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뭐, 그러는 황녀 전하도 이젠 능력자 신세잖아. 일이 이렇게 되었는데 어느 영애가 황녀 전하의 시녀가 되려 하겠어. 불쌍한 황녀 전하. 발현만 안 하셨어도 혼약이 파기되는 일은 없었을 텐데……. 심지어 황녀 전하께선 약혼이 파기되었단 것도 전혀 모르시는 눈치야.”
쉬쉬하며 웃고 떠드는 하녀들의 말을 끝까지 엿들을 인내심은 없없다. 악시온은 곧장 하녀들 앞에 나섰다.
“지안을 알고 있나?”
“헉?”
“황녀 전하의 전속 시녀 이름이, 지안이 맞나?”
“누, 누구세요?”
“대답해라. 지안은, 어디 있지?”
황성 하녀들은 곧바로 입을 열지 못했다. 북부 공작인 악시온의 얼굴을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보니 대답은커녕 눈치 없이 그의 얼굴을 보고 뺨을 붉히는 하녀마저 있을 정도였다.
“새로 오신 기사님이신가요?”
대뜸 그렇게 물어오는 하녀의 눈빛은 몽롱하게 풀려 있었다.
바로 이때, 뒤늦게 악시온의 복장을 확인한 하녀가 이를 가로막았다.
“알리샤, 그만해.”
동료를 저지하고 나선 건 평소 심한 주근깨로 놀림받던 케이트였다. 어릴 적부터 황성 하녀로 생활한 탓에 그녀는 귀족의 무서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황성에선 사람의 얼굴보다 복장을 통해 상대를 파악해야 하는 법이며, 그중에서도 보석 단추를 달고 있는 사람을 특히 조심해야 한다는 걸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케이트가 말했다.
“누구신지 모르겠지만, 지안은 황녀 전하의 전속 시녀고 황녀궁에 있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삼황자궁의 시녀였지만 오늘부로 황녀 전하의 전속 시녀가 되었다고 들었어요. 그리고…….”
하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악시온은 서둘러 뒤돌아 달렸다. 그 모습에 케이트는 당혹해하며 중얼거렸다.
“이런…… 지금 가 봤자 만나지도 못할 텐데.”
하지만 붙잡으려 해도 이미 늦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누군지는 몰라도 황녀 전하의 궁에 도착하면 자연히 알게 될 것이다. 오늘 황녀 전하가 성 밖으로 나들이를 나섰단 사실을 말이다.
* * *
지안은 말갛게 상기된 얼굴을 하고 황성으로 돌아왔다. 근래 들어 이렇게 기분이 좋았던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다.
그도 그럴 게, 까탈스런 상전인 삼황자와 달리 황녀는 좋은 말동무였다. 여기에 더해 북부로 소식을 보낼 수 있게 되지 않았나. 그리고 이만큼이나 기분이 좋아진 데는 술도 단단히 한몫했다. 정말 오랜만의 음주였던 것이다.
지안의 뺨이 탐스럽게 익어 있는 걸 본 이비엔은 아무래도 술을 너무 많이 먹인 게 아닌가 싶어 잠시 걱정했으나, 비틀거림 없는 걸음을 보고 이내 안심했다. 잠시 지안의 눈치를 살핀 이비엔이 말했다.
“지안. 곧 황태자 전하의 생일을 축하하는 연회가 열려. 제도의 영애들에게 널 소개하고 싶은데, 나와 함께 연회에 참석해주지 않을래?”
“연회요?”
“응. 파트너는 걱정 마. 어떻게든 구해다 줄 테니까.”
“음. 죄송해요. 제안은 감사하지만, 제가 사람이 많은 장소를 싫어해서요.”
“황태자 전하의 생일 연회인데도? 무려 제도의 쟁쟁한 고위 귀족들이 대거 참석하는 자리야. 눈도장을 찍어두기에 그만한 행사는 한동안 없을 거란 말이야. 뭣보다 연회에 참석하면 그럭저럭 괜찮은 영식도 물색할 수 있을 거야. 응? 나와 함께 연회에 가줘. 드레스나 보석은 내가 다 빌려줄게.”
