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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화 (53/199)

53화

몸 위로 드레스를 덧대어본 지안은 작게 감탄했다. 질 좋은 옷감에 과하지 않은 레이스, 섬세한 장식 자수까지……. 명품은 바로 이런 거구나 싶은 드레스였다. 감탄하는 지안의 옆으로 온 이비엔은 막 상자에서 꺼낸 귀걸이를 지안의 귀에 대어 보며 말했다.

“이번 연회에서 반드시 널 사교계의 꽃으로 만들고 말 거야.”

의욕을 불태우는 황녀의 말에 지안은 의아해하며 되물었다.

“사교계의 꽃이요?”

“매년 이맘때 영애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가씨를 뽑거든. 재작년엔 나였고, 작년엔 에를랑겐 후작 영애였지.”

“저는 전하의 시녀일 뿐인데 너무 과분한 자리가 되지 않을까요?”

“뭐 어때? 정식으로 사교활동을 하는 것도 아닌데. 너무 부담스러워할 필요 없어. 말이 좋아 사교계의 꽃이지, 영애들끼리 돌아가며 차지하는 명목상의 찬사 같은 거야.”

모든 영애들이 바라 마지않는 영예로운 칭호를 손쉽게 매도해버린 황녀는 지안의 드레스 자락을 매만지다 말고 은근히 물었다.

“그런데 지안, 삼황자궁에서 지내는 게 불편했었다고 그랬잖아.”

“그랬죠.”

“일이 힘들어서 그랬던 거야? 아니면 봉급이 작아서?”

“일이 힘든 건 아니었어요. 처음엔 무임금 노동을 하게 된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봉급도 적지 않게 나오는 편이었고……. 다만, 삼황자궁의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딱딱하고 경직되어 있어서 조금 눈치가 보였거든요. 뭐, 지금 생각해보니 그렇게 불편했던 건 아니었지만……. 감시하는 기사님도 여럿 있었고. 대접이 좋진 않았죠.”

“지금은? 지금은 만족해?”

“그럼요.”

지안의 말에 이비엔은 안심한 얼굴로 배시시 웃어 보였다. 지안이 좋다고 하는데 다시 삼황자 궁으로 돌려보낼 필요는 없겠지, 생각하면서.

한편, 일리아스는 황태자 알레인 테리온의 부름을 받아 그의 앞에 시립해 있었다.

“일리아스, 북부의 공작이 매일같이 황성으로 찾아와 정문 앞에 진을 치고 있다는 걸 너도 알 것이다.”

운을 뗀 황태자의 말에 일리아스는 불길한 마음을 애써 숨기며 제 발끝을 바라보았다.

“세간에선 그가 이런 기행을 벌이는 게 네 시녀 때문이라 하더군. 지금은 이비엔의 전속 시녀라 했던가?”

“사실이 아닙니다. 소문이 와전된 것에 불과합니다.”

“뭐, 사실이든 아니든 중요한 일은 아니지.”

“…….”

“내일 생일 연회에 공작이 참석할 것이다. 직접 만나면 그의 의중을 파악할 수 있을 테지. 다만…… 북부의 움직임이 좋지 않다는 건 너도 알 것이다. 요주의 인물인 만큼 특별히 주시하고 있지만, 공작의 의중을 알 수가 없구나.”

“노림수든, 용건이든, 좋은 의도는 아닐 겁니다.”

“그럴지도 모르지. 그래도 그가 역심을 품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폭주를 앞두고 있을 그에게 권력은 아무 소용 없을 테니까. 다만 폐하께서도 그렇고, 나 역시…… 그의 폭주를 염려하지 않을 수가 없다. 만일 그가 황성에서 폭주한다면 그 이상의 참사는 없을 테지.”

“……제가 뭘 하면 되겠습니까?”

“혹시라도 공작이 폭주할 기미를 보인다면 그를 죽여야 할지도 모르겠구나. 이 일에 적임자가 있다면 네가 아니겠느냐?”

