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무슨? 공작님이라니요? 누가 저를 찾아오기라도 했나요?”
“그래. 북부의 공작이 널 찾아왔다.”
뭐? 지안은 말없이 경악했다. 가장 먼저 느낀 것은 기쁨이었고, 그 뒤를 따른 것은 불안이었다. 일리아스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대체 왜 이러는 거지? 공작이 나를 찾아온 게 뭐가 어때서? 그게 무슨 문제라고 이러는 건가. 공작이 날 찾으면 찾는 거지, 이렇게까지 감정적으로 굴 일인가?
의문에 답을 주듯 일리아스가 물었다.
“……그간 북부로 돌아가고 싶다고 한 건 공작 때문이었나?”
지안은 직감했다. 아니라고 답해야 한다. 절대 아니라고 딱 잡아떼야 한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저는 잘 모르겠어요.”
지안의 대답에 일리아스의 얼굴이 아프게 구겨졌다. 그 말을 믿고 싶으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럼 대체, 공작이 왜 너를 찾는 거지?”
“그분이 저를 찾으신다고요?”
“널 찾아 황녀궁에 방문했다더군. 하지만 황녀궁에 네가 없는 걸 알고 제도로 나섰다고 한다. 아마 널 찾아낼 요량이었겠지.”
“저를요?”
“돌아오는 길에 그와 마주쳤나? 혹시 공작이 네 능력을 알고서…….”
일리아스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지안이 슬며시 방사 가이딩을 펼쳤기 때문이었다. 부드러운 음성을 가장하며 지안이 말했다.
“전하. 저는 전하가 뭘 불안해하시는지 잘 모르겠어요. 왜 화를 내시는지도 모르겠구요. 북부가 제 고향이긴 하지만, 그저 지역이 동일한 것뿐인걸요.”
“……그럼 대답해. 공작을, 정말 만난 적 없나?”
“없어요.”
지안의 말에 일리아스는 더는 참지 못하고 그대로 지안을 껴안았다. 사실, 지안이 나타난 순간부터 이러고 싶었다. 지안이 당황스러워하는 걸 알았지만, 놓고 싶지 않았다.
“무슨……!”
그들을 떼어내기 위해 황녀가 나서려 했으나 지안은 눈짓으로 그녀를 말렸다. 그리고 일리아스를 달래듯 그의 팔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품 안 가득 그녀를 껴안아 버렸기 때문일까. 힘겹게 눌러 둔 마음이 순식간에 임계점을 넘어 끓어올랐다. 일리아스가 말했다.
“……널 좋아해.”
“네?”
“넌 늘 북부로 돌아가고 싶어 했지. 그래서 불안했다. 네가…… 공작을 좋아하는 것일까 봐.”
그리고 공작과 지안의 관계가 예상보다 더 깊은 것일지도 모른단 생각에 괴로웠다. 북부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여자와, 평생 벗어나지 않던 북부를 떠나 제도에 당도한 남자. 이 사이에 이유가 있다면, 오직 하나뿐이지 않은가.
과열된 생각이란 걸 알았지만, 상상력이 너무 지나쳤다고 치부하려 했지만, 일리아스는 이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유일하게 가능했던 건, 몸집을 부풀리는 불안에 맥없이 패하는 것뿐이었다.
황녀와 함께 제도로 외출한 지안을 공작이 데려가 버리면? 그녀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면 그땐 어떻게 되는 거지?
바로 이 질문이 깊숙이 묻혀 있던 날것의 감정을 이끌어 냈다. 토해내지 않고선 배길 수 없는 고백이었다.
‘내가 공작을 좋아한다고?’
반면, 지안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처구니없었다. 그야 공작을 다시 만나면 반갑긴 하겠지. 하지만 그 이상의 감정이 있진 않았다. 게다가 지금 이건…… 내게 고백한 건가? 다짜고짜 성질을 있는 대로 부려놓고선, 고백이라고?
……기가 막혀서. 지난날 감옥에서 보았던 황족은 대체 어딜 갔나? 죽음 또한 능력자의 숙명이니 어쩔 수 없다던 그 오연하던 남자가 정말로 눈앞의 이 남자인가?
