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5화 (45/199)

45화

슬며시 운을 떼자 황녀가 화답해 왔다.

“소식이라면, 북부에 친인척이 남아 있는 거야?”

“비슷해요. 제가 제도에 있다는 걸 알릴 수 있으면 좋겠는데……. 가능할까요?”

“가능해. 지역명과 친척의 이름을 알려주면, 어디든 편지를 발송할 수 있어. 바란다면 내가 도와줄게.”

흔쾌히 수락하는 이비엔의 말에 지안은 얼른 머리를 굴렸다. 여기서 공작의 이름을 내뱉을 순 없다. 유복한 평민 여자처럼 행세해온 그간의 전적 때문이었다.

처음엔 기약 없는 시녀 노릇을 하고 있을 바에야 공작의 이름을 대 버릴까 고민했지만, 이는 결국 고민으로 그쳤다. 섣불리 공작과의 친분을 드러냈다가 소식을 전할 길이 아주 막혀 버릴지도 모른단 염려 탓이었다.

공작과의 친분을 잘못 말했다가 가이드란 사실이 들통 나버리기라도 하면 어쩐단 말인가? 그리고 설마 그러진 않겠지만, 공작이 충성심을 증명하겠다며 나를 날름 황실에 갖다 바치기라도 하면?

여러 가정과 고민 끝에 지안은 북부의 한 인물을 떠올려냈다.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적당히 순박하고 완고하며 도리에 맞는 행동을 보였던 기사.

“북부에 먼 친척인 기사님이 계세요. 이름은 헤롤드예요. 평소 왕래를 그리 자주 하진 않았지만, 걱정하고 계실까 봐 그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

“염려 마. 내일 바로 파발마를 보내 소식을 전할 수 있도록 해 줄게.”

이비엔의 말에 지안의 얼굴이 곧바로 환해졌다. 남모를 근심으로 얼룩져 있던 인상이 밝아지자 가려져 있던 미모가 새삼 빛을 발했다. 이비엔은 특유의 눈썰미로 그 사실을 알아차렸다.

이제 보니 웬만한 백작 영애와도 견줄만한 외모 아닌가. 본래도 예쁘장한 인상이었지만, 가볍게 미소 짓고 있는 지안은 놀라울 만큼 화사했다. 그간 우울한 인상을 풍겨왔던 건 북부에 자신의 소식을 전하지 못해서였나 싶을 만큼, 표정의 변화가 컸다. 북부에 소식을 전하게 되어 만족한 모양이었다.

덕분에 이비엔은 몹시 흡족해졌다.

그간 관찰한 바론, 지안은 섬약하고 예민하며 겁이 많았다. 좋게 말하면 조심성이 많고, 나쁘게 말하면 경계심이 너무 높아 다가가기 힘들다 해야 할 것이다.

거기에 더해 지안은 스스로에 대해 절대 말하는 법이 없고, 호불호조차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지안이 좋아할 만한 가게를 찾아 온종일 거리를 돌아다녔는데도 영 소득이 없었을 정도다. 그런데 북부에 소식을 전하게 해 준 것만으로도 이렇게 좋아하다니. 정답은 이거였구나!

이비엔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도 모른 채 지안은 마음 편히 술과 음식을 즐겼다. 북부에 소식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단 사실에 그만 마음이 놓여 버린 것이다.

황녀의 호의는 순수한 것이기에 귀했고, 그렇기에 함부로 이용하기 싫었지만 그 호의를 이용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북부에 소식을 보내는 건 지안에게 그만큼 중요했다. 지구로 되돌아가는 방법을 북부의 공작이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지난 몇 달간 사람을 어처구니없게 만드는 신분제 사회의 낮은 인권 취급을 몸소 겪었던 탓에 더더욱 북부행이 간절하다.

공작을 다시 만나게 된다면, 각인을 해서라도 돌아가는 방법을 캐묻고 싶을 정도다. 각인을 하면 에스퍼는 정기적인 가이딩을 받지 않아도 된다. 폭주의 위험에서 벗어나고 정신적인 안정을 찾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충분한 미끼가 될 것이다.

