의 관심을 끌려면 이런 연극이라도 해야 했다.

“전하!”

예상대로 지안은 놀라며 손을 뻗어왔다. 울상이 된 얼굴로 지안에게 매달린 이비엔은 공작을 향해 차갑게 웃어 보였다.

* * *

황녀는 시종을 시켜 삼황자를 그의 궁에 데려다 놓도록 지시한 뒤, 지안과 공작을 챙겨 자신의 궁으로 떠났다. 이로 인해 어수선해진 연회장 분위기 역시 다소 봉합되었으나 삼삼오오 모인 귀족들은 지안을 향한 호기심을 감추지 못했다.

“삼황자 전하께 대들다니, 황녀 전하의 전속 시녀는 목숨이 두 개라도 되는 걸까요? 어쩜, 겁이 없어도 그리 없을 수가 있는지……. 삼황자 전하의 화염이 그녀를 감싸는 걸 보고 정말 깜짝 놀랐답니다. 전 그 시녀가 그대로 타 죽을 줄 알았어요.”

“그러게 말이어요. 그보다 삼황자 전하와 대치한 기사는 대체 누구죠? 처음 보는 얼굴이었는데. 황태자 전하의 호위기사인가요?”

“듣기론 북부의 공작이라는군요.”

“네? 북부의 오데르겐 공작 말인가요?”

“정황을 보건대 그런 것 같더군요. 그 시녀, 북부 공작과 모종의 관계를 맺고 있는 듯 보였는데……. 대체 정체가 뭘까요?”

“정체도 정체지만, 그보다는 황녀 전하께서 고작해야 전속 시녀에게 절절매는 게 더 이상하지 않았던가요? 전 정말, 제 눈을 의심했답니다.”

“삼황자 전하가 갑자기 쓰러지신 것도 이상해요. 입술에 독이라도 발라두지 않고선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나겠어요? 사람이 갑자기 쓰러졌잖아요. 삼황자 전하는 능력자이니 웬만한 독은 듣지도 않을 텐데. 대체 무슨 짓을 한 걸까요?”

“소문엔 황녀 전하의 전속 시녀도 능력자라 하더군요. 뭔가 우리가 모르는 이능을 사용한 게 아닐까요?”

“끔찍해라. 너무 야만적이에요.”

다들 지안을 헐뜯으면서도 그 정체를 궁금해했다. 황태자의 생일을 기념해 연회가 열렸단 걸 잠시 잊어버릴 정도였다. 삼황자와 공작이 일으킨 소란은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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