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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화 (52/199)

52화

일리아스는 저도 모르게 자신의 행동을 점검했다. 내가 뭔가 거슬리는 짓을 했나? 눈초리가 문제였나? 아니면 그새 성미를 다 드러내는 표정을 지었나?

불안이 기다렸단 듯 고개를 쳐들었다. 또 무슨 질타를 듣게 될지 알 수 없어 시선이 절로 아래를 향했다. 타고 남은 재 위에서 피어나는 연기처럼 두려움이 일었다. 그 속에서 질식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별안간, 하염없이 땅바닥을 바라보는 일리아스의 시야 안으로 지안의 손이 불쑥 내밀어졌다.

“제 손 잡으세요.”

“……왜?”

일리아스의 물음에 지안은 잠시 고민했다. 예고 없이 급격히 불안정해진 파장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없어서였다. 이대로 두면 큰일 날 것 같아서 오긴 했는데……. 왜냐고 묻는 삼황자에게 딱히 답할 수 있는 말이 없다.

“……햇빛이 따가우니 그늘에서 쉬는 게 좋겠어요.”

둘러댄 변명이지만 꽤 그럴싸했다. 지안은 그 사실에 안도하며 덥석 일리아스의 손을 잡았다. 갑자기 가이딩을 퍼부으면 놀랄까 봐 조심스레 가이딩을 시작하자 불안정하던 파장이 금세 얌전해졌다. 지안은 그 상태 그대로 일리아스를 나팔꽃 아래 드리워진 그늘로 이끌었다.

“역시 그늘 아래가 시원하네요. 그렇죠?”

어색함을 물리치기 위해 필요 없는 동의를 구하며 뒤돌아본 순간, 지안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굵은 눈물이 삼황자의 얼굴을 온통 뒤덮고 있었다.

“저, 전하?”

“……별것 아니다. 눈에, 티끌이 들어간 것 같다.”

“아, 아아. 그런 거였어요? 놀랐잖아요. 이물감 때문에 불편할 텐데, 불어드릴까요?”

“아니. 괜찮다. 그냥 먼지야. 눈물과 함께 흘러갈 거다.”

잔뜩 잠긴 목소리가 말해 준다. 먼지는 그저 핑계일 뿐이라고. 삼황자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그의 파장이 한 걸음 더 앞서 또렷이 알려왔다.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안쓰럽기까지 한 이 변명을 지안은 그냥 믿어주기로 했다.

“바람이 부네요.”

삼황자의 손을 잡은 채로 지안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멀리서 불어온 바람에 머리카락이 조금씩 흔들렸다.

나란히 선 지안과 일리아스의 모습을 이비엔은 남김없이 두 눈에 담았다. 금붙이 같은 햇볕 조각이 일리아스와 지안의 뺨 위를 장식하고 있었다.

울고 있는 남자와, 왠지 난처한 얼굴을 한 여자. 누가 누구에게 의존하고 있는지 선명히 드러나는 그 모습은 어떤 미래를 예고하는 것 같았다.

그 미래가 부디 파경은 아니길, 이비엔은 간절히 바랐다.

* * *

일리아스는 감회어린 눈빛으로 꾸벅꾸벅 조는 지안을 응시했다. 늘 자신의 앞에서 긴장을 늦추지 않던 지안이 처음으로 경계와 긴장을 푼 채 졸고 있었다. 온실 안의 공기는 잔 속에 고여 있는 찻물처럼 따스했고, 서서히 피어나는 장미 소리가 들려올 만큼 고요했다.

잠든 지안의 어깨 위로 담요를 덮어 준 이비엔이 말했다.

“내게 감사하는 게 좋을 거예요.”

이비엔의 말대로다. 이비엔의 도움으로 인해 철벽같이 거리를 두는 지안과 조금이나마 가까워질 수 있었다. 모두 이비엔의 조언을 충실히 따른 결과였다. 내켜하지 않았던 티 타임에 시간을 할애하고, 짬을 내 온실을 방문하고, 후원 산책에 함께한 성과가 드디어 가시적인 형태를 빚어낸 것이다.