의미심장한 황태자의 말에 만감이 교차했다. 공작을 죽이란 지시를 받아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마음 어딘가가 불편했다. 그가 혈혈단신으로 황성의 정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모습을 매일같이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그 탓에 일리아스는 황태자의 지시를 마냥 속 시원히 여길 수가 없었다. 마치, 지안의 침대 옆에 주저앉은 제 모습과 다를 바 없다 여겨져서…….

생각에 잠긴 일리아스를 향해 황태자가 말했다.

“북부가 한동안 공석이 될 테지만, 어쩔 수 없지. 공작이 제도 내에서 폭주하도록 내버려 둘 순 없다. 연회가 끝난 즉시 돌아가겠다고 하면 모를까……. 계속해서 고집을 부리는 걸 두고 볼 순 없는 노릇이다.”

일리아스는 밀려드는 죄악감을 외면하며 황태자의 지시에 답했다.

“명을 받듭니다.”

“그래. 아, 그러고 보니…… 일리아스, 올해 네 나이가 몇이었지?”

“스물다섯입니다.”

“그렇군. 벌써 그렇게 되었다니…… 애석하구나. 여생을 보내고 싶은 장소는 골라두었느냐?”

“…….”

“없는 모양이군. 그렇다면 북부도 고려해 보아라. 북부가 공석이 되면 차후 그 자리를 누군가 대신해야 할 것 아니냐.”

“고려해 보겠습니다.”

이후 황태자가 자리를 뜨자, 일리아스는 기다렸단 듯 뿌득 이를 갈았다. 황태자의 성정을 생각하면 그 나름대로 조심스럽게 한 제안이란 걸 알지만…… 기분이 더러웠다.

발현 이후 첨탑에 갇혀 지내던 어린 시절에 비하면 그나마 나은 대접을 받고 있단 걸 안다. 하지만 때때로 이런 순간이 올 때마다, 환멸이 불쑥 치밀었다.

그러나 황태자의 제안에 분노할 여유는 없었다. 공작이 황태자의 생일 연회에 참석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먼 북부에서 황성까지 찾아와 지안을 찾던 자다. 하녀들에게 지안의 행방을 다그쳐 묻던 악시온의 모습을 일리아스는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지안은 공작이 누군지도 모른다고 했지만, 그 말을 마냥 신뢰할 수 없었다.

매일 황성의 정문을 지키고 선 공작을 보며, 일리아스는 확신했다.

공작은 지안이 어떤 이능을 지녔는지 알고 있다. 폭주와 죽음을 피해 지안을 찾는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치유의 이능을 가진 자들에게 그러하듯, 지안에게 능력을 쓰라 강요하겠지.

상상만으로도 커지는 분노에 일리아스는 걸음을 빨리했다. 공작이 연회에 참여하는 게 확실해진 이상, 서둘러 황녀궁으로 가 지안이 황태자의 생일 연회에 참석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했다. 들떠 있을 이비엔과 지안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달리 대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지안! 아…….”

이런 이유로 이비엔의 드레스룸을 박차고 들어선 일리아스는, 놀라 비명을 지르는 지안과 서둘러 지안의 몸을 가리는 이비엔을 맞닥뜨려야 했다.

“나가!”

벼락같은 호통에 일리아스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그러면서도 시선만은 지안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쇄골 아래로 내려간 연녹색 드레스 너머로 새하얀 살결이 드러나 있었다. 흐트러진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비치는 여체가…… 아찔했다.

“나가라니까!”

그 말과 함께 일리아스의 발밑에서 가벼운 폭발이 일어났다. 발목을 날려버릴 정도로 위력적인 폭발은 아니었으나 일리아스를 문밖으로 나뒹굴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뒤이어 황녀의 지시를 받은 하녀들이 쾅 소리 나게 문을 닫았다.

머리를 흔들며 일어나 앉은 일리아스는 닫힌 문을 보다 말고 화르륵 얼굴을 붉혔다. 그러길 십여 분 후, 서늘한 눈초리를 한 지안이 나타날 때까지 일리아스는 굳어버린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그런 일리아스를 일깨운 건 매서운 지안의 목소리였다.

“구경은 잘 하셨나요?”

“그게, 난 그러려던 게…….”

엉거주춤 일어나는 일리아스를 향해 지안은 사납게 쏘아붙였다.

