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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화 (43/199)

43화

“뭐, 뭐야? 대체 언제…….”

놀람도 잠시, 지안의 눈이 빠르게 방 안을 좌우로 훑었다. 벽면엔 미술품이 즐비하고 가구 역시 하나같이 고가품이다. 까마귀 발톱에 뭐 하나 찍히기라도 하면 졸지에 배상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지안은 닫았던 테라스를 다시 열며 투덜거렸다.

“빗자루를 찾아야 하나?”

“빗자루는 왜? 날 쫓아내려고?”

들려선 안 되는 목소리에 지안은 창문을 열던 자세 그대로 굳어버렸다. 순식간에 나타난 파동이 뒷덜미와 등을 찔러댔다. 이런 현상이 가능한 건 이동 능력을 지닌 에스퍼뿐이다!

지안은 움직이지 않는 목을 겨우 돌려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뺨 위로 남자의 머리카락이 커튼처럼 드리워졌다. 언제 이렇게 가까이 다가온 거지? 위험스러운 미소를 띠고 있는 아론의 모습에 지안의 두 눈 위로 작은 파문이 일었다.

비명을 지를 틈은 없었다. 뭔가 하기도 전에, 뭐든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전에 커다란 손이 입술을 턱 막아왔으니까.

“쉿. 조용히. 해칠 생각은 없어. 그냥 보고 싶어서 온 것뿐이거든.”

파들거리는 지안의 모습에 아론의 미소가 짙어졌다.

“너무 겁먹지 마. 조만간 매일 보게 될 텐데.”

매일이라니? 설마 지금, 날 챙겨서 이동하려는 건가? 지안은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아론의 손을 콱 깨물었다. 찝찔한 피 맛이 입술을 타고 들어왔지만 턱밑까지 차오른 위기감 탓에 그런 걸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아론을 거칠게 밀쳐낸 지안은 목청껏 소리 지르며 테라스로 달려 나갔다.

“헉!”

하지만 테라스로 막 발을 디딘 순간, 공간이 반전되어 버렸다. 테라스로 나오긴커녕 달리던 그대로 아론의 가슴에 머리를 박고 만 것이다. 믿을 수 없었으나 정말로 다시 방 안이었다. 지안은 창백해진 얼굴로 주먹을 그러쥐었다. 압도적인 무력감 외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눈앞의 남자는 에스퍼다. 그것도 이동 능력을 지닌 에스퍼. 게다가 방금 보여준 능력을 생각하면…… 이 일대의 공간은 그의 손아귀에 놓여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차오르는 두려움을 외면하며 최대한 상대의 특성을 파악해내려던 지안은, 턱을 잡아 올리는 손길에 고개를 들어야 했다.

“어딜 가시나.”

지긋이 내려다보는 붉은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하자 귀 옆에 심장이 붙은 것처럼 온 사방이 쿵쿵거렸다. 의식적으로 차단하고 있던 가이딩이 순간 느슨해질 정도로 무서웠다.

처음 이 남자와 마주쳤던 날, 무슨 정신으로 남자를 붙잡고 가이딩을 해 버렸는지 모를 정도로 겁이 났다. 입술 위로 남자의 손가락이 문질러지는 것조차 인식할 수 없었다. 그저, 두려움이란 이름의 늪에 빠진 것처럼 온몸이 굳었다.

이토록 극심한 위기감이 엄습해오는 건 이 남자와 같은 이동 능력자로 인해 겪은 고난 탓일까? 다시 길을 잃고, 안전한 장소에서 멀어지나? 또다시 노예상 같은 야만적인 사람들과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그건 한 번으로도 충분히 끔찍한 경험이었다.

콰앙!

별안간 들려온 굉음에 지안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소리의 방향으로 보건대, 삼황자의 침실과 연결된 문이 열린 게 틀림없었다.

비명을 지른 걸, 전하가 들었구나! 반가운 마음에 지안은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틀려 했다. 하지만 단단히 턱을 잡은 남자의 손이 움직임을 가로막았다.

“날 봐야지.”

그 말과 함께 입술 위로 부드러운 것이 닿았다. 송두리째 삼켜지는 듯한 기분은 단순한 착각이 아니었다.

부릅뜬 지안의 눈동자 위로 아론의 눈웃음이 새겨졌다. 그리고 귓전으로는 분노한 삼황자의 외침이 고막을 찔러왔다.

“지안!”

* * *

침을 뱉고 양치질을 했다. 몇 번이나 입을 헹궜지만, 입술 위에 남은 끈적한 감각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근래에 노예상에게 붙잡혔던 걸 제외하면 이렇게 불쾌하고 서러운 일이 있었던가?

없었다.

지안은 부득 이를 갈았다.

“짐승 같은…….”

그런 짓을 내게 하다니!

처음 만났을 때도 느꼈지만, 사람을 조롱하는데 타고난 쓰레기인 듯싶었다. 노예 경매장에 참석한 것만으로도 그 인간성을 알 만하다. 그따위 에스퍼를 상대로 겁먹었단 사실에 울화가 터질 지경이었다. 차라리 저번처럼 가이딩이라도 할걸!

황성이란 안전지대에서 벗어나게 될까 봐 두려웠고, 그 탓에 겁을 먹은 게 한탄스러웠다.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일을 두려워한 거란 걸 아는데도 한껏 자괴감이 밀려들었다. 순간이나마 용기가 말소되었단 사실이 수치스럽고, 무력감을 느끼게 한 그 에스퍼에게 화가 났다. 이곳 세상에 존재하는 에스퍼들에게 가졌던 애매한 연민이 송두리째 박살 나는 것 같았다.