가이드의 역량에 따라 각인 가능한 에스퍼의 머릿수가 제한되긴 하지만…… 각인 기회를 내버리게 된다 해도 좋았다. 필요하면 애원도 불사할 수 있다. 그게 안 된다면, 공작이 죽든 말든 각인을 파괴해서라도 답을 듣고 말 것이다. 정말로 그럴 자신은 없지만, 어느 정도는 진심이었다.

맹탕 가이드란 망신 따위, 평생 당해도 좋았다. 핸드폰으로 시간을 죽이던 일상이 그립고 배달 어플과 열심히 시청해오던 동영상이 그리웠다.

아니, 사실은 그런 것들보다 본래 누렸던 자유로운 삶을 되찾고 싶었다. 익숙한 동네와 내 몸만큼이나 편안했던 침대, 자주 걸었던 거리를 다시 걷고 싶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지구에서의 내가 그립다.

걱정과 불안을 몰랐던 이전의 내가 너무도 그립다.

할 수만 있다면 에스퍼에게 위협당할 걱정 없이 삶을 영위해나갈 수 있었던 날들을 다시 되찾고 싶었다.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고 무엇도 강요당하지 않는 일상. 협회의 보호 아래 조마조마 가슴 졸일 필요 없던 평범한 하루. 그걸 되찾고 싶었다.

우습게도 매달 들었던 연구소장의 핀잔이 다 그리울 정도다. 거기까지 생각하니 기쁜 와중에도 기분이 저조해져 지안은 단숨에 술잔을 비웠다.

그런 지안의 모습에 이비엔은 깜짝 놀랐다. 그간 얌전하게만 느껴왔던 지안의 인상과 불합치하는 행동이었던 것이다.

“이런, 다시 잔을 채워야겠네. 한 번에 다 마셔버릴 줄은 몰랐는데…….”

“아. 저도 모르게 그만.”

“도수가 높지 않아서 다행이야. 조금 더 마실 테야?”

“그래도 될까요?”

냉큼 빈 술잔을 내미는 지안에게 이비엔은 흔쾌히 와인을 더 따라주었다. 만족스러운 얼굴로 와인을 홀짝인 지안은 저도 모르게 술을 품평했다.

“이 와인은 특히나 뒷맛이 좋은 것 같네요. 레몬이랑…… 석류? 살구랑 아카시아 향기도 조금 나는 것 같고. 기대 이상이에요.”

예상치 못한 질문에 이비엔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그런 걸 언급할 줄은 몰랐는데…… 술을 좋아하나 봐?”

“좋아해요. 혼자서도 종종 마시러 다녔는걸요.”

“혼자서?”

“원래 살던 곳에선 모든 게 익숙하고 안전했으니까요. 그리고 취하면 기분이 좋아지잖아요. 하루를 마무리하기에 술만큼 좋은 게 없기도 하고…….”

뭣보다 돈 많은 백수다 보니 비싼 칵테일 바에도 자주 들를 수 있었다. 아침엔 느긋하게 영화나 보러 가고, 상영이 끝나면 백화점 한번 둘러보며 신상 구경 하는 게 삶의 낙이었다. 전담 에스퍼가 없으니 협회에서 연락이 올 일도 없고, 달리 신경 쓸 것도 없었다. 말 그대로 홀가분했달까.

그러다 유독 심심한 오후를 보내게 된 날에는 주로 번화가의 술집을 찾아 혼술을 즐겼다. 와인바도 그때 특히 자주 다녔던 것 같다. 할 일은 없고 돈은 많으니 술을 즐기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다만, 뜻밖의 말을 들은 이비엔은 더욱 아리송해졌다. 북부는 날씨가 추워서 독한 술밖에 없다. 이런 고급 와인이 북부까지 유통될 리도 없거니와, 만일 유통된다고 해도 귀족이나 겨우 맛볼 수 있다. 지안은 그간 자신의 신분을 평민이라 밝혀왔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었던 건가?

