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억울함이 묻어나는 중얼거림에 지안이 말했다.
“전하께선 아직 어리시잖아요. 제국법상 성인이시지만, 음주는 안 좋으니 솔직히 말리고 싶었어요.”
“말리고 싶었다고?”
“제가 살던 곳에선 스물은 넘어야 성인으로 인정해줬거든요. 술을 마시는 것도 스물이 넘어야 가능했고요.”
“무슨 말이야? 북부에 그런 관례가 있다는 말은 못 들어봤는데. 열세 살쯤 되면 보급병으로 몬스터 사냥에 강제 차출되는 게 북부 실태 아니었어?”
되묻는 황녀의 말에 지안은 서둘러 얼버무렸다.
“어. 아하하…… 그랬나요? 제가 뭔가 잘못 알고 있었나 봐요.”
다행히 이비엔은 이 어색한 변명을 의심 없이 믿어 주었다. 덕분에 지안은 속으로나마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모든 재앙은 입에서부터 시작된다더니…….
지안은 능숙히 낭패감을 감추며 짧은 자기반성을 마쳤다.
* * *
지안은 어색한 얼굴로 머리 장식을 매만졌다. 치장을 돕던 하녀들이 감탄하듯 한 말 때문이었다.
루비와 진주 운운할 때부터 가격이 범상치 않을 거라 생각하긴 했지만, 이 머리 장식 하나가 7년 치 시녀 봉급에 육박한다니. 이런 건 내 머리에 장식될 게 아니라 금고에 보관되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황녀 전하가 뿌듯한 얼굴로 찬탄을 거듭한 탓에 차마 떼어낼 수가 없었다. 머리핀의 위치를 고심하며 마지막으로 매만져준 게 다름 아닌 그녀였기 때문이다.
“좋아! 완벽해. 정말로 사교계의 꽃 자리를 노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어.”
의기양양한 눈빛으로 말한 이비엔은 그제야 서둘러 자신의 치장을 시작했다. 지안의 치장을 돕느라 본인의 머리와 화장을 미처 시작하지 못한 탓이었다. 오전을 숙취로 허비한 만큼, 연회 시간에 맞춰 연회장에 당도하려면 서둘러야 했다.
덕분에 응접실에서 잠시 기다리게 된 지안은 창가에 붙어 서서 귀족가의 마차들이 줄지어 황성에 들어오는 걸 지켜볼 수 있었다. 아마 저 중에 공작이 있을 것이다. 드디어 북부로 돌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 곧…….”
여기서 벗어난다. 뒷말을 삼킨 지안은 가라앉은 얼굴로 손톱을 깨물었다.
막상 연회 당일이 되니 황녀와 삼황자가 마음에 걸렸다. 당장 나부터 챙겨야 할 판국에 배부른 생각이 아닐 수 없지만, 두 사람에게 입은 은혜가 적지 않다. 이들이 내보일 거센 반발 역시 큰 고민거리였다.
바로 그 순간, 딱딱한 노크 소리가 지안의 상념을 끊었다.
“네, 들어오세요.”
시종일까 생각했는데, 응접실 안으로 들어선 건 삼황자였다. 화려한 연미복에 한결 단정해진 적금발. 평상복 차림일 때도 빼어난 미모를 자랑하던 사람이 제대로 차려입으니 새삼 눈이 씻기는 기분이었다.
모델이라고 해도, 아니, 세계적인 명성을 누리는 모델도 지금의 삼황자와는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그의 미모에 새삼 홀려버리게 된 건 불가항력이었다. 맛있는 것에 침이 넘어가고 예쁜 장신구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심리처럼, 지안은 우뚝 굳어버린 채 일리아스를 응시했다.
“……이상한가?”
멋쩍은 그의 물음에 지안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상하지 않아요. 굉장히 잘 어울리시는걸요. 다만 전하의 예복이…… 제 드레스와 무척 비슷하네요.”