“그런데…… 공작의 동태는 어때요? 그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고 그랬잖아요.”

부주의한 황녀의 말에 순간 일리아스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염려를 눈치챈 이비엔이 말했다.

“걱정 말아요. 지안은 깊이 잠들었고, 이 온실엔 우리 외에 아무도 없어요. 그러니 말해봐요. 공작은…… 대체 뭘 하고 있길래 이렇게 조용한 거죠?”

“……짐작일 뿐이지만, 반역을 준비하는 것 같다.”

“반역이라뇨?”

“북부인들이 물자를 필요 이상으로 비축하고 있다는 보고가 있었다. 그리고 공작 휘하의 기사단이 제도를 향해 남하해오고 있다더군.”

사실은 악시온의 뒤를 따라온 기사들이 이제야 제도에 가까워진 것이지만, 그들은 이 사실을 몰랐다.

“어쩐지, 그래서 최근 사교계가 우왕좌왕이었던 거군. 흠. 북부에서 준동할 조짐이 보인다라……. 앞뒤 사정을 모르는 자들은 애꿎은 에를랑겐 후작 영애를 탓할지도 모르겠네요.”

황녀의 말에 일리아스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소수긴 하나 북부의 불온한 움직임은 모두 에를랑겐 후작가의 일방적인 파혼 탓이라 주장하는 여론이 있었다. 들어줄 가치 없는 헛소문이지만, 그런 목소리를 내는 자들이 있다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보다, 공작이 내게 계속해서 알현 신청을 해오고 있어요. 파혼으로 충격받아 몸져누웠단 핑계를 대고 있긴 하지만, 집요해요.”

이비엔의 말에 일리아스는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폐하께 요청해 공작이 황성에 입성할 수 없도록 단단히 손써두었지만, 언제까지 그의 입성을 막을 순 없다. 애써 막아본들, 기껏해야 연회가 열리기 전까지가 한계였다.

공작이 지안의 이능을 알고 그녀를 찾는 거라면, 결코 그녀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공작을 속이기 위해 빨래터의 하녀를 전속 시녀로 삼았으나, 이비엔에게 계속해서 알현 신청을 해 오는 걸 보니 지안의 행방을 알아차린 게 분명했다.

“……대안이 필요하겠군.”

공작이 검은 머리의 여자를 찾아 제도를 온통 뒤집어 놓았다는 소문은 이미 유명했다. 그리고 그날 이후. 공작은 매일같이 황성을 찾아와 황성의 정문 앞에 망부석처럼 서 있다 돌아가곤 했다. 그러길 벌써 며칠째다. 사교계의 이목이 공작에게 집중된 건 필연적인 일이었다.

기행에 가까운 공작의 행동에 다들 의문을 표했으나 호의적인 반응은 없었다. 그가 황성 인근에서 폭주하기라도 하면 큰일이기 때문이었다.

일리아스는 차라리 공작이 폭주하길 바랐다. 그가 폭주한다면 처단의 명분이 생긴다. 지안을 내어주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이기적이라 손가락질받아도 좋다. 누구와도 지안을 공유하고 싶지 않았다. 바로 그런 마음으로 아르킨을 직위 해지시키지 않았나. 이비엔이야 어쩔 수 없다고 여기고 있지만…….

“으음…….”

작은 잠꼬대가 일리아스의 상념을 끊어 놓았다. 지안이 잠에 취한 얼굴로 부스스 눈을 뜨자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숨을 죽였다. 흐릿한 눈을 깜빡인 지안은 입을 가리고 하품한 뒤 다시 까무룩 잠들었다. 그런 지안을 보며 이비엔이 말했다.

“그보다, 지안의 드레스는 마련해 두었나요?”

“드레스라니?”