재차 세수하고 양치질을 했는데도 더러운 기분이 가시질 않았다.

흐트러진 감정을 간신히 추스르고 욕실에서 나온 지안은, 자신만큼이나 흐트러져 보이는 삼황자와 방긋 웃고 있는 황녀를 보게 되었다. 뭐지? 삼황자 전하는 그렇다 쳐도, 황녀 전하는 갑자기 왜 이곳에?

의문은 곧바로 해소됐다.

“황녀의 궁으로 가라.”

“……무슨 말씀이세요?”

“상대는 이동 능력자고, 너와 내가 한방을 쓰는 건 온당한 일이 아니지. 놈이 붙잡힐 때까지…… 이비엔과 지내는 게 좋겠다.”

이해할 수 없는 말에 지안의 고개가 갸우뚱 기울었다. 그 모습에 황녀가 설명을 덧붙였다.

“이런 거야 지안. 상대가 이동 능력자라면, 네가 잠든 사이 납치당할 수도 있는 일이잖아? 그렇다고 오라버니와 한방을 사용할 수도 없고 말이야. 하지만, 나는 입장이 다르지.”

“그 말은…… 제가 황녀 전하와 함께 생활하게 된다는 건가요?”

“침대도 이미 들여놨어. 이제부턴 내 전속 시녀가 되는 거야, 지안.”

이비엔의 말에 일리아스가 사납게 반박했다.

“누가 네 전속 시녀란 거냐. 착각하지 마라, 이비엔! 지안을 맡기는 건…… 놈이 잡힐 때까지만이다.”

이비엔은 일리아스의 엄포를 가볍게 무시했다. 지안의 안전이 걱정된다며 부탁할 땐 언제고……. 이비엔은 코웃음 치며 곧장 지안을 챙겨 갔다. 이제 더는 삼황자궁에 볼일이 없었다.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 * *

짐을 챙길 겨를도 없었다. 황녀궁에 도착한 지안은 목욕 후 옷을 갈아입고 황녀의 침대 옆에 마련된 자신의 침대를 찾았다.

침대를 들여놓았다는 말, 솔직히 믿지 않았는데 정말로 침대가 마련되어 있을 줄이야.

지안은 쓰러지듯 침구 위로 몸을 던졌다. 푹 꺼지는 이불은 솜사탕처럼 푹신했고, 섬세히 직조된 섬유에선 희미한 햇볕 냄새가 났다. 긴장이 풀린 채 엎드려 있으니 잔뜩 들쑤셔진 마음이 조금이나마 진정되는 것 같았다.

눈을 깜빡이자 황녀의 희미한 미소가 보였다. 그제야 방 주인에게 형식적인 인사치레도 하지 못했단 사실이 생각났지만, 눈꺼풀이 너무 무거웠다. 시야가 가물거리며 좁혀졌다.

“잘 자.”

까무룩 정신을 잃는 지안의 모습에 이비엔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지안이 넝쿨째 굴러들어와 자신의 방에 있다니. 두 눈으로 보고도 꿈을 꾸는 것 같았다. 금화로 탑을 쌓을 때도 느끼지 못했던 기쁨이 이비엔의 심장을 관통했다.

첫인상부터 호감이었다. 발현한 이능을 제어하지 못해 주변을 사정없이 파괴하던 자신을 진정시키고 달래 준 사람이 아닌가.

아직도 지안이 부드러운 손길로 등을 토닥여 주던 순간이 잊히질 않았다. 심장에서 힘차게 생동하는 감정은 바로 그 순간 탄생했다. 봄을 맞은 나무가 꽃을 피우고 땅속에 잠들어 있던 씨앗이 눈뜨는 것처럼, 흙 아래로 뿌리내린 이 호감은 결코 거두어지는 일 없을 것이다.

이비엔은 작게 감탄했다. 사교계의 생리를 배우기 시작한 이후로 누군가를 이렇게 진심으로 좋아해 본 적이 언제였던가.

색색거리며 잠든 지안을 바라보던 이비엔은 이불을 끌어와 지안에게 덮어 주었다. 누군가를 보살핀다는 게 이렇게 기분 좋은 일일 줄이야. 여자로 태어나 다행이었다. 덕분에 마찰 없이 지안을 독차지할 수 있게 되지 않았나.

솔직한 심정으론, 겁 없이 지안을 납치하려 했다는 능력자에게 포상이라도 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정말 지안을 납치했다면 어떻게든 찾아내 찢어 죽였을 테지만…… 지안은 여기 있다. 내 궁, 내 침실에. 손을 뻗으면 곧장 닿을 거리에 잠들어 있었다.

그 사실이 몹시 기꺼워 이비엔은 생글거리는 얼굴 그대로 곧장 잠을 청했다. 어린아이가 된 것마냥 설레어 잠이 오지 않았고, 몇 번이나 감았던 눈을 떠 지안의 모습을 확인해야 했지만 불만은 없었다.

전속 시녀란 명목으로 데려오긴 했으나 정말로 지안을 시녀처럼 대할 생각은 없었다. 날이 밝으면 새로 드레스를 맞추고, 함께 제도의 디저트 가게를 돌아볼 것이다. 그간 궁에 갇혀 지내온 지안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해야 할 일이었다.

바보 같은 오라버니처럼 지안을 궁에 가두기에 급급하진 않을 것이다. 사람의 환심을 사는 법이라면 누구보다 더 자신 있었다. 그간 제국 유일의 황녀로서 사교계를 아우르며 물질, 권력, 명예로 사들인 사람이 어디 한둘이던가.

여기에 더해 황녀란 지위를 이용하면, 얻지 못할 사람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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