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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화 (41/199)

41화

맞받아치듯 샐쭉하게 웃어 보인 이비엔은 보란 듯 지안을 졸랐다.

“지안. 그거 다 만들고 나면 내 것도 만들어줘.”

“전하의 것을요?”

“응. 만들어 줄 거지? 그래 줄 거지?”

칭얼대며 매달려오는 황녀의 모습에 지안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치근대는데도 밉지 않다니 신기한 노릇이다. 에스퍼들이 치근거리면 대개 꺼려지기 마련이라던데, 황녀는 동성이라 그런지 그런 것도 없었다. 그냥, 없던 동생이 갑자기 생긴 것 같은 기분이랄까.

“물론이죠. 전하 것도 만들어 드릴게요.”

“정말?”

“네. 이름 옆에 수놓을 꽃으론 뭐가 좋으세요?”

지안의 대답에 이비엔은 종알종알 후원에 핀 꽃들을 나열했다.

자매처럼 정담을 나누는 지안과 황녀의 모습은 분명 보기 좋은 광경이었으나, 그 모습을 보고 있는 일리아스의 심기는 그리 편치 못했다.

보란 듯 지안의 환심을 사고 있는 이비엔이 이렇게 얄미울 줄이야. 게다가 뭐? 누구의 이름을 수놓는다고?

뿌득―

작게 이가는 소리에 한참 바느질에 열중하던 지안이 고개를 들었다. 뭔가, 딱딱한 게 마찰하는 소리를 들었던 것은데…… 내가 잘못 들었나? 고개를 갸웃하는 지안의 모습에 이비엔은 티 나지 않게 입술을 깨물었다.

지안이 고개를 들자마자 언제 이를 갈았느냐는 듯 서류에 집중하는 척하다니. 늘상 고고하게 굴던 오라버니가 보인 촌극에 금방이라도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

차마 분노를 드러내지 못하고 감정을 삭이는 일리아스의 모습을 이비엔은 한껏 비웃었다.

* * *

새 찻잎을 가져오란 핑계로 지안을 집무실에서 물린 일리아스는 지안이 나가자마자 본색을 드러냈다.

“내 시녀에게 격의 없이 굴지 마라. 황녀답지 못하다.”

“어쩌란 건지 모르겠군요. 제게 도움을 요청한 건 오라버니시잖아요?”

이비엔의 말대로, 갑자기 황녀궁에 찾아와 지안의 말벗이 되어 달라고 요청한 건 일리아스였다. 나날이 어두워지는 지안을 보다 못해 황녀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삼황자궁 출입이 가로막혀 있던 이비엔에겐 더할 나위 없는 기회였다. 더는 지안에게 전속 시녀직을 제안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야 했지만, 지안을 자유롭게 만날 수 있게 된 것만 해도 어딘가.

그간 지안을 만나기 위해 하녀로 변장해 삼황자궁에 잠입하다 번번이 들켰던 걸 생각하면, 불만스럽긴 해도 오라버니와 거래하는 게 나았다.

“나는 오라버니의 요청에 충실해 준 것뿐인데. 왜 그걸 지적하는지 모르겠네요. 말벗 사이에 무슨 격의가 있다고……. 그리고 황자답지 못한 건 오라버니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지안에게 침실 옆의 방을 내어주다니. 그게 사교계에 어떻게 보일지 생각은 하고 내린 결정이신지?”

신랄한 이비엔의 지적에 일리아스의 미간이 종잇장마냥 구겨졌다. 세간의 이목이 삼황자궁에 집중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지안을 노리는 놈들이…… 제도에 아직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최대한 가까이 있어야 보호하기 용이해.”

“뭐 그러시겠죠. 하지만 지안은 불편해하는 눈치던데요.”

“안전을 위해 감수해야 하는 일도 있다.”

“흥. 그렇게 안전을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아르킨은 왜 내쫓은 거죠?”

“그건…….”

“지안은 아르킨을 찾는 걸 보았을 텐데 뻔뻔도 하지. 질투에 눈먼 오라버니가 기사단장을 아예 해임해버린 걸 알면 깜짝 놀라겠군요.”

