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9화 (49/199)

49화

삼황자는 분명 이렇게 말했다. 공작이 나를 찾아 황녀궁으로 왔었노라고.

이후로 황녀 전하에게 슬쩍 북부의 공작이 또 황성을 찾았는지 물어보았지만, 만족할 만한 대답은 듣지 못했다. 들을 수 있었던 건 알 수 없다는 말뿐이었다. 내가 가이드란 걸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니만큼, 근시일 내 공작이 황녀궁을 재방문할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걸까?

어쩌면 티 파티 같은 걸 하기도 전에 공작이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황태자의 생일 연회인지에 참석할 필요 없이 그와 만날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여겼는데…… 아무 소식이 없다. 공작은 대체 뭘 하고 있는 걸까? 왜 나를 찾아오지 않는 거지?

“다 됐습니다.”

하녀의 말에 지안은 상념에서 벗어났다. 바로 앞에 놓인 거울에 화사하게 치장한 스스로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칙칙한 시녀복을 걸치고 다녔을 때와 비교하면 까마귀에서 앵무새가 되었다고 해도 좋을 변화였다.

급히 수선을 마친 드레스인데도 썩 잘 어울렸다. 심지어 황녀의 것과 색감을 꼭 맞춘 연녹색 드레스다. 여기에 더해 황녀에게 빌린 귀걸이와 목걸이를 착용하고 머리까지 매만지니 영락없는 귀족 영애 하나가 거울 속에 앉아 있었다. 번거로운 치장이었지만 색달라 좋았다. 치렁치렁한 옷자락이 거추장스럽다곤 하나, 이럴 때가 아니면 또 언제 이런 옷을 입어보겠나.

지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드레스룸을 나왔다. 그런 지안을 황녀가 반색하며 맞이했다.

“어서 와, 지안!”

뜻밖인 것은, 삼황자가 이 자리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어쩐지 황녀가 드레스룸까지 따라 들어오지 않는다 했더니……. 삼황자를 맞이하기 위해서였나.

“전하.”

가볍게 고개 숙여 아는 체 하자, 흐릿하게 풀려 있던 일리아스의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왔다.

“……오랜만이군.”

오랜만은 무슨. 못 본 지 나흘밖에 되지 않았다. 지안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진 걸 확인한 이비엔은 안타까움을 숨기며 일리아스를 흘끔거렸다.

“모처럼의 티 파티라, 오라버니도 함께 참석하게 되었어.”

“그렇군요.”

“그리고…… 황태자 전하의 연회에서 오라버니가 네 파트너가 되어 주실 거야.”

이비엔의 말에 지안의 두 눈이 이채를 발했다.

황녀는 한 번도 자신에게 뭔가를 명령하거나 고지한 적이 없었다. 차를 내오는 간단한 일조차 전부 하녀에게 일임한 채, 오직 말벗만이 되어 줄 것을 요청했던 그녀다.

그런 황녀 전하의 입에서 이런 통보가 나오다니. 얼핏 들어선 통보라고 눈치챌 수조차 없는 부드러운 어투였다.

“…….”

뭐, 아무래도 상관없나. 그간 황녀와 제법 친근하게 지내왔지만, 고작해야 나흘이다. 매 순간 거짓말로 그녀를 기만한 건 자신도 마찬가지다.

은폐와 거짓 위에는 결코 신뢰가 자라날 수 없는 법. 딱히 지금의 상황이 유감스럽진 않았다. 파트너가 누군지 따윈 조금도 중요하지 않으니까. 목적은 참석 그 자체지, 동행이 누구냐 하는 것이 아니다. 별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황녀의 얼굴이 다소 밝아졌다.

“그럼 그만 온실로 갈까? 지금쯤이면 영애들 모두 입성했을 거야. 네게 소개해 주고 싶은 사람이 많아. 전부 오랜 소꿉친구거든.”

