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어슴푸레한 새벽. 이비엔은 번쩍 눈을 떴다. 조심스레 몸을 일으킨 그녀는 가장 먼저 지안의 얼굴 위로 손을 휘저어 지안이 깊이 잠들었는지 확인했다.
색색거리는 숨소리, 미동 없는 눈꺼풀까지 모조리 확인한 이비엔은 소리 없이 침대에서 내려와 침실의 문을 열었다.
“들어와.”
속삭이듯 작은 황녀의 목소리에 일리아스는 그제야 이비엔의 침실에 발을 들였다.
발소리를 죽여 황녀의 침실에 들어선 일리아스는 지안의 침대맡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스러지듯 주저앉는 친 오라비의 모습에 이비엔의 입술에서 한탄인지 한숨인지 모를 날숨이 흘러나왔다. 같은 처지인 혈육에게서 느끼는 동질감이 컸다.
삼황자의 이능은 화염, 황녀의 이능은 폭발. 서로 다른 듯하면서도 비슷한 이 두 개의 이능은 비록 종류는 달랐으나 감각기관에 야기하는 고통이 꽤 비슷했다.
이비엔이 느끼는 통증이 강한 열기와 압력으로 몸이 서서히 부풀다 그대로 터져 버리는 것이라면, 일리아스의 것은 산 채로 온몸이 불타는 것과 같은 통증이었다. 살이 녹아 오므라들고 뼛속까지 화염으로 그슬리는 그 고통을, 직접 겪어내지 않고서는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으랴.
그러나 여기에 더해 일리아스가 느끼는 폭주의 고통은 이비엔이 맛본 고통을 월등히 상회하는 것이었다. 각성과 동시에 가이딩을 접해 얼마쯤 안정된 이비엔과 달리, 그는 어릴 적부터 스스로 화상의 격통을 씹어 삼켜야 했기 때문이다. 그 탓에 일리아스의 입 안 볼살은 하도 깨물어 너덜너덜할 지경이었다.
이를 악물고 살점을 씹어 삼키며 버텨온 화상의 고통을 이비엔은 조금도 알 수 없었다. 직접 체득한 고통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도 살점이 조각조각 폭발하는 고통스러운 감각 속에서 몸부림쳤기에 어느 정도는 일리아스의 고통에 동감할 수 있었다.
밤중에 몰래 찾아드는 일리아스를 용인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제정신을 유지하는 것이 너무도 힘겨운 고통. 너무 아파서 잠들지 못하고 너무 아파서 벌떡 잠이 깨 버리는 폭주의 격통.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던, 울며 소리치던 그의 소년기를 기억하기에 이비엔은 일리아스와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지안을 자신의 전속 시녀로 넘기는 대신 일주일에 한 번씩 그의 방문을 허락할 것. 그것이 거래의 조건이었다. 표면상으로는 이동 능력을 지닌 능력자가 지안을 납치하지 못하도록 지키기 위해서였지만, 그 이면에는 이 같은 거래가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아무 짓도 안 해. 그냥 옆에만 있게 해 줘.’
잠든 지안에게서 희미한 기운이 흘러나온단 걸 알게 된 것은 지안의 처소가 일리아스의 옆 방으로 옮겨지면서부터였다. 잠결에 지안의 방으로 향하는 문을 몇 번씩이나 열어젖힐 뻔한 일리아스는, 이 몇 번의 경험을 통해 지안의 이능이 잠들어 있는 상태에서도 발휘된다는 걸 알았다.
이후로 그는 멀쩡한 침대를 두고서 매일같이 벽에 기대 잠을 청했다. 타오르는 횃불 위에 한 송이 눈이 떨어지듯 몹시도 부질없는 가이딩이었으나, 그마저도 일리아스에겐 달았다.
이비엔 역시 이 모든 걸 일찍이 체감하고 있었다. 때문에 일리아스를 흘겨보는 그녀의 눈초리 역시 아무런 힘이 없었다.
“해가 뜨기 전에 돌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일리아스의 입술은 하얗게 메말라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화조차 나지 않아서 이비엔은 한숨과 함께 자신의 침대에 걸터앉았다.