“닥쳐라, 이비엔.”

“어머 무서워라.”

하나도 겁먹지 않은 표정으로 이비엔이 느물거렸다.

“늘상 이런 식이니 지안이 오라버니를 불편해하는 거예요. 이렇게 말투가 사납고 퉁명한데……. 어느 여자가 오라버니를 좋아하겠어요?”

“…….”

“뭐, 저로선 한결같은 그 태도가 고마울 뿐이네요. 덕분에 지안이 오라버니보다 저를 더 의지하게 된 것 같거든요. 말주변 없어, 여자가 뭘 좋아하는지도 몰라, 지안도 매일 인상만 쓰고 있는 오라버니보단 저를 더 편하게 여기고 있을걸요. 아, 이미 그런가?”

잔뜩 약 올렸지만, 이비엔의 예상과 달리 일리아스는 버럭 소리 지르지도, 화를 내지도 않았다.

“네 말대로 나는 천성이 사납고,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불친절하지.”

담담한 인정에 이비엔의 얼굴이 굳었다. 뭐지? 난 이런 반응을 기대하고 한 말이 아니었는데?

영문을 몰라 하는 이비엔에게 일리아스가 말했다.

“하지만 능력자라면 대부분 나와 같거나 비슷할 거다.”

“하아? 핑계가 너무 성의 없는 것 아닌가요?”

“너는 능력자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능력자들이 어떤 취급을 받는지 잘 모를 법도 하지. 마침 황태자 전하의 생일 연회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기다려 보아라. 그때가 되면 너도 알게 될 거다. 발현이 어떤 것인지. 그것이 네 인생을 어떻게 바꿔놓을지 말이다.”

걱정과 경고가 섞여 있는 일리아스의 말에 이비엔은 작게 코웃음 쳤다. 더 듣지 않아도 오라버니가 뭘 말하려는지 알 것 같았다.

능력자가 된 귀족이나 황족은 결코 사교계의 주류가 될 수 없으며,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배척의 대상이 된다. 황녀로서 사교계를 주름잡아온 이비엔은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눈앞의 오라비 역시,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여러 귀족 가문을 견제할 장기말로 낙점되지 않았나.

하지만, 그게 내 일이 될 거라고? 그럴 리 없다. 이비엔은 새침한 얼굴로 반박했다.

“이능을 발현한 이들이 알게 모르게 배척당하는 걸 말씀하시는 모양인데, 전 어릴 적에 발현한 오라버니와 달라요. 사교계에 쌓아둔 제 입지가 얼마나 두터운지 오라버니는 잘 모르시겠죠. 이해해요. 그간 사교계를 등져오셨으니 각 가문의 영식과 영애들에게 제가 어떤 의미인지 모르실 법도 하죠.”

“……네가 그간 쌓아온 입지가 하루아침에 사라지진 않겠지. 하지만 그것도 아주 잠깐일 거다. 능력자가 이룬 교류와 친분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너도 곧 알게 되겠지. 사교계에서의 입지? 장담하건대 시간이 갈수록 물 만난 설탕처럼 녹아 사라질 거다.”

일리아스의 확언에 이비엔은 혼란스러운 눈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왠지 반박하기가 어려웠다.

* * *

화상으로 두 손에 둘둘 붕대를 감는 처지가 되었지만, 그것은 조금도 아론의 즐거움을 막아서지 못했다. 그는 근래에 이렇게 심장이 떨린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설렘과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었다.

이 같은 일이 가능해진 것은 황성에서 접촉한, 지안과의 두 번째 만남 때문이었다. 아직도 그녀가 한 말이 기억났다.

‘가엾어라.’

가엾다니? 대체 누가 가엾다는 말인가? 빈민가의 어린아이로 살던 때에도 그런 말은 듣지 못했다. 자라서 제도의 뒷골목을 꽉 쥐게 된 이후론 더더욱 이러한 평가와 멀어졌다. 피식 웃어버린 아론은 제도 파가디안의 대로를 가로질렀다. 걸을 때마다 손바닥이 쓰라렸지만, 화상의 고통보다는 지안을 황성에서 빼돌리지 못했단 사실이 더 아쉬웠다.