지안은 별말 없이 황녀를 뒤따랐다. 평소라면 황녀의 재잘거림에 간간이 대꾸하며 분위기가 처지지 않도록 했을 테지만, 삼황자가 동행하는 탓에 표정 관리가 쉽지 않았다.

그가 싫은 건 아니었다. 노예상을 벗어나 구출될 수 있었던 것도, 에스퍼들이 황성에 잠입해왔을 때도 늘 그의 도움을 받았으니까.

하지만 불편한 건 사실이다.

삼황자가 그런 식으로 마음을 토로하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이다. 공작을 향한 경계심, 손에 잡힐 듯 선명한 독점욕을 드러내지 않았다면 조금은 대하기가 편했을지도. 그 고백만 없었다면 그가 파트너 자리를 멋대로 꿰찼대도 별반 신경 쓰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신경을 끄려고 해도 그러기가 힘들었다.

날 상대로 황녀 전하와 모종의 거래를 한 듯한데…… 단순 착각인가? 내가 과민해서 삼황자를 오해하는 건가?

왜 이런 식으로 파트너 자리를 선점한 걸까. 내게 직접적으로 파트너가 되라 말했다면 흔쾌히 응했을 텐데, 여동생을 시켜 고지하다니? 방식이 그답지 않다.

이 같은 생각을 하며 유리 온실에 당도한 지안은 한 무리의 영애들과 마주하게 되었다. 하나같이 대단히 아름답고 잘 가꾼 태가 나는 귀족 영애들이었다.

“모두 오랜만이야.”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그리고…… 삼황자 전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렇군.”

대충 인사를 받아 챙긴 일리아스는 의자를 살짝 끄집어내 지안의 착석을 도왔다. 이런 매너를 굳이 사양하는 편은 아니라, 무심코 고개를 끄덕여 감사한 뒤 의자에 앉았다.

“아…….”

그러나 이후, 지안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영애들을 보고 그제야 삼황자의 행동이 무척 과했단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미 자리에 앉은 뒤다. 이제 와 의자에서 다시 일어날 수도 없는 일이라 지안은 아무렇지 않게 표정을 관리했다. 다소 예의에 어긋난 것 같긴 한데, 큰 실수는 아니겠지 뭐.

때맞춰 이비엔이 지안을 소개했다.

“이쪽은 최근에 내 전속 시녀가 된 지안이다. 앞으로 자주 보게 될 것 같아서 부러 이 자리에 참석시켰지.”

황녀의 말에 가장 먼저 화답한 건 에를랑겐 후작 영애였다.

“그렇군요. 처음 뵈어요. 저는 에를랑겐 후작가의 이멜다예요.”

“지안입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에요.”

마음에 없는 말을 기계적으로 내뱉으며 차례차례 영애들을 소개받은 지안은 길쭉한 원형 테이블에 착석한 귀족 영애의 면면을 호기심 어린 얼굴로 응시했다.

다들 오래 친분을 나눈 사이인 듯, 소개가 끝나자 영애들이 황녀에게 한마디씩 말을 붙였다. 다만, 삼황자에게 말을 거는 사람은 이상하다 싶을 만큼 없었다. 삼황자 역시 이런 상황에 개의치 않는 듯 마찬가지로 말이 없다.

지체 높은 귀족 영애라 하지만 대화 주제는 단순한 흥밋거리 위주였다. 최근 사교계의 가십이나 무역을 통해 들어온 새로운 동방의 찻잎, 의상점의 새로운 디자인과 새로 맞춘 액세서리 같은 것들이 영애들의 입과 입을 거쳐 테이블 위를 순환했다.

아는 것이 하나도 없어서 대화에 낄 순 없었지만, 드러난 대로만 보자면 누구의 기분도 상하게 만들지 않을 화두가 차례차례 오르내린 것 같았다.

그래. 여기까진, 딱히 문제 될 만한 것이 없다.

하지만 어째…… 황녀 전하를 대하는 영애들의 태도에 역력한 거리감이 느껴졌다. 분명 활발히 대화가 오가고 있는데도 어딘지 알게 모르게 대화가 겉도는 건…… 아직 사교계의 화법에 익숙하지 못한 내 착각인가?