적막한 황녀의 침실에서 유일하게 들려오는 것은 지안이 색색 숨을 들이켜는 소리뿐. 지안의 침대 아래 웅크린 일리아스가 간헐적으로 헐떡인 것을 제외하면 무엇 하나 더해지는 소음이 없었다.
이비엔이 입을 연 건, 일리아스의 숨소리가 점차 안정을 찾아가기 시작했을 때였다.
“부러 티 파티에 참석하겠노라 나선 건…… 날 위해서였어?”
“……네가, 현실에 눈을 떠야 했으니까.”
“역시 그랬군.”
알고 싶지 않았던, 알았지만 모르고 싶었던 진실을 짚어주는 일리아스의 말에 황녀는 말없이 두 눈을 깜빡였다.
한참 후, 이비엔이 말했다.
“폐하께서 지저분한 일을 모두 오라버니에게 떠맡긴다는 건, 어릴 적부터 알고 있었어. 그걸 알면서도, 궂은일을 누군가 해야 한다면 그건 당연히 오라버니가 하리라 믿었지. 후후, 안일한 생각이었어. 줄곧 오라버니를 외면한 벌을…… 뒤늦게 받는 모양이야.”
“이비엔. 발현하게 된 건 네 탓이 아니다. 이건 그냥…… 예기치 못한 불운일 뿐이야.”
“불운? 그날 발현한 순간,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아? 곧 기사들이 날 죽이러 오겠구나. 그리고 그 선두에 오라버니가 있겠구나! 그런 생각을 했어!”
“…….”
“알다시피 나는…… 너무 늦게 발현해버렸잖아. 나도 알아. 꼼짝없이 죽은 목숨이라 여겼는데 이만하면 운이 좋은 편이지. 고맙게 생각해. 덕분에 남겨둘 사람과 끊어낼 사람을 구별할 수 있었어. 인정할게. 오라버니의 말이 맞았어. 난 알았어야 했어. 능력자가 된 것이…… 어떤 일인지. 그것이 무엇을 초래할지 일찍이 예상했어야 했어.”
“……스스로를 탓하지 마라. 네 잘못이 아니다.”
“위로는 고맙지만, 제도의 사교계를 모르지 않잖아? 내가 저지르지 않은 일도 내 잘못으로 포장되어 되돌아오는 곳이 제도 파가디안이야.”
이비엔의 말에 일리아스는 짐짓 입을 다물었다. 제도의 귀족들이 능력자를 얼마나 각박히 대하는지. 얼마나 맹렬히 매도하는지 뻔히 아는 탓이었다.
“참 이상하지. 내겐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일들이었는데……. 더는 그렇게 치부할 수가 없어. 왜일까? 폐하께 청한 알현이 거절당해서? 아니면 파혼 때문인가? 후후. 나도 드디어 오라버니의 수순을 밟나 봐. 당장 폐하께서도…… 며칠 전만 해도 날 그토록 안쓰럽단 얼굴로 바라보셨으면서 대체 왜…….”
이비엔은 말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서 더는 말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두 달 전만 해도 사교계의 정점에 서서 영애들을 호령했다. 눈짓 한 번으로 장내의 분위기를 장악하고 사교계의 주류라 인정받는 영애들의 구심점으로 활동했다. 분명 그랬는데, 그 모든 시간이 이렇게나 허망한 것이었다니…….
허탈했다.
소리 없이 무너지는 이비엔의 모습에 일리아스는 힘겹게 한숨을 삼켰다. 평화로이 잠든 지안을 가운데 두고서, 가련한 두 에스퍼의 눈물과 한숨이 각기 깊어졌다.
* * *
지안은 미로처럼 꾸며진 황성 후원을 호기심 어린 얼굴로 돌아보았다. 그중에서도 특히 마음에 든 건 등나무로 그늘을 만들고 넝쿨 식물로 벽을 세운 작은 미로 정원이었다. 앞서 몇 번 보았는데도 볼 때마다 새로워서 지안은 미로 정원을 세 차례나 더 둘러본 참이었다.