하, 모르겠다. 우선은 상황 정리가 먼저였다.
“전하. 비약이 너무 심하세요. 어쩌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되셨는지도 모르겠고요. 다만, 이것 하나만은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겠네요. 저는 공작님을 좋아하지 않아요. 만나본 적도 없는 사람을 좋아할 순 없는 노릇이잖아요?”
지안은 어느 때보다 더 태연해지려 애썼다. 거짓말을 잘하려면 무엇보다 동요하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죄책감은 없었다. 잘못의 경중을 따진다면 거짓을 일삼은 자신보단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황성에 붙잡아둔 삼황자의 잘못이 더 클 것이다. 안심하는 일리아스의 모습을 보며, 지안은 폭탄의 뇌관을 제거하는 심정으로 말을 이었다.
“다만,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건…… 이런 고백은 달갑지 않아요. 받아들일 수도 없고요.”
“알아.”
덤덤한 대답이었으나 그 속에 짙은 후회가 묻어나왔다. 예상을 벗어난 일리아스의 반응에 지안의 눈썹이 슬쩍 들렸다. 고백을 거절당했으니 분명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정도로 성격이 엉망인 건 아닌 모양이다.
하긴, 노예로 팔려나갈 뻔한 사람들을 전부 고향으로 돌려보내고 여비까지 쥐여주던 사람이다. 매일 틱틱거리고 성질을 부리지만, 본성이 아주 글러먹진 않았단 건 지안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어진 그의 말이 지안의 안심을 다시 거두어 갔다.
“……노력할 거다. 네가 나를 좋아할 수 있도록.”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은데. 그 말이 턱밑까지 차올랐다. 지안은 난감한 얼굴로 황녀를 응시했다. 도움을 요청하는 지안의 시선에 이비엔이 나섰다.
“헛소리가 심하군. 그런다고 지안이 널 좋아할 것 같아?”
잔뜩 비꼬는 황녀의 말에 기대에 차 있던 지안의 표정이 핼쑥해졌다. 아니, 그만 들어가잔 말이면 충분한데……. 가이딩을 동원해 겨우 어르고 달래 두었는데 다시 자극하면 어쩌잔 말인가? 지안은 다급히 이비엔의 팔을 붙잡았다.
“전하. 밤이 늦었으니 이만 들어가 보는 게 좋겠어요.”
권유처럼 말했으나 사실상 강요였다. 이비엔은 뭐라고 더 말하려다가, 지안이 보내는 눈짓을 보고 내키지 않는 얼굴로 걸음을 뗐다.
* * *
지안은 일리아스의 고백을 금방 잊을 수 있었다. 그의 고백을 곱씹거나 고민할 시간이 좀처럼 나지 않은 탓이었다. 제도 나들이에 이어 술까지 곁들인 바람에 당일엔 기절하듯 잠들고 말았고, 다음 날엔 호사스런 아침 식사에 이어 멀찍이서 구경만 했던 황성의 후원을 둘러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날벼락이 떨어진 건 황성 후원을 다 돌아본 후, 장미 온실에서 티 타임을 가지고 있을 무렵이었다.
“연회에 참석하기 위해서라도 친분이 있는 영애 한둘은 만드는 게 좋겠어.”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내가 함께 있을 테지만, 급한 용건이 생기면 나도 자리를 비울 수밖에 없어. 게다가 사교계의 생리를 잘 모르는 널 혼자 둘 순 없는 일이야. 도움을 줄 영애가 네 곁을 지키는 게 좋겠어. 사교계의 실세인 이들이 네 주변을 지킨다면 나도 안심할 수 있겠지.”
“필요한 일인가요?”
내키지 않아 하는 지안의 모습에 이비엔은 부드럽게 설득했다.
“사교계에 처음 얼굴을 내미는 거잖아. 아는 사람 하나 없이 연회에 참석할 순 없는 노릇이야. 그래서 말인데, 이틀 후에 가벼운 티 파티를 열까 해. 바로 이 장소에서 말이야. 익숙하지 않은 장소에서 티 파티를 열면 네가 당황할까 봐 먼저 온실을 보여주고 싶었어.”
