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너무 아쉬워하지 마시죠. 제도에 널리고 널린 게 약을 찾는 능력자 아닙니까. 여기. 최근에 길드에 다녀간 능력자 명단입니다.”
“내 착각이 아니라면, 이전보다 이름이 적은 것 같군. 이게 전부인가?”
“소문 때문입니다.”
“소문?”
“알고 계신 줄 알았는데요. 최근에, 황성에서 난리가 났잖습니까.”
파비안의 말에 아론은 모른 척 되물었다.
“능력자들이 황성에 침입한 것 말이로군.”
“맞습니다. 황성에 폭주를 막는 능력자가 있다더군요. 뭐, 죄다 삼황자에게 죽었으니 소문의 진위는 아무도 모릅니다만…… 덕분에 중독성 진통제를 찾는 능력자가 조금 줄었습니다.”
“그 소문, 틀어막아.”
“네?”
“더는 퍼지지 않도록 하란 말이야.”
갑자기 왜 소문을 막으라고 지시하는 걸까. 파비안은 가늘게 뜬 눈으로 아론을 바라보았다.
“그런 지시를 하시는 걸 보니 소문이 사실인 모양이군요?”
“하하, 파비안. 쓸데없는 질문 마.”
생글 웃으며 대답하는 아론의 모습에 파비안은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반미치광이인 길드장의 지시다. 거슬러서 좋을 것이 없었다. 만일 자신이 일반인이 아닌 능력자였다면 아마 이 질문을 꺼낸 순간 저 미친 길드장에 의해 목이 달아나지 않았을까?
사실에 가까운 짐작을 하는 파비안에게 아론이 물었다.
“저택의 공사는 어디까지 진행됐지?”
“대부분 다 마무리되었다고 들었습니다만, 특별히 따로 주문하신 침실 때문에 시일이 지체되는 중입니다. 출입구를 은폐해야 하는 데다 방 하나를 온전히 철판으로 감싸야 하는 작업이라 완공이 쉽지 않은 모양입니다. 최소한 2주는 더 걸릴 거라더군요.”
“침실이 완공되고 나면…… 작업자들 모두 처리하는 게 좋겠군.”
“네?”
“내 저택에 그런 비밀의 방이 있다는 게 드러나면 안 되거든.”
아론의 지시에 파비안은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조치하겠습니다. 달리 명하실 것은?”
아론은 대답 대신 눈짓으로 파비안을 물렸다.
어둠과 적막 속에서 아론은 틀어져 버린 계획을 몇 번이고 되돌려 회상해 보았다. 품 안에 답삭 안겨 온 온기가 아직도 가슴팍 어림에 남아 있는 듯했다. 할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해 주겠다던 귀여운 외침을 다시 한번 듣고 싶었다.
그러나 납치는 실패했고, 지안은 그의 품이 아닌 황성에 있었다. 결정적인 순간 삼황자가 일으킨 이능이 자신의 이능을 막아냈기 때문이었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훔치는 거라면 늘 자신 있었는데. 그 여자만큼은 훔쳐내기가 퍽 까다로웠다.
노예 경매장에서도, 황성에서도 거듭 실패했지만, 아론은 낙심하지 않았다. 결국엔 지안이 자신의 손에 들어올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손에 넣어왔다. 뒷골목의 고아에서 길드의 수장이 되기까지, 아론은 단 한 번도 원하는 것을 쟁취하지 못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는 예상하지 못한 일의 연속이었다. 만달렌을 집어삼키려던 계획은 실패로 끝났고, 납치 역시 미수에 그쳤다. 평소라면 속이 비틀려도 백번은 더 비틀렸을 만한 일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다만 이상한 건, 이렇게 일이 망쳐지고 있는데도 그다지 화가 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파비안 다음으로 유능했던 에길을 단순 꼬리 자르기용으로 희생시켜야 했음에도 어쩐지 분기가 솟아오르지 않았다. 온 신경이 여자 하나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아론은 노예 경매장에서 들었던 여자의 이름을 중얼거려 보았다.