“그대는 내 파트너니까. 당연한 일이다.”
아하. 그래서 옷이 엇비슷했던 건가. 현대의 커플룩처럼 이곳 제도에도 파트너끼리 비슷한 옷감과 장신구로 치장하는 문화가 있는 모양이다. 수긍을 마친 지안은 대충 고개를 끄덕여 보인 뒤 다시 창밖을 응시했다.
일리아스는 말없이 지안의 곁에 서서 지안이 열중해 바라보는 것을 응시했다. 번다해진 황성의 분위기가 낯선 것일까? 지안은 황성을 드나드는 수많은 마차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기대감과 긴장이 서린 지안의 옆모습에 일리아스의 가슴이 울렁였다.
지금이라도 지안에게 연회에 참석하지 말라고 말해야 했다. 하지만…… 곱게 치장을 마친 지안의 모습을 보니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염두에 둔 용건과 동떨어진 물음이었다.
“연회는 처음이랬지. 긴장했나?”
“조금요.”
짐짓 태연히 답했으나, 창가의 커튼을 붙잡은 지안의 손등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요 며칠 사이 부쩍 익숙해진 두 에스퍼를 외면하기가 쉽지 않았다. 황성에서 시녀 노릇을 한 건 고작 몇 달에 불과하고, 그간 쌓아온 관계라 봤자 모래성만큼 허약하지만……. 파장을 통해 고스란히 전달되어 오는 호감과 믿음을 어떻게 모르겠는가.
연회장에 당도하면, 공작과 만나게 되면, 선명히 전해져 오는 황녀와 삼황자의 신뢰를 보란 듯 저버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제 와 계획을 수정할 순 없다. 평생 황성의 시녀로 살 순 없는 노릇 아닌가. 황녀 전하 덕분에 시녀 생활이 한결 윤택해진 건 사실이지만, 자유를 제한당한 채 황족의 총애와 변덕에 기대어 사는 건 사양이다.
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외면은 불가피하다. 공작이 나타난다면, 반드시 그와 함께 북부로 돌아갈 것이다.
하지만, 프랑스에서 그랬듯 에스퍼 간의 전면전이 벌어진다면? 삼황자와 황녀 전하는 십중팔구 북부로 떠나려 드는 걸 막으려 할 것이다. 전날 밤 와인병을 내리 비워 재낀 것도 바로 이 고민 탓이었다.
에스퍼간의 충돌 사태가 터지면 대처할 만한 수단은 그리 많지 않다. 가이딩으로 최대한 진정시킬 수 있긴 하나, 이마저 먹히지 않게 되면 마지막 대응 방안은 각인뿐이다.
‘각인…….’
각인은 가이드에게 있어 극히 귀중하고 제한된 기회였다. 때문에 가이드들은 각인 기회를 절대 가볍게 다루지 않는다.
하지만 자신은 지구에서 몇 년간 매칭이 되는 에스퍼 하나 찾지 못해 빌빌거렸지 않나. 이제 와 다시 되돌아간들, 매칭률이 0%가 아닌 에스퍼가 나타나리란 기대는 조금도 없다. 그러니 만약의 경우엔…… 공작과 삼황자, 그리고 황녀 전하와 각인한 뒤 강제성을 행사해 에스퍼간의 전면전이란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가능하면 가이딩만으로 사태를 진압할 수 있길 바라지만, 생각처럼 되지 않을 수도 있으니 단단히 마음먹어야 했다.
염려 어린 계산을 마치는 지안의 손등 위로 일리아스의 손이 포개졌다.
“떨고 있군.”
가볍게 손을 주무르는 그의 손길에 지안은 화들짝 놀라며 자신의 손을 잡아 뺐다. 생각에 잠겨 있느라 미처 가이딩 차단을 못 한 탓이었다. 전적으로 자신의 부주의였다.
“불쾌했다면 미안하다.”
