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입성 절차를 밟으며 느긋하게 신분을 밝힐 여유는 없었다. 앞을 가로막는 경비병에게 신분 패를 던지듯 건넨 악시온은 서둘러 황성의 정문을 지나쳤다. 제가 두 발을 디디고 선 곳이 어딘지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지안을 찾아야 한다는 맹목적인 바램만이 악시온을 움직이는 원동력이었다.
“고, 공작님! 잠시만…!”
“비켜라.”
당혹스러운 얼굴을 한 문지기와 난처해하며 만류하는 황성의 기사들을 거듭 지나쳐 삼황자의 집무실에 들이닥친 악시온은, 뜻밖에 삼황자가 아닌 청소 중이던 하녀와 마주치게 되었다.
갑작스러운 악시온의 난입에 놀란 사라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공작에게 물었다.
“누, 누구세요?”
“삼황자 전하는 어디 계시지?”
“잠시 자리를 비우셨…….”
사라의 말이 다 끝맺어지기도 전에 악시온은 발길을 돌리려 했다. 삼황자를 찾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 순간, 어쩌면 삼황자궁의 하녀라면 지안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악시온은 뒤돌아서다 말고 하녀에게 물었다.
“혹시 지안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를 알고 있나? 삼황자 전하가 노예상에게서 구출해주었다는 여자 말이다.”
“지안이요?”
사라는 악시온의 말에 대답하려 입을 열었다. 하지만 뭐라 말하기도 전에, 일리아스의 호통이 먼저 들이닥쳤다.
“악시온 오데르겐! 이게 무슨 짓인가!”
“……삼황자 전하.”
음울하고 초췌한 낯으로 돌아보는 악시온의 모습에 일리아스는 내심 긴장했다.
북부의 공작이 곧 폭주할 것이란 소문은 2년 전부터 유명했다. 에를랑겐 후작가에서 선대 가주들 간의 약속을 깨고 혼약을 파기한 것도 그가 곧 죽을 것이라 여겼기 때문 아닌가.
그런 그가 아직 살아 있는 걸 보니. 능력의 사용을 꺼리며 끈질기게 목숨을 부지해온 듯싶었다.
공작의 입에서 지안의 이름이 나오지 않았다면, 그는 이 오판을 그대로 확신해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약속도 없이 이 무슨 무례지?”
고갯짓으로 하녀를 물린 일리아스는 초조한 심정으로 공작의 말을 기다렸다. 하녀의 말을 가로막기 전 공작이 지안을 찾는 것을 들었던 탓에 그의 용건이 무엇인지 모르지 않았다. 그걸 알면서도 내심 공작이 아무 일 아니라며 물러가 주길 바라는 마음이 구름처럼 일어났다.
그리고 또 다른 한편으론, 북부로 돌아가고 싶다던 지안의 말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 것이다. 일리아스는 흔들리는 눈으로 악시온을 노려보았다.
북부에서 한평생 벗어나지 않았던 공작이 갑작스레 황성을 찾아든 것도 그렇고, 북부로 돌아가고 싶다고 거듭 요구하던 지안도 그렇고……. 더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두 사람 사이엔 자신이 모르는 접점이 있다.
대체 지안은…… 공작과 무슨 사이지?
설마 공작은, 지안의 이능을 알고 있었던 건가? 곧 폭주할 것이라던 그가 여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건, 그간 지안의 이능을 이용해왔기 때문인가?
순식간에 떠오른 가정에 일리아스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만일 그런 이유로 지안을 찾는 것이라면 절대 내어줄 수 없다.
“전하께서 노예상을 소탕하고 그중 하나를 시녀로 삼으셨단 소문을 들었습니다. 혹시, 소문의 그 시녀가 제가 찾는 사람일까 하여…….”
“에밀리를 말하는 거군.”
일부러 다른 이름을 대자 공작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부러 엉뚱한 이름을 댔는데도, 공작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한번 간청했다.
“거짓 이름일 수도 있습니다. 가명을 댔을지도 모르니, 제가 한 번만 만나볼 수 있게 해 주실 순 없으십니까? 체구가 작고, 검은 머리의 여성입니다.”