이비엔의 말에 지안이 소리 내 웃었다. 이윽고 작게 한숨을 내뱉은 지안이 말했다.
“전하. 저는 제도의 귀족들과 그다지 안면을 트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제가 왜 그들에게 눈도장을 찍어야 하죠?”
“응? 그야…….”
“저는 누구에게도 잘 보이고 싶지 않아요. 그럴 필요도 없고요.”
과감한 그 말에 이비엔의 눈이 크게 뜨였다. 술에 취해서 그런지, 지안의 언사가 평소와 조금 달랐다. 조금 더 본연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 같달까.
보다 솔직해진 말투였지만, 오만하게 들리진 않았다. 오히려, 이비엔은 저도 모르게 지안의 말에 납득했다. 지안의 말대로 지안은 누구에게도 잘 보일 필요가 없었다. 그녀가 그러려고 하지 않아도 모두가 지안을 좋게 볼 테니까.
가이드에게 콩깍지가 씌고 만, 지극히 에스퍼다운 생각이었으나 이비엔은 이 사실을 몰랐다. 그저 완곡한 거절에 몸이 달았을 뿐이다. 연회를 핑계로 지안에게 드레스를 몇 벌 더 입혀 보고 싶었고, 그간 친분을 쌓아온 영애들에게 지안을 소개시켜 주고 싶은 마음도 간절했다.
“그, 그럼 이건 어때? 연회엔 볼거리가 많아. 이번 연회에선 마법사들이 환상 마법을 시연한다고 들었어. 참석하면 분명 즐거울 거야.”
“마법이요?”
흥미를 보이는 지안의 모습에 이비엔이 반색하며 설득했다.
“응. 마법사를 한 번도 본 적 없다고 그랬지? 연회에 참석하면 마법사들의 마법 시연을 가까이서 볼 수 있어. 악단도 있고, 그 외의 볼거리도…….”
황녀가 재잘재잘 연회를 주제 삼아 떠들었지만, 지안은 별 관심이 없었다. 하도 설득하기에 적당히 반응한 것뿐인데 반색하며 열을 올려서 조금 난감할 뿐이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는데 별안간 황녀의 입에서 뜻밖의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아. 그러고 보니 북부의 공작도 이번 연회에 참석하는 모양이야.”
“……공작님이요?”
술이 확 깨는 기분이었다. 공작이라니. 누구? 내가 아는 그 공작님이 맞을까?
“응? 그를 알고 있어?”
“그야…… 저도 북부인이니까요.”
서둘러 둘러댄 지안이 조심스레 물었다.
“……황태자 전하의 생일 연회라서 공작님도 참석하시는 건가요?”
“아마도? 나도 잘은 몰라. 그는 한 번도 제도에 올라왔던 적이 없거든. 제국 산하에 속해 있다지만, 나름 북부의 군주니까. 그 때문에 폐하께서도 굳이 그를 황성으로 부르지 않는다셨어. 뭣보다 공작이 폭주로 죽을 거란 소문이 2년 전부터 파다했는걸.”
그렇다면 연회에서 그를 볼 수 없는 걸까. 실망하려던 찰나 황녀의 말이 이어졌다.
“그런데 최근 공작이 북부를 떠나 제도로 올라오고 있다는 급보가 들어왔거든.”
“급보요?”
“공작이 제도에서 폭주라도 하면 큰일이잖아. 급보가 올라올 만도 하지. 미리 고지하고 제도로 올라온 것도 아니었다던데. 갑작스러운 일이라 황태자 전하가 주시하고 있는 모양이야. 폐하와 황태자 전하의 이야기를 조금 엿들었는데, 걱정은 하시지만 이제 와 발걸음을 돌리란 명령은 할 수 없다시는 것 같더라고. 뭐, 공작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지. 사실 황명을 내린다고 해도 그가 듣지 않을지도 모를 일이고…….”
“듣지 않는다뇨? 황명을 거역할 순 없는 일 아닌가요?”
