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그래. 일리아스. 이쪽이 내게 소개시켜 주겠다던 그 아가씨인가?”
“맞습니다. 폐하.”
“신분은 한미하나 썩 아리따운 아가씨로군. 네가 반할 만도 하구나. 하하. 도통 여자엔 관심이 없더니…… 그대의 이름은?”
“지안……입니다.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지안은 엉거주춤 일리아스를 따라 황제에게 예를 표했다. 다행히도 황제는 어설피 굳어버린 지안을 질책하지 않았다. 그의 앞에서 얼어붙는 심약한 영애들이 더러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안으로서는 퍽 다행이었다.
그러나 이어진 황제의 말은 그녀를 경악케 하기에 충분했다.
“약혼을 허락해 달라기에 기쁜 한편으로 걱정했거늘, 네게 마음 기댈 곳이 생겨 다행이구나.”
덕담인지 악담인지 구분할 수 없는 황제의 말에 지안은 하마터면 무슨 헛소리세요? 하고 되물을 뻔했다. 약혼이라니? 대체, 누가 누구와?
“감사합니다.”
태연한 일리아스의 대꾸에 지안은 어처구니가 송두리째 사라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잠깐만요. 약혼이라뇨? 설마 저를 말씀하시는 건 아니죠?”
“인사를 마쳤으니 저희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폐하.”
항의를 가볍게 묵살한 일리아스는 그대로 지안을 이끌어 자리에서 벗어났다. 충격받은 지안이 황제의 앞에서 무슨 말을 할지 염려된 탓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지안은 주위를 개의치 않고 일리아스의 손을 뿌리쳤다.
“전하.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르신 거죠? 당장 해명하세요.”
“해명은 얼마든지 하겠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오늘만큼은…… 내 말에 따라. 잠깐이면 된다.”
“제멋대로군요. 제게 아무 언질도 없으셨잖아요! 제가 왜 전하의 말을 따라야 하죠?”
“네게도 해로운 일은 아닐 거다.”
“하? 그건 제가 판단해요!”
격양된 지안의 반응에 멀찍이서 관망하던 황녀가 다가왔다.
“진정해, 지안. 보는 눈이 많아.”
그 말과 함께 건네지는 술잔을 지안은 사양하지 않았다. 쭉 술을 들이켠 지안은 씩씩거리는 얼굴로 일리아스를 노려보았다. 그런 지안을 이비엔이 서둘러 달랬다.
“폐하께서 뭐라 하셨는진 모르겠지만, 신경 쓰지 마. 수습은 오라버니가 알아서 할 거야. 아주 잠깐이면 돼. 오라버니와 춤 한 곡만 추고 나면…….”
“아니요. 사양하겠어요. 제겐 그래야 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지안은 머리를 장식한 붉은 보석핀을 뽑아냈다.
“전 그만 돌아가겠어요.”
“해명하겠다고 했잖나.”
“아뇨. 하지 않으셔도 돼요. 듣고 싶지 않으니까.”
지안은 그대로 발길을 돌렸다. 하지만 몇 걸음 걷지도 못한 채 움직임을 멈춰야 했다. 연회의 주인공이 막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황태자 전하께서 드십니다!”
시종장이 외치자. 모든 귀족이 일제히 황태자를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엄숙해져, 지안은 별수 없이 다른 귀족들의 자세를 따라 해야 했다. 그 틈을 타 일리아스가 곧바로 지안의 팔을 붙잡았다.
“가지 마. 내가…… 잘못했다.”
“놓으세요.”
“황성 안 지리도 잘 모르잖나. 정 가겠다면 말리지 않겠어. 데려다줄 테니 함께 가.”
절절매는 삼황자의 태도에 지안은 가까스로 화를 참아냈다. 하지만 평소 고압적으로 나오던 사람이 이렇듯 저자세로 나오는 것이 적지 않게 찝찝했고, 불안했다.
뭔가 자신이 모르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이는 지안에게 깊은 불쾌감과 두려움을 선사했다.
“무슨 꿍꿍이인지 말해요. 지금 당장.”
시녀의 태도를 벗어던진 지안의 모습은 에스퍼를 다루는 여느 가이드 못지않았다. 황태자에게 시선이 모인 탓에 아무도 그 모습을 보지 못했지만, 한 사람만은 예외였다.
“저런. 무슨 일이기에.”
“황태자 전하?”
연회장 안으로 막 들어선 황태자는 목소리를 낮춰 분노를 토해내는 지안과, 난처한 얼굴로 그 분노를 받아내는 일리아스의 모습을 이채 띤 눈으로 바라보았다.
일리아스가 전속 시녀였던 여자를 약혼녀로 삼고자 폐하께 청원했단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장성한 일리아스의 나이를 생각하면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것 또한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 그래서 별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그 시녀란 여자가 바로 저 여자였나?
황태자의 시선이 지안의 검은 머리칼에 닿았다.
이상하군. 착각이 아니라면 오데르겐 공작이 찾던 여자의 외양과 비슷한 듯한데…….
의혹을 확인하기 위해 황태자는 몸을 돌려 악시온을 바라보았다. 제게 시선이 집중돼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공작은 그의 한 발짝 뒤에서 함께 입장한 참이었다.
“공작, 혹시…….”
하지만 공작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 * *
일리아스의 손을 뿌리치려다 말고 지안은 우뚝 굳어버렸다. 인근에서 익숙한 파장이 느껴졌다. 착각이 아니다. 삼황자의 것도, 황녀 전하의 것도 아닌, 공작의 파장이었다!
황제를 알현하며 받은 충격에 더해 삼황자와 실랑이하느라 미처 감지하지 못했으나…… 분명했다.