“하아. 역시 말하길 잘했군. 연회에 지안의 파트너로 동행하기로 했잖아요. 지안은 제 옷을 빌려 입으면 안 되겠냐고 하던데…… 난 그런 꼴은 못 봐요! 옷이야 얼마든지 빌려줘도 아깝지 않지만, 이번 연회는 지안이 사교계에 처음으로 얼굴을 내비치는 자리라고요.”

“……당장 마련하겠다.”

“참고로 지안에겐 연녹색이 잘 어울려요. 포인트가 될 만한 악세서리는 붉은색이 좋고, 굽 높은 구두를 싫어하니까 신은 플랫 슈즈로 마련해요. 지금 당장! 엘로이츠 의상점과 에르데네트 쥬얼에 주문 넣어요. 알겠어요? 그 두 곳이 아니면 안 돼요!”

누구도 아닌 황녀의 말이었으므로. 일리아스는 이비엔의 충고를 주의 깊게 들었다. 영애들이 선호하는 장신구나 취향에 관해서 아는 것이 일절 없었으므로, 황녀가 알려주는 지침을 허투루 들을 수 없었다.

특히 액세서리가 겹치지 않도록 주의하란 황녀의 당부를 기억하며, 일리아스는 공작에 대한 걱정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 * *

황태자의 생일 연회를 하루 앞둔 날, 지안은 십여 개에 달하는 선물상자를 받아보게 되었다. 하녀들이 부지런히 나르는 호사스런 포장의 크고 작은 상자들을 지안은 영문 모를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이게…… 전부 드레스라고요?”

“전부는 아니다. 몇 개는 구두고 다섯 정도는 장신구인데…….”

“잠깐, 잠깐만요. 전하. 제가 궁금한 건 그런 게 아니에요. 대체 왜 이걸 제게……. 이런 건 받을 수 없어요.”

“왜지? 연회에 참석하겠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긴 한데, 황녀 전하의 옷을 빌려 입으면 그만인걸요. 연회에 참석하는 것도 일회성에 그칠 뿐이고요. 굳이 옷과 보석을 마련할 필요까진 없지 않나요?”

“넌 내 파트너다. 내 체면을 위해서라도 이비엔의 드레스를 빌려 입는 일은 없도록 해.”

아…… 체면. 지안은 혀를 깨문 심정으로 얼굴을 붉혔다. 내가 크게 착각하고 있었구나. 그럼 그렇지. 이 값비싼 것들을 내게 주는 것일 리가 없잖은가.

“아…… 하하. 제가 그런 건 줄 모르고……. 알겠습니다. 연회가 끝나면 다시 잘 포장해서 반납할게요.”

반납이라니. 말문이 막힌 일리아스를 대신해 이비엔이 냉큼 말했다.

“반납은 무슨 반납이야! 이까짓 거 백 번을 더 사도 삼황자궁 예산에 실금 하나 안 가! 그냥 챙겨, 지안.”

“하지만…….”

“드레스가 마음에 안 들어 그러는 거면 말리지 않을게. 근데 저거 하나만 팔아도 괜찮은 와인 다섯 병은 살 수 있어. 그러니 내 말 들어. 제도의 레스토랑, 다시 가보고 싶다고 그랬잖아.”

“연회를 위해 잠시 빌려주신 옷인걸요. 제가 되팔 순 없는 노릇이에요.”

지안의 말에 일리아스는 참담한 심경으로 말했다.

“……빌려주는 게 아니다.”

“네?”

“네게 주는 것이다.”

그 말에 다시 한번 사양하려던 지안의 말은, 서둘러 끼어든 황녀에게 가로막혔다.

“몇 개는 내가 골랐어. 그러니 사양 마, 지안. 응? 내 성의도 포함되어 있단 말이야.”

지안의 등을 드레스룸으로 떠밀며 반강제로 설득을 마친 이비엔은 두 눈에 쌍심지를 켠 채 일리아스를 향해 이를 갈았다.

“말을 해도 그딴 식으로밖에 못 하다니…….”

차마 반박할 수 없어 일리아스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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