“그렇게 좋아?”
핀잔하듯 던진 이비엔의 말에 지안은 웃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예쁘잖아요. 기왕이면 볼 수 있을 때 실컷 눈에 담아두고 싶어요.”
“기왕이라니? 네가 원한다면 언제든 올 수 있어.”
지안은 대답 대신 빙긋 웃어 보인 후 나팔꽃 무더기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일리아스는 멀찍이 떨어진 후원의 입구에 우두커니 선 채로 지안의 뒷모습을 쫓았다.
나팔꽃에 가려진 지안의 모습을 상상하려 눈을 감으면, 잔잔한 호수 위로 떨어지는 걸음을 감지하듯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몰라볼 정도로 밝아진 지안의 얼굴과 새처럼 가벼운 발걸음을 느낄 수 있었다.
희미하게 연결된 것만 같은 그 감각이 가이드를 향한 에스퍼의 특성 개화란 것을 일리아스는 알지 못했다.
한참 집중해 지안을 감각하는 일리아스를 방해한 건 이비엔이었다.
“꼴사나워. 언제까지 그렇게 맴돌기만 할 셈이야?”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
“흥, 못 알아들은 척은. 차라리 대놓고 와서 보든가 하지 그래요.”
“그러고 싶지만…….”
일리아스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그러고 싶지만, 지안이 불편해하면? 자각과 동시에 무섭도록 자신을 뒤흔든 이 마음을 송두리째 부정당하면?
그날, 지안은 이렇게 말했다.
‘독설하는 사람은 딱 질색이에요. 그 불같은 성질머리, 정말 넌더리 난다고요.’
그 말을 듣고 모두 고치려 마음먹었다. 독설도 그만두고, 말투도 조금 덜 사납도록……. 하지만 화를 내지 않고서 어떻게 대화를 이어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일리아스가 기억하기로 자신은 늘 아팠고, 그래서 항상 짜증이 났다.
억울했다. ‘산 채로 불타고 있는 내게 맨정신이길 바라지 마! 그런 걸 요구하지 마! 내겐 불가능한 것이니!’ 그렇게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 역시 능력자 아닌가. 저토록 밝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남몰래 감내하는 고통이 있을 것이다. 가시밭길을 뒹굴고 산 채로 수렁에 처박히는…… 폭주의 고통이.
능력자에게 단명은 정해진 운명과도 같은 것이지만, 그중에서 특히 치유의 이능을 지닌 이들은 채 스물도 넘기지 못하고 죽는다. 재물과 명예, 호소와 협박 아래 이능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 환경 속으로 굴러떨어지기 때문이다.
지안은 치유 능력자는 아니었지만…… 그들과 몹시 흡사했다. 언뜻 당당해 보이지만 감추고 있는 두려움이 많고, 수많은 것들을 꺼린다. 계속 지켜보고 관찰한 덕에 알 수 있었다. 작은 소리에도 흠칫 놀라고 모든 이와 접촉을 꺼린다.
이비엔 역시 팔짱을 한 번 껴 본 것이 최대한의 접촉이었노라 밝혔다. 그 이상 하면 그녀가 불쾌해 할 것 같아 관뒀다고……. 그렇게 말했다.
그래서 더욱 조심스러웠다.
꼴사납다는 이비엔의 말에 동의한다. 그래도 된다면 모습을 드러내고, 지안의 옆에서 나란히 걷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가 불쾌해하면? 상상만으로도 속이 울렁거렸다.
밤중에 몰래 찾아드는 것만으로 족하려 했는데…… 점점 더 많은 걸 바라게 된다. 이 사실을 알고 나면 지안은 분명 경악하겠지. 기생충처럼 숨죽여 그녀의 이능에 기대 연명하는 나를 경멸할 것이다.
하지만……. 하지만, 그래도…….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일리아스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언제 다가온 건지 지안이 바로 코앞에 있었다. 무언가 심란한 얼굴이었고,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본 것마냥 팔짱을 낀 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