그가, 여기 있다!
지안은 고개를 돌려 파장이 흘러나오는 방향을 응시했다. 투구로 얼굴을 가렸지만 강철 갑주를 걸친 사람이 공작이란 걸 지안은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이 사실을 깨달은 순간, 지안은 그대로 일리아스의 손을 뿌리쳤다. 약혼에 대한 진상규명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지안은 곧바로 악시온을 향해 달려 나갔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어딜 가는 거지?”
……일리아스가 가로막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비켜요.”
그렇게 말하는 지안의 시선은 일리아스의 어깨너머에 고정되어 있었다. 흔들리는 지안의 망막 안으로, 악시온이 성큼 가까워졌다. 드디어 그와 조우한 것이다!
“부탁이다. 해명이라면 당장이라도 하겠어. 그러니 가지 마. 내 말을 들으면 너도…….”
“전하께선 북부로 돌아가고 싶다는 제 의사를 묵살해 오셨죠.”
건조한 뇌까림에 일리아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돌변한 지안의 태도가 두려운 암시를 낳고 있었다.
“이젠, 그만 절 놓아 주세요.”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악시온의 두 팔이 지안을 빼앗듯 끌어안았다. 공작은 어느새 투구를 벗은 채였다. 익숙한 파장, 반가운 얼굴이 훅 가까워지자 지안은 반사적으로 악시온의 목을 끌어안았다.
“지안!”
연녹색 드레스 자락이 펄럭임과 동시에 삼황자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황녀는 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단 얼굴로 지안과 공작을 응시했다. 지안은, 그간 맘 졸이며 굽혀 주고 있었던 평민 시녀의 태도를 벗어던졌다.
“기다렸잖아요!”
공작을 향해 버럭 화를 냈지만, 정말 그를 탓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 그간의 일로 차근차근 쌓여온 울분이 공작과의 조우로 인해 터져버린 것뿐. 실제론 그가 너무도 반가웠다. 어쨌건 차원을 넘어 처음으로 만난 에스퍼 아닌가.
글러 먹은 에스퍼란 점에선 삼황자와 별다를 게 없지만, 각종 투덜거림과 불평을 군말 없이 받아 준 사람이다. 무엇보다 그는 지구로 돌아갈 방법을 아는 유일한 에스퍼였다.
“계속…… 계속 그대를 찾아다녔다.”
악시온은 품 안에 가두듯 지안을 달랑 들어 안았다. 단지 지안을 품에 안는 것만으로도 심장을 좀먹어가던 절망이 씻은 듯 사라졌다. 망막 위로 드리운 저주의 환영이 희미해지고, 가이드를 되찾았다는 안도만이 남았다.
차가운 눈 아래 얼어붙은 지안의 시신을 발견할까 봐 얼마나 공포에 떨었던가.
악시온은 홀린 듯 지안의 얼굴을 재차 확인하고 뺨을 더듬었다. 선명한 기운과 함께 지안에게서 흘러들어오는 온갖 감정을 그도 함께 느꼈다. 격정에 가까운 안도감, 먼지처럼 산재한 울분과 초조함, 반가움과 등을 맞대고 있는 염려가 불안정한 가이딩과 함께 넘실대며 흘러들어왔다.
“내가…… 내가 얼마나…….”
“늦어서 미안하다.”
공작의 턱을 타고 흐른 눈물이 그대로 지안의 뺨 위로 흩어졌다.
마음 같아선 그간의 모든 고생을 공작의 탓으로 돌리고 뭐라 더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아득히 가라앉은 눈동자와 잔뜩 흐트러진 얼굴을 보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각자 겪어온 마음고생을 덧셈 뺄셈처럼 간단히 계산할 수 있다면 공작은 가뿐히 마이너스를 찍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고생이라면 나도 만만치 않게 했는데, 왜 나보다 공작이 더 힘겨워 보일까. 노예상에게 끌려가는 것보다 더 비극적인 일이 공작에게 일어나기라도 한 걸까? 떨리는 그의 어깨 위로 깃털만 한 무게도 더 얹어선 안 될 것 같았다.
“이게 다 무슨 일이지?”
황망한 황태자의 목소리에 지안은 퍼뜩 뒤를 돌아보았다. 잠깐 사이 연회장의 모든 이목이 쏠려 있었다. 삼황자와 보란 듯 말다툼을 벌였으니 무리도 아니다. 거기다 공작까지 가세했으니……. 사람들의 눈에는 영락없이 남녀 간 치정 싸움으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그같은 시선보다 더 중요한 건 당황한 황녀 전하와 삼황자에게 남길 해명이었다. 가능한 충동을 회피할 만한 답을 고심하는 지안에게 이비엔이 물어 왔다.
“대체 뭐야? 공작과 아는 사이였어? 내겐 북부의 공작을 만나본 적 없다고 그랬잖아.”
“……거짓말이었어요.”
“뭐?”
반문하는 황녀의 시선을 피해 지안은 차갑게 굳은 일리아스를 응시했다.
“전하껜 감사히 생각해요. 덕분에 노예로 팔려나가지 않을 수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전하께선 북부로 돌아가려 하는 절 강제로 붙잡아 황성 시녀로 만드셨죠. 제가 그걸 원치 않는단 걸 알면서도, 기사를 시켜 저를 감시하고 황성에 붙들어 매셨어요.”
“……공작과는 무슨 관계지?”
“전 그만 북부로 돌아가겠어요. 황녀 전하의 전속 시녀직 역시 그만두겠습니다. 다시는 제도로 돌아올 일 없을 거예요.”
“누구 맘대로? 내가 널 보낼 것 같은가?”
폭발할 듯 사나운 뇌까림에 지안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이렇게 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