“안타깝군. 내 시녀는 이틀 전 고향집에 방문하겠단 이유로 휴가를 썼다. 대체 내 전속 시녀는 왜 찾는 거지?”
빈정대듯 말하자 공작의 고개가 떨구어졌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바라던 대답이 나왔으나 일리아스는 굳은 표정을 풀지 못했다. 악시온의 두 눈에 차오른 좌절을 본 탓이었다. 슬픔보다는 비통에 더 가까운 공작의 모습 위로, 백작가로 돌아가라는 명을 받은 아르킨의 모습이 덧대어졌다.
“이만 물러가라. 그대의 신분을 고려해 더는 무례를 묻지 않겠다.”
일리아스는 힘없이 돌아서는 악시온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졸렬하고 이기적인 대응이었단 것은 자신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공작에게 지안의 소재를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그간 하루하루 차오른 독점욕이, 오늘 공작의 방문으로 인해 무르익은 석류처럼 터져버렸다.
애써 부정해왔지만 더는 외면할 수 없었다. 자신이 품은 이 감정은 남녀 간에나 있을 법한 독점욕이었다. 지안을 찾는 공작 덕분에 그 사실을 알았다.
‘지안을 넘겨줄 순 없어.’
멀어지는 공작의 뒷모습에 대고 일리아스는 다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지안의 머리카락 하나 드러나는 일 없도록 할 것이다. 궁의 모든 시종과 하녀들의 입단속이 시급했다.
그렇게 생각한 즉시, 일리아스는 곧장 하녀장을 찾았다.
“혹시 에밀리란 이름을 가진 하녀가 있나?”
“에밀리 말씀이십니까? 빨래터의 하녀를 왜 찾으시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있군. 이름이 에밀리인 걸로 충분하다. 당장 불러와라. 오늘부로 그 하녀를 내 전속 시녀로 삼겠다.”
일리아스의 말에 하녀장은 놀란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하녀 중에서도 가장 직급이 낮은 빨래터의 하녀를 전속 시녀로 삼겠다니? 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
“반론은 듣지 않겠다. 불러와.”
그 말을 마지막으로 일리아스는 휑하니 자리를 떠나버렸다.
하녀장은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로 에밀리를 호출했다. 어찌 되었든 황자 전하의 명이다. 황족의 명령은 절대적인 것이고, 자신은 삼황자 전하의 저의와 의도에 관해 궁금해할 필요가 없었다. 황태자 전하의 일이라면 모를까, 곧 단명할 예정인 황자 아닌가. 명한 바를 따르고 비위를 거스르지만 않으면 그만이었다.
* * *
한편, 악시온은 하늘이 무너진 기분으로 비틀거리고 있었다. 무슨 정신으로 걷고 있는지, 걷고 있는 것이 맞기는 한 건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감각할 수 있는 것이라곤 오직 새까만 어둠뿐이었다. 황성의 정원 위로 봄날의 라일락이 눈부시게 피어나고, 화창한 하늘 아래로 햇살이 따스하게 내리쬐고 있었지만 악시온이 보는 한낮의 풍경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시리고 살벌했다.
제도에서부터 들려온 두 개의 소문을 연결 지으며 직감했던 건 그저 나의 희망 사항일 뿐이었단 말인가? 내가 엉뚱하게 제도로 달려온 사이 지안은, 그녀는 여전히 북부 어딘가에 싸늘히 얼어붙어 있단 말인가? 압도적인 상실감에 눈물조차 흐르지 않았다.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다. 아버지의 말대로다. 그가 저주한 대로 되었다.
잊으려 했고, 잊은 줄 알았던 전대 공작의 음성이 생생히 들려왔다. 눈 쌓인 땅을 뚫고 지옥에서 돌아온 그가 눈앞에 있는 것만 같았다.
‘꼴 좋구나. 너도 이젠 내 기분을 알겠지.’
불현듯 들려온 음성에 악시온은 질끈 두 눈을 감았다. 절망에 휘감겨 어딘가로 질질 끌려가는 듯한 이 기분은 결코 착각이 아니리라.