‘착각이라기엔 다들 이상하리만치 말을 돌리는데…… 왜지?’

처음엔 황족을 대하는 탓에 조심하느라 그런 줄 알았다. 권력자에게 잘못된 언행을 내보일 순 없는 일이고, 이 자리에 모인 영애들도 긴장이란 걸 할 것 아닌가. 하지만 점차 굳어가는 황녀의 표정을 보건대…… 그게 아닌 것 같았다. 따뜻이 데워진 차 한 잔을 다 마시기도 전에 온실 안의 공기가 서늘해져 가고 있었다.

지안은 차분한 시선으로 한 점 흐트러짐 없이 앉아 있는 영애들의 찻잔을 살폈다. 누구도 디저트에 손대지 않았고, 찻잔 역시 제 위치를 고수하고 있었다. 영애들의 미소는 한결같이 화사했으나 잘 보면 옅은 어색함이 담겨 있다.

결정적으로, 애써 자리를 마련한 황녀가 이런저런 질문으로 분위기를 띄우려 노력하고 있음에도 대부분 단답에 그쳤다. 매끄럽게 이어져야 할 대화가 가위질에 잘려 나간 실뭉치처럼 툭툭 끊기고 있었다.

……이럴 거면 다들 티 파티엔 왜 응한 거지? 정말 황녀 전하의 소꿉친구가 맞긴 한 건가?

이쯤 되면 아무리 참을성 많은 사람이라도 폭발하기 마련이다. 과연 지안의 예상대로 이비엔의 얼굴은 모멸감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지안을 소개할 요량으로 자리를 마련했는데, 초대에 응한 영애들의 반응을 보니 그 누구에게도 지안을 부탁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이비엔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누르며 지적했다.

“내가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니라면, 다들 날 대하는 게 이전과 다른 것 같군.”

“그럴 리가요. 저희 모두 황녀 전하의 비호를 톡톡히 받아온 입장인 것을요. 저희는 다만…….”

“다만, 뭐지? 이비엔이 능력자가 되어서 그런가?”

정곡을 짚어내는 일리아스의 말에 몇몇 영애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것은 역력한 두려움이었다. 동요와 함께 언뜻 드러나 보인 기피감에 일리아스는 냉소 어린 얼굴로 비아냥댔다.

“혹시라도 황녀가 폭주하게 될까 봐 두려운가 보군. 하긴, 얄팍한 친분보다는 목숨이 더 중요한 법이지. 안 그런가?”

날것에 가까운 일리아스의 말에 가뜩이나 서늘했던 분위기가 그대로 박살 났다. 와장창하는 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온 것 같을 정도다. 지안은 조마조마한 얼굴로 점차 험악해져 가는 공기를 들이마셨다.

반박에 나선 건 이멜다인지 하는 후작 영애였다.

“두려움이 없다곤 말할 수 없지만…… 억측이십니다, 전하. 저희는 그저, 황녀 전하께 어떻게 소식을 전해야 할지 몰라 고민이 깊었을 뿐이랍니다.”

“소식이라니?”

의문하는 황녀의 말에 이멜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오티스 영식이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은 모양이군요. 부디 못 들은 걸로 해 주세요, 전하. 제 짧은 식견으론 당사자 간에 직접 전달되어야 할 이야기 같습니다.”

“아니. 말해 줘. 지금 당장.”

경직된 황녀의 목소리에 옅은 노기가 묻어나왔다. 후작 영애는 잠시 망설이더니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알스페트 후작가에서 파혼을 선언했고, 폐하께서 이를 받아들이셨노라 들었어요.”

“뭐?”

“바로 다음 날인 오늘, 전하께서 티 파티를 여시기에 이 자리를 빌려 그 일을 털어내시려는 줄 알았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게 아닌 것 같아…… 저희 모두 말을 아꼈던 거예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