“지안……이랬던가.”
중얼거리며 아론은 붕대에 감긴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잠시라도 잊어보려 했지만, 지안의 놀란 얼굴과 그녀의 두 손이 내어준 감각이 도무지 잊히지 않았다. 화상이 주는 쓰라림보다 황홀과 격통이 겹쳐오던 그녀와의 접촉이 더 선명했다.
정의 내릴 수 없는 해방감과 알 수 없는 안도감이 전신을 감싸던 그 순간을 어떻게 잊을까. 그 감각에 고통이 동반된다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발작처럼 찾아드는 폭주의 전조현상 앞에선 사소한 결점일 뿐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아론은 밀린 일을 처리하듯 말린 이파리를 소량 씹어 삼켰다. 강한 중독성과 환각을 일으키는 대신 진통 효과만은 무엇보다 확실한 약이었다. 여태까진 그렇게 믿었다.
그러나 잠시 맞잡았던 그녀의 손을 떠올리면……. 이건 그저 싸구려 진통 효과를 내는 잡초에 불과할 뿐이다. 버석대는 이파리의 조각이 불쾌한 감각으로 혀 위에서 뒹굴자 여자가 더욱 간절해졌다. 지안이 제 곁이 아니라 황성에 남아 있다는 사실에 손이 다 떨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아직 저택이 완공되지 않았다. 아론은 초조함을 달래려 애쓰며 쓴맛이 남은 입 안을 헹궜다.
첫 시도가 실패에 그치긴 했지만, 자신은 다중 능력자였다. 개중에서도 쏠쏠하게 써먹어 온 이동 능력이 있기에 아론은 지안을 언제든 황성에서 빼돌려낼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자신의 능력이라면 능히 그러고도 남았으므로.
하지만 이토록 자신하면서도 조바심이 생기는 건 어째서일까. 까마귀의 눈을 빌려 틈틈이 감시하는 것만으론 부족했다.
“지안…….”
허기인지 갈증인지 구별할 수 없는 강렬한 이끌림. 겨우 두 번 만났을 뿐인데도 빨아당기는 듯한 끌림이 이성과 본능을 동시에 충동질하고 있었다. 끓어오르는 충동을 참으며 그녀를 관찰하고 있노라면, 식욕인지 성욕인지 구분할 수 없는 감각마저 종종 촉발되곤 했다. 그간 무수한 여자를 보고도 일지 않았던 욕구였다.
그렇기에 더욱 신기하고 호기심이 이는 것이다.
아론이 알기론, 자신에게서 이러한 반응을 끌어낸 사람은 지안이 처음이었다. 처음엔 단순히 폭주를 가라앉혀줄 도구로 생각해왔는데……. 관찰하면 할수록,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는 검은 눈동자가 잊히질 않았다. 지글거리며 튀어 오르는 소유욕에 눈앞이 새까맣게 불타는 듯했다.
아론은 지안의 얼굴을 핥듯이 떠올리다 말고 까마귀를 황성으로 날려 보냈다. 그녀의 얼굴을 끝없이 머릿속에 그려보는 것보단,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다.
사실, 최근에 이르러선 매일같이 황성에 까마귀를 날려 보내는 것이 삶의 낙이요, 재미였다.
그간 황성을 왕복한 경력이 상당해진 아론의 까마귀는 곧바로 지안의 침실을 향해 날아갔다.
지안의 거처에 당도하기까진 금방이었다. 그녀의 거처가 삼황자의 침실 바로 옆이란 사실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옮겨진 거처의 창문이 나무가 아닌 유리인 것만은 좋았다. 투명하고 깨끗한 유리 너머로 지안을 맘껏 훔쳐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차림새만 보면 황성의 여느 시녀들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는데. 열중해 수를 놓는 평범한 옆모습에서 도무지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조금 더 가까이서 보기 위해 까마귀를 테라스에 내려 앉힌 아론은 순간 지안과 시선이 마주쳤다. 표정을 보니 날갯짓 소리에 집중이 깨진 것 같았다. 이미 테라스 난간에 내려앉은 터라 다시 날아가기도 우스웠다.