어쩐지 온실에서 차를 마시겠노라 고집하더니, 이 말을 전하려고 그러신 거구나. 이제 고작 열일곱인 황녀에게서 이런 세심한 배려를 받다니……. 그 마음씨에 감동하다가도 왠지 창피했다. 가이드로서 도움이 되진 못할망정 하나부터 열까지 받기만 하고 있지 않은가.
“……뭐라고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네가 알아주는 걸로 충분해. 아무튼, 티 파티를 성공적으로 끝내기 위해서라도 속성으로 예절을 배우는 게 좋겠다. 복잡할 건 없어. 사교계에 통용되는 기본적인 예절만 숙지해도 충분하니까. 아, 그리고 춤도 배워야 해.”
“춤이요? 하지만 저는 한 번도…….”
“내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네?”
“지금 한번 해보자. 어떻게 춤춰야 하는지 알려줄게.”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미는 황녀의 모습에 지안은 짐짓 얼굴을 붉혔다.
같은 여자인데도 동경하게 되고야 마는 자신감, 상냥하면서도 당당한 웃음. 아마 고백을 해온 사람이 삼황자가 아니라 황녀 전하였다면 흔들렸을지도 모르겠다. 동성인 황녀 전하와 잘 되진 못했겠지만, 이렇게나 잘 대해 주는데 마음이 기울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 아닌가.
여자의 마음은 여자가 더 잘 안다고, 황녀궁에서 고작 이틀을 보냈을 뿐인데도 긴장으로 딱딱히 굳은 마음이 솜사탕처럼 녹았다. 영애들을 불러 날 소개하겠다기에 이게 웬 날벼락인가 했는데, 더는 그런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잘 생각해보면 부담스러울 것도 없는 일이다. 황태자의 생일 연회인지 뭔지에 참석하기만 하면 끝이다. 연회가 열리고 공작과 만나는 즉시 북부로 떠나게 될 터. 다시 볼 일 없다 생각하고 적당히 귀족 영애들을 소개받으면 그만인 일이다.
너무 공작만 믿고 있는 것 아닌가 싶었으나, 달리 기댈 인물이 없으니 어쩌겠나.
지안은 계산을 마치며 황녀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가이딩 차단 같은 건 하지 않았다. 그 탓에 황녀의 두 눈이 놀라움으로 크게 뜨였지만, 상관없다. 이 모든 배려가 가이딩을 받기 위한 황녀의 수작에 불과하대도 좋았다. 지난 이틀간 온 신경과 주의를 기울여준 그녀의 상냥한 배려에 뭐라도 보답하고 싶었다.
“제가 몸치라서 한 번에 잘 배우진 못할 거예요.”
그렇게 말하며 지안은 황녀의 손을 꼭 잡았다. 맞잡은 손바닥을 통해 농밀한 가이딩이 전해져오자 이비엔은 주저하는 얼굴로 지안의 두 손을 꼭 잡고 스텝을 가르쳐주었다.
지안의 손을 놓아야 하는데, 난 괜찮으니 이능을 그만 사용하라고 해야 하는데…… 그러기가 힘들었다. 할 수만 있다면 붉은 장미가 만발한 이 유리 온실에서 온종일 지안과 춤추고 싶었다.
오랜 약혼자인 오티스와 춤출 때도 지금처럼 기분이 들뜨고 설레진 않았다. 열 두 살 데뷔탕트를 맞이한 당일에도, 이토록 긴장하진 않았다. 지안에게 스텝을 제대로 알려준 것이 맞는지, 박자를 제대로 맞춰서 움직이고 있는 건지 무엇 하나 제대로 확인할 정신이 없었다. 그저 맞닿은 두 손에서부터 전해지는 충만함에 온전히 집중하고 싶었다.
이비엔은 떨리는 시선으로 지안을 올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지안이 말했다.
“전하께서 계셔서 다행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