즉시 사과받았지만 지안은 굳은 표정을 조금도 풀지 못했다.
“지금과 같은 접촉은 지양해주시길 부탁드려요.”
선을 긋는 지안의 말에 일리아스의 입 안이 바싹 말랐다. 왠지 평소보다 더 냉담한 듯한 건, 내 착각인가?
머뭇거린 끝에 일리아스가 물었다.
“그러지. 그래도 에스코트는 받아주겠지?”
그 말과 함께, 타이밍 좋게도 황녀가 드레스룸 문을 열고 나왔다. 연회장으로 입장할 시간이었다.
“……기꺼이.”
달리 파트너가 되어 줄 사람이 없었으므로 지안은 자신에게 내밀어진 손을 마다치 않았다. 아직은 그의 호의를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안도하는 삼황자의 눈빛이 가시처럼 마음에 걸렸지만, 고작 그것만으론 결심을 되돌리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이젠, 이전보다 더 단호해져야만 한다.
그러지 않고선 결코 북부로 되돌아갈 수 없으리라.
* * *
“황녀 전하와 삼황자 전하께서 드십니다.”
시종장의 호명에 지안의 이름은 없었다. 귀족 영애가 아닌 황녀의 전속 시녀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이비엔과 일리아스는 바로 이 지점에서 불쾌함을 느꼈지만, 당사자인 지안은 귀족 남녀가 즐비한 연회장 안을 둘러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었는지 안 되었는지, 그런 걸 따지고 싶지도 않았다. 호사스런 수십 개의 크고 작은 샹들리에도, 보는 사람의 넋을 빼놓는 섬세한 천장화도 모두 지안의 관심 밖이었다.
마찬가지로, 당황한 기색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귀족 영식들의 표정 역시 지안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몇몇 영식의 얼굴이 놀라움과 찬탄으로 울긋불긋해졌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지안의 관심사는 연회장을 채운 사람들의 얼굴과 머리색 뿐이었다.
연회장 안 인파의 얼굴을 차례차례 확인해나갈수록 지안의 얼굴에 초조함이 더해졌다. 공작은 대체 어디 있는 거지? 아직 도착하지 않았나? 아니면…… 연회에 참석하지 않은 건가?
지안은 일리아스가 그런 자신을 바라보고 있단 것조차 모른 채, 고개를 빼 들고 은빛 머리카락을 찾았다. 하지만 연회장 안을 아무리 둘러봐도 공작 엇비슷한 사내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낭패한 표정을 한 지안에게 일리아스가 물었다.
“왜 그러지? 마치 찾는 사람이라도 있는 것처럼 구는군.”
“……볼거리가 많아 신기해서 그랬어요.”
“구경이라면 나중에 실컷 하도록 해 주지. 이리 와. 우선 폐하부터 알현해야 하니.”
“폐하라니요?”
눈썹을 추어올리는 지안의 반응에 일리아스는 짐짓 달래듯 말했다.
“그냥 인사를 드리는 것뿐이니 걱정하지 마라.”
인사라고? 의문과 동시에 삼황자의 파장이 평소와 다르게 흔들리는 게 느껴졌다. 내내 에스코트 해올 때도 뭔가 이상하긴 했지만, 크게 동요하는 파장이 이상을 알린다. 답지 않게 눙치듯 넘어가려 하는 것도 그렇고…… 아무래도 단순히 인사를 하기 위함은 아닌 것 같았다.
뭔가, 날 속이는 것 같은데…… 내가 예민한 건가?
파장에 좀 더 집중하면 거짓말인지 아닌지 확인할 수 있을 텐데. 서두르는 삼황자의 모습에 그럴 수도 없었다.
얼떨결에 일리아스가 잡아당기는 대로 끌려간 지안은 영문도 모른 채 황제의 앞에 섰다. 더는 테리온의 황족들과 안면을 트고 싶지 않았던 그녀에게 이는 예정에 없던 참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