쌓여가는 궁금증을 이비엔은 애써 미뤄두었다. 더 묻고 싶고 더 알고 싶은 것이 산더미지만, 욕심껏 다 물어볼 순 없다. 그랬다간 지안이 재깍 입을 다물고 말 것이다. 술에 취해 실수한 걸 알면 다시는 술을 마시려 들지 않을 수도 있었다.

조급할 필요는 없다. 지안이 자신의 신분을 숨기려 하는 데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직 시간은 많이 남아 있고, 지안은 자신의 전속 시녀가 되었지 않나.

고집스레 비밀을 움켜쥐고 있는 지안의 손을 억지로 펼쳐보고 싶진 않았다. 그랬다가 지안에게 미움이라도 받게 되면, 그거야말로 정말 큰일이 아닌가.

* * *

제도에서부터 희미하게 감도는 소문을, 악시온은 놓치지 않았다.

시작은 실마리조차 될 수 없는 작은 소식 하나였다. 노예 경매장을 급습한 삼황자가 노예로 팔려나갈 뻔한 여자들을 모두 고향으로 돌려보내 주었으며 그중 하나를 전속 시녀로 삼았다는, 그런 이야기였다.

이후로 그 여자의 외모가 얼마나 뛰어나기에 황자 전하께서 직접 전속 시녀로 발탁한 거냐는 소문이 한동안 시장 바닥을 나돌았다. 신분 모를 평민 여자가 하루아침에 황성의 시녀가 되는 행운을 거머쥔 탓이었다.

이처럼, 시작은 귀 기울일 필요도 없는 가십거리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 소문에 뒤이어, 제도의 능력자들이 집단을 이루어 황성에 침입하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표면적으론 반역을 시도한 능력자들이 벌인 짓으로 공표되었지만, 얼마 살지도 못하는 이들이 권력과 영화에 무슨 미련이 남아 그런 짓을 벌이겠는가?

능력자들의 이상행동. 갑작스레 시녀로 발탁된 의문의 여자.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황성에, 지안이 있다. 악시온은 직감적으로 이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북부 전역을 수색하던 걸 멈추고 곧장 제도로 향한 건 바로 이 탓이었다.

그녀가 머무는 장소가 황성이란 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간 시신이나마 찾기 위해 두껍게 쌓인 눈을 걷어낼 때마다 한발 한발 지옥을 오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부주의로 지안을 잃고 말았단 사실이 참담해서 감히 오열조차 할 수 없었다. 슬픔이나 공포를 느낄 염치조차 자신은 가져선 안 되는 것이다. 그런 와중에 포착하게 된 이 소문은 악시온이 간신히 부여잡은 실낱같은 생명선이었다.

어쩌면 지안이 무사히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반드시 그래야 한다. 소문이 사실이라면 지안은 살아 있는 것일 테고, 그걸로 충분했다. 그녀가 북부의 추위에 스러지지 않았단 것만으로도 죽었던 심장이 다시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삼황자와 그 시녀를 둘러싼 소문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사실이라면 차라리 다행이었다. 지안이 노예로 팔려갔거나 약에 취한 하급 능력자들에게 붙들리지 않은 것만 해도 어딘가. 황성에 지안이 있다고 생각하니 도리어 안심할 수 있었다.

초조함으로 타들어 가는 심장을 부여잡은 채 악시온은 스스로를 재촉했다. 북부에서 제도까지 한달음에 이르는 동안 혹사를 이기지 못한 말이 몇 마리나 죽었지만, 말의 체력을 안배할 정신 따위 있을 리가 없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악시온의 뒤를 따르던 헤롤드와 북부의 기사들은 공작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 저 멀리 뒤처지고 말았다.

허겁지겁이란 말조차 무색할 만큼 서둘러 제도 파가디안에 도착한 악시온은 앞뒤 생각할 겨를 없이 황성으로 향했다. 먼저 폐하를 알현해야 한다거나, 입성하는 데 필요한 여러 사전 절차들 같은 건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처음부터 무슨 정신으로 제도에 당도했는지 모를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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