“보통은 그렇지. 하지만 그는 무력으로 손꼽히는 능력자이기도 하고 폭주까지 앞두었는걸. 공작이 처한 상황을 보건대, 황명을 우습게 볼 가능성도 있어. 하여간 예의주시하는 중인가 봐. 황태자 전하의 생일 연회에 그를 초대한 것도 아마 그 일환 중 하나일 거야. 아무튼, 별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나랑 같이 연회에 참석해줘 지안. 응?”
“좋아요. 참석할게요.”
“뭐? 정말?”
기뻐하는 이비엔의 모습에 지안은 말없이 웃어 보였다.
황녀가 무슨 마음으로 함께 연회에 참석할 것을 제안했는지…… 잘 알고 있다. 조금이라도 더 친해지고 싶어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을 오늘 하루 내내 봐 왔지 않은가. 이를 이용하는 일이겠으나 상관없다. 황태자의 생일 연회인지 뭔지 하는 곳에, 공작이 온다. 연회에 참석할 이유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동안 삼황자의 눈치를 보느라 공작과 친분이 있단 사실을 밝히지 못했다. 노예로 팔려나갈 뻔한 걸 막아 준 고마운 사람이지만, 지안의 눈에 비친 삼황자는 조금만 수틀려도 사람을 감옥에 잡아 가두는 위인이었다.
불같은 성격. 거슬리는 것을 참지 못하는 그의 태도는 많은 것을 시사했다. 시녀 생활을 하며 내내 주눅이 들었던 것도 절반은 삼황자의 탓이었다.
결정적으로, 감시를 맡았던 기사님이 홀연히 사라진 것을 보며 확신했다. 공작과의 관계를 밝히면 삼황자는 어떤 식으로든 훼방을 놓을 것이다. 북부로 돌아가고 싶다는 말만으로도 온종일 못마땅한 티를 냈던 사람 아닌가.
만일 황성을 떠나려 한다면…… 삼황자는 어떤 식으로든 그것을 막으려 들 것이다.
일리아스와 마주친 건 바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어딜 갔다가 이제 오는 거냐!”
대뜸 화부터 내는 삼황자의 모습에 지안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조금 전만 해도 기분이 꽤 좋았는데…… 날 선 말을 들으니 절로 미간이 구겨졌다.
그래도 이번엔 대신 화를 내줄 황녀 전하가 있었다.
“어딜 가든 오라버니가 무슨 상관이신지? 그리고 목소리 좀 낮춰요. 그렇게 소리치지 않아도 잘 들리니까.”
“……확실히 귀가 따갑긴 하네요.”
슬쩍 황녀의 역성을 들어 준 지안은 파르르 떨리는 일리아스의 입술을 보고서 얼른 입을 다물었다. 자존심이 대단한 사람이란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너무 대놓고 헐뜯었나? 놀림 좀 받았다고 저런 표정이라니.
사나운 기색으로 입술을 짓씹은 일리아스는 스산한 목소리로 황녀에게 경고했다.
“……이비엔, 다시는 지안을 데리고 성 밖을 나서지 마라.”
“내 맘이에요. 그리고 오늘 제도로 외출한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고요.”
“이유는 궁금하지 않아!”
버럭 외치는 일리아스의 모습에 이비엔과 지안의 얼굴이 딱딱히 굳었다. 영문을 모르겠지만 저런 말을 듣고도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이비엔은 곧바로 맞대응에 나섰다.
“지금, 제 궁에 와서 이게 무슨 행패인지 모르겠군요. 손윗사람으로 대접해주는 건 관두겠어요. 이해했다면, 당장 꺼져. 싫다면 꺼지도록 만들어주지.”
강경한 이비엔의 말에 지안은 속으로 황녀를 응원했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삼황자는 대꾸도 없이 황녀를 지나쳐 자신에게 손을 뻗어왔다. 일리아스의 손이 지안의 양어깨를 덥석 잡았다. 그 탓에 지안은 놀라는 와중에도 그의 얼굴을 보다 가까이서 살필 수 있었다. 침울함과 울분, 그리고 섭섭함이 뒤섞인 그의 금안이 습윤해 보이는 건…… 내 착각인 걸까?
영문을 모른 채 긴장한 지안에게 일리아스가 말했다.
“혹시…… 공작과 만났나?”
“네?”
“대답해. 그와는, 무슨 사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