빤히 바라보고 있자 수 놓던 것을 내려놓은 지안이 다가와 테라스로 향하는 난간을 열었다.
“황성에 새 둥지가 있나? 까마귀가 자주 보이네…….”
순진한 추측에 아론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까마귀의 구강구조가 사람의 웃음을 흉내 낼 수 없어 퍽 애석했다.
“마침 오늘 주방에서 얻은 육포가 있는데…… 먹으려나?”
지안이 주섬주섬 앞주머니에서 육포를 꺼내 들자 아론은 얌전히 육포를 받아먹었다. 내심 까마귀가 날아가 버릴 거라 예상했던 지안은 신기한 얼굴로 까마귀의 머리깃을 쓸어내렸다.
“사람을 피하지 않네? 아무래도 사람 손을 탄 까마귀인가 본데…… 네 주인은 어디 있니?”
조잘거리는 지안의 모습을 눈에 담으며 아론은 말귀 못 알아듣는 날짐승의 흉내를 냈다. 짐승의 모습을 하고 있으면 이런 게 편하다. 방심한 상대가 흘리는 말을 주워들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지안은 말은 거기서 더 이어지지 않았다. 바로 옆 테라스의 문이 열리며 삼황자가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밤중에 테라스에서 대체 뭘 하고 있는 거냐. 말소리가 내 방까지 다 들린다.”
실은 내내 지안의 기척에 집중하고 있다가 창 너머 테라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걱정이 되어 나와본 것이었지만, 일리아스는 그런 속내를 조금도 드러내지 않았다. 덕분에 지안은 무안해진 얼굴로 볼을 붉혔다.
“아…… 죄송합니다, 전하. 시끄러운 줄 몰랐어요.”
시끄러웠던 건 아니다. 그저 신경이 쓰였을 뿐이다. 저도 모르게 다그치듯 말해버린 걸 후회한 일리아스는 육포를 입에 문 까마귀를 보고서 슬며시 미간을 찌푸렸다. 고기를 좋아한다길래 주방에 언질해 간식으로 챙겨준 것인데, 본인 먹으라고 준 것을 짐승에게 낭비하고 있을 줄이야.
“……육포가 입에 맞지 않나?”
“네? 그럴 리가요. 굉장히 맛있는데요.”
“그런데 왜…….”
말하려다 말고 일리아스는 입을 다물었다. 무슨 말을 하든 볼품없을 것 같아서였다.
“됐다. 밤이 늦었으니 그만 들어가서 자라. 그리고 테라스엔 되도록 나오지 마. 함부로 나와 있다가 저격이라도 당하면 어쩌려고 그러는 거냐.”
누가 나를 저격씩이나 한단 말인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지안은 차마 반박할 수 없었다. 못마땅한 충고이긴 했으나, 에스퍼들이 황성에 집단으로 침입해온 걸 생각하면 삼황자의 걱정은 당연한 것이었다.
노예 경매장에서 방사 가이딩이란 미친 짓을 벌인 건 자신이고, 그 뒷수습을 하게 된 건 삼황자다. 양심 때문에라도 순순한 태도를 보임이 옳았다. 게다가 그간의 경험상, 반박해봤자 좋을 것 없었다. 지안은 얌전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전하의 말씀이 옳아요. 그럼 전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편히 주무시길.”
서둘러 인사한 지안은 테라스의 문을 걸어 잠갔다. 삼황자가 뭐라고 한 것 같았지만, 모른 척했다. 밤중에 핀잔 섞인 잔소리를 듣는 선 사양이다.
몸을 돌리려던 지안은 다음 순간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언제 들어온 건지, 방금 전 육포를 나눠줬던 까마귀가 방 안에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