순식간에 과거의 한 자락으로 떠밀린 악시온이 본 것은 일곱 살 어린아이였던 자신이었다. 깨어진 찻잔과 피를 토하며 쓰러진 어머니, 그리고 그런 어머니를 껴안은 채 울부짖는…… 전대 공작. 그의 외침이 기억을 거슬러 생생히 되살아나고 있었다.
‘내 아들이! 네가 나를 지옥에 떨어뜨리는구나! 악시온. 너는 네 어머니만 죽인 게 아니다. 그녀가 죽는 순간, 나도 함께 산송장이 되었다!’
그 절규 다음으론 또 무슨 말을 들었더라. 그래. 약과 술에 취한 채 설원에서 잠든 아버지를 기사들이 발견한 날인 것 같다. 잠에서 깬 그는 한동안 어머니를 찾다가, 나를 보고서야 어머니가 죽었단 사실을 떠올려냈다. 그러곤 이렇게 말했다.
‘네가 어서 발현했으면 좋겠구나. 그래야 너도 알 것 아니냐. 가이드를 잃는 게…… 능력자에게 어떤 일인지.’
울며 용서를 비는 건 소용없었다. 어렸고, 이용당했을 뿐이란 사실도 참작의 이유는 될 수 없었다. 어머니가, 가이드가 죽었기 때문이다. 이 일로 전대 공작은 반미치광이가 되었다.
미쳐버린 그는 언제나 나를 죽이고 싶어 했지만, 가신들의 만류로 살려둘 수밖에 없었다. 하나 바로 그 선택마저도 어머니가 남겨두고 간 유일한 흔적이기 때문이란 걸, 어린 나이에도 알 수 있었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전대 공작은 폭주했다. 자신은 그로부터 몇 달 뒤 발현하게 되었고, 가이드 없는 십몇 해를 보냈다.
가이드가 나타나리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받아야 할 벌을 받는 것뿐이었으니까. 고통이 너무 극심한 날엔 어머니가 살아 돌아오는 꿈을 꾸었지만…… 대체로 악몽으로 끝났다. 어미를 죽인 아들에게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바라는 것이 있다면 인적 없는 눈 덮인 협곡에서 조용히 생을 마무리하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지안이 나타났고, 형벌 같던 폭주의 고통이 끝났다. 마치 용서를 받은 것 같았다. 바보같이, 그런 줄만 알았다.
지안은, 그녀는 어디 있는가? 나는 왜 그녀가 살아 있을 거란 희망을 놓지 못하고 제도로 왔지? 눈 쌓인 설원에 싸늘한 시신으로 굳어 있을 그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사지가 떨리고 이성이 산산이 조각났다. 할 수만 있다면 이대로 미쳐버리고 싶었다.
차라리 폭주해버리고 싶다. 악시온은 허탈하게 웃었다.
전대 공작이 죽어가며 남긴 저주는 훌륭하게 실현되었다. 너도 나처럼 되어 보라던 그의 저주가 어떤 심정에서 나온 것인지. 이젠 알겠다.
이젠 알 것 같았다.
가이드를 잃는 게 어떤 일인지 알겠다.
그토록 조심하려고 했는데. 순간의 부주의로 어머니에 이어 지안마저 죽이고 말았다. 자신은 가이드였던 어머니에겐 독이 든 찻잎을 전했고, 지안마저 눈 쌓인 설원으로 떠밀어 보냈다. 어머니도, 그녀도 지키지 못했다.
할 수만 있다면 스스로를 목 졸라 죽여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하녀들의 재잘거림에 섞인 지안의 이름이 악시온을 일깨웠다.
“운도 좋지. 이번엔 하루아침에 황녀 전하의 전속 시녀가 됐다며?”
“그러게 말야. 이름이 지안이랬나? 웃기지도 않아, 정말. 툭 까놓고 말해서 귀족가 출신 시녀도 아니고 노예상에서 구해온 평민 여자에 불과한데 황녀 전하의 전속 시녀라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