“황족이시니 기본적인 예절은 아시는 분이라 믿었어요.”

냉기가 묻어나는 지안의 목소리에 일리아스는 황태자의 앞에서 그랬듯 구두 앞코만 바라봐야 했다.

“……미안하다. 고의가 아니었어.”

그 말에 지안의 눈이 빛났다. 답지 않게 쩔쩔매는 태도, 즉각적인 사과와 얼굴 가득 떠오른 당황. 이것만 봐도 그의 말이 사실이란 것 정도는 알 수 있다.

게다가 맨살이 많이 드러나 보인 것도 아니다. 고작해야 어깨와 등 정도. 한국에서는 민소매 티도 입고 거리를 활보하는데 이 정도야.

하지만 간만의 건수 아닌가. 곱게 사과를 받고 끝내주기엔 뭔가 아쉬웠다.

“그러시겠죠.”

트집 잡듯 냉담히 말하자 삼황자가 머뭇대며 물어왔다.

“그, 뭔가 원하는 게 있다면…….”

원하는 거? 원하는 거야 많다. 하지만 황족인 그에게 보상을 하라 마라 할 순 없는 노릇이다.

고민하던 지안은 이내 결정을 내렸다. 이 일은 잘 아껴두었다가 나중에 톡톡히 써먹어야지. 결론을 내린 지안은 짐짓 상한 기분을 풀지 않은 척 용건을 물었다.

“무슨 일이기에 노크도 잊고 문부터 열어젖히신 거죠?”

그 말에 일리아스는 본래 용건을 상기했다. 그리고 그 말을 하기 위해 고개를 든 순간,

“전하?”

그는 보았던 것이다. 옅은 화장과 붉은 머리 장식. 단단히 화난 표정마저도 아름다운…… 지안의 모습을.

드레스 차림의 지안을 마주하고 나니 연회에 참석해선 안 된다는 말을 도무지 꺼낼 수가 없었다. 굳이 알리진 않았지만, 저 또한 지안의 드레스와 꼭 맞춘 연미복도 준비해놓지 않았나. 온실에서 이비엔을 상대로 춤을 연습하는 지안을 보며 연회 당일이 되면 지안과 손을 마주 잡고 춤출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렇게, 내심 황태자의 생일 연회를 기다려왔다.

“아무 일도 아니다. 내가…… 실수했다.”

연회에 참석해선 안 된다는 말은, 도무지 할 수 없었다.

도망치듯 그 자리를 벗어나는 일리아스를 바라보며 이비엔은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이쯤 되니 지안이 아까워서라도 절대로 오라버니와 지안을 연결 지어 줄 수가 없었다.

“세상에 저런 멍청이가 있을 줄이야.”

이비엔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지안을 달랬다.

“지안. 놀라게 해서 미안해. 멍청한 오라버니를 대신해서 내가 사과할게.”

“전하의 잘못이 아닌걸요.”

“그래도 이렇게 어물쩍 넘어갈 순 없지. 그래, 뭐라도 뜯어내야겠어.”

그렇게 말한 이비엔은 그 길로 삼황자궁에 달려가 궁에 보관된 와인을 모조리 챙겨왔다.

덕분에 다음 날 이비엔은 때아닌 숙취에 시달려야 했다.

* * *

“황녀 전하, 괜찮으세요?”

“아니…….”

“그러게 왜 저랑 대작하셔서…… 역시 마지막 한 병은 따지 말 걸 그랬어요.”

이비엔은 대꾸도 하지 못한 채 쓰린 속을 부여잡았다.

그 모습을 본 지안은 혀를 차며 라면 국물을 떠올렸다. 황녀 전하만큼은 아니라 해도, 과음한 다음 날이다 보니 시원한 국물이 간절했던 것이다. 토마토 수프로 속을 달랬지만, 다소 아쉬운 건 사실이었다.

다행히 황녀의 속 쓰림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에스퍼 특유의 치유력으로 오후가 되자마자 멀쩡해진 것이다. 이비엔은 두 번 다시 그렇게 술을 퍼마시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자신과 달리 멀쩡한 지안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같이 마셨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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