그러나 그 아쉬움마저도 결과적으론 즐거움이 되는 것이다.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황홀했던 그 감각. 두 손이 모조리 불타도 좋았던 그 희열을 다시 한번 맛보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무리다. 제도의 중앙 광장에 도착한 아론은 애석한 얼굴로 효수대에 높이 내걸린 머리를 올려다보았다.

까마득한 효수대 위에는, 스물이 넘는 머리와 그것을 쪼아먹으러 모인 까마귀 떼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아론은 저들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함께 황성에 잠입할 계획을 세웠던 만큼, 인상을 기억해두었던 것이다. 하지만 모두 죽었으니 더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애초에 얼굴을 기억한 것도 지안을 얻고 난 이후 모조리 죽여버리기 위해서였다. 삼황자가 대신 그 일을 해 준 덕분에 손쓸 일이 하나 줄어든 것뿐.

아론은 처참한 표정을 한 머리들을 올려다보며 지안이 자신에게 행했던 능력을 떠올렸다.

“아무 어려움 없이 데려갈 수 있을 거라 여겼는데…….”

기실, 삼황자가 만들어낸 불꽃보다도 그녀와의 접촉으로 인한 고통이 더 큰 걸림돌이었다. 쓴 약이 몸에 좋듯이 고통받은 만큼 폭주에서 멀어질 수 있었지만…… 행동에 방해가 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소소한 방해 따윈 아무래도 좋다. 그녀가 뭔가 하기 전에 이동해버리면 그만인 일 아닌가. 미증유의 힘을 가진 그녀가 머물 새장이 완성되지 않아서 그렇지. 새로 구입한 저택의 단장이 끝나면 바로 데리러 갈 생각이었다.

삼황자의 방해만 없다면 아론은 언제든지 지안을 황성에서 빼돌릴 수 있었다. 마음먹는 즉시, 당장에라도 가능했다. 계획 같은 걸 세울 필요도 없다. 진열대에 놓여진 물건을 집어 오듯 그녀를 챙겨 이동 능력을 사용하면 되는, 숨 쉬듯 간단한 일인 것이다.

효수대에 내걸린 얼굴을 모두 확인했으니 더는 중앙광장에 볼일이 없었다. 광장을 벗어난 아론은 곧장 자신의 길드로 향했다.

복잡하고 어두운 뒷골목을 빙빙 돌아갈 필요 따윈 없었다. 아론은 광장의 인파 속으로 들어가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 * *

길드에 도착한 아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한 장의 단출한 보고서였다. 확인을 마친 그는 보고서를 불태우며 말했다.

“드디어 공작이 상인들을 놓아주기로 한 건가?”

그 질문에 밤까마귀 길드의 부길드장, 파비안이 답했다.

“카빌은 행방불명이고, 꼬리를 자르기 위해 에길과 그 수행원도 모두 죽였으니까요. 남은 상인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자들뿐입니다. 아무리 조사해봐도 나오는 게 없으니 공작이라고 별수 있겠습니까? 증거가 없으니 놓아줄 수밖에요.”

“괜히 북부의 경계심만 잔뜩 돋워 버렸군. 그런데 파비안. 내가 궁금한 건 상단행이 다시 정상으로 되돌아갔느냐 하는 게 아니라 실패 원인이야. 카빌은 우리 길드가 구한 능력자 중에서도 꽤 귀한 능력을 지닌 놈이었다고. 약에 절여서 우리 입맛대로 써먹게 된지 얼마 안 됐잖아?”

“약쟁이 능력자가 더는 약을 찾으러 오지 않는다면, 이유는 하나뿐이잖습니까. 계속해서 소재를 파악 중이긴 합니다만 아무래도 폭주한 것 같습니다.”

“……별로 써먹지도 못했는데 아깝게 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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