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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화 (39/199)

39화

앞만 보고 달려 나가던 지안은 누군가의 가슴에 그대로 얼굴을 박았다. 흑안에 적발을 한 남자는 황성의 기사들이 입는 복장을 하고 있었다. 가슴의 인장 역시 그가 삼황자 직속 기사단의 일원임을 밝히고 있었다. 지안은 그대로 그에게 매달렸다.

“도, 도와주세요!”

“진정하고 무슨 일인지 차근차근 설명해보십시오.”

“침입, 침입자가, 저를 지키던 기사님을……. 기사님. 그래, 기사님이 공격당하고 있어요! 가서 도와야 해요!”

“그거 큰일이군요. 하지만 맨입으로는 도와줄 수 없는데……. 도와주면, 제게 뭘 해 줄 겁니까?”

지안은 그의 말에 도사린 문제점을 미처 간파하지 못했다. 이성이 작동하기엔 앞서 일어난 폭력적인 사태가 너무도 두려웠던 것이다.

“뭐든지! 뭐든지 해 드릴게요!”

지안의 말에 남자가 씩 웃었다. 어쩐지 소름 끼치는 웃음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인식한 순간, 발밑에서부터 핏기가 빠지는 것 같은 감각이 지안의 몸을 타고 올랐다. 삼황자 궁의 기사 중에 이런 얼굴을 한 사람이 있었던가? 이런 파장을 가진 에스퍼가 있었던가?

기억을 더듬는 사이, 남자가 화려한 미소와 함께 답했다.

“방금 그 말. 잊으면 안 됩니다.”

그 말을 들음과 동시에 결론이 내려졌다. 이 사람은 삼황자 궁의 기사가 아니다!

그럼, 이 남자는 대체 누구지? 다른 궁의 기사인가? 차라리 그렇기를! 지안은 창백한 얼굴로 아론을 올려다보았다. 너무 놀라서 자신이 여전히 그에게 매달려 있다는 사실마저 알아차리지 못한 채였다.

두려움과 기대가 공존하는 지안의 눈빛에 아론은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것 참. 겁에 질린 작은 까마귀 같지 않은가. 지안의 턱을 들어 올리며 아론은 나른히 속삭였다.

“그나저나 나를 기억하는지 모르겠군요. 다시 만나기를 얼마나 고대하고 있었는지. 내…… 백만 골드짜리 아가씨.”

그 속삭임이 지안의 머리를 강타했다. 그간 까맣게 잊고 있었던 목소리였지만, 이젠 똑똑히 기억난다. 까마귀 가면을 쓴 남자! 그 남자다! 노예 경매장에서 백만 골드를 부르며 무대에 난입했던…… 공간계 에스퍼!

창백해진 지안의 얼굴에 아론은 빙긋 웃으며 지안의 뺨에 입 맞췄다.

“이런, 드디어 내 정체를 알아차린 건가?”

이마와 뺨에 내려앉는 입술을 밀어낼 힘조차 없었다. 두려움으로 지안의 손발이 덜덜 떨렸다. 날것에 가까운 위험스러움이……. 뱀의 혓바닥이 얼굴을 핥아대는 것 같다. 돌처럼 굳어버린 지안에게 아론이 속삭였다.

“너무 겁먹지 마. 아직은 널 해칠 생각 없으니.”

아직은? 아직이라는 건 곧 해칠 계획이 있다는 말인가? 아론의 목소리에 담긴 서늘한 신호가 지안을 움직였다. 공포가 정도를 넘어서니 오히려 머리가 차갑게 식고 놀라울 만큼 심장이 차분해진다.

당황은 충분할 만큼 했다. 더는 공포에 질린 채 이 남자가 바라는 모습을 보여줄 수 없었다. 그러기 싫었다. 공포가 남겨두고 간 빈자리에 차가운 분노가 성큼 다가와 앉았다.

다행히 눈앞의 남자는 에스퍼였다. 그가 일반인이었다면 오히려 더 무서웠을 것이다. 공황 상태에 빠진 채 더 무기력해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에스퍼였고, 이 사실은 지안의 두려움을 효과적으로 경감시켜 주었다.

지안은 흥분하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눈을 깜빡였다. 공포가 한 꺼풀 가시니 에스퍼의 파장이 피부에 들러붙는 게 새삼스레 느껴진다. 게다가 이 남자는 가이딩 가능한 에스퍼다. 가이드가 이와 같은 에스퍼를 상대로 공포에 질린다니, 한국의 가이드들이 들었다면 웃기는 소리 말라고 했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본능적으로 결정이 내려졌다. 지안은 망설임 없이 가이딩을 펼쳤다. 노예 경매장에서 그랬던 것만큼이나 힘껏. 폭력을 퍼붓듯 한 사람을 겨냥해 난폭하게 기운을 쏟아냈다.

“헉! 크윽!”

가이딩 충격에 아론은 지안의 옷자락을 붙든 채 비실비실 주저앉고 말았다. 그런 아론의 머리 위로 차가운 목소리가 떨어졌다.

“이걸 원한 거지? 그렇지?”

말하며 지안은 아론의 큼지막한 손에 자신의 손가락을 끼웠다. 남자가 자신의 가이딩을 쉽게 뿌리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양손 단단히 손깍지를 한 채로 지안은 아론을 내려다보았다.

“으윽……큭…….”

“가엾어라.”

“……윽. 허억!”

“아프지 않아? 저항하지 말고 그냥 기절하지 그래. 그럼 이렇게 아플 일은 없을 거 아냐. 응?”

“허윽!”

“아프면 내 손 뿌리쳐도 좋아. 그럼 괜찮을 거야.”

뿌리쳐봤자 방사 가이딩으로 전환하면 그만이다. 접촉 가이딩보단 효과가 덜하겠지만, 집중도를 높이면 그럭저럭 지금과 같은 충격을 줄 수 있다.

그러나 이 남자는 자신의 손을 뿌리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가이딩으로 가하는 인공적인 격통에 덜덜 떨면서도 맞잡은 손을 놓지 않는다. 오히려 더 가까워지려는 듯, 쓰러진대도 이쪽으로 쓰러지겠다는 듯이 몸을 기대 왔다.

그 모습에 지안은 설핏 웃었다. 그래. 이게 바로 에스퍼들의 불쾌하고도 안쓰러운 지점이지. 아무리 폭력적인 가이딩을 해도 집착적으로 들러붙는다며 진저리치던 지구의 가이드들의 했던 말을, 이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조금 전 잔뜩 겁먹은 스스로가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다. 에스퍼를 상대로 겁먹다니. 왜 그랬던 거지 난?

그 때였다.

“지안!”

벼락같은 외침과 함께 지안의 몸이 화르륵 타오르는 불꽃에 둘러싸였다. 이전에도 이랬던 적이 있었으므로 지안은 놀라지 않았다. 그저 이토록 거세게 타오르는데도 전혀 뜨겁게 느껴지지 않는 불길이 신기할 뿐이다.

반면, 화상을 아랑곳 않고 지안의 손을 마주 잡고 있는 남자의 손은 불꽃에 아주 그슬려 먹히고 있었다. 지안은 서둘러 아론의 손을 털어냈다. 그러고선 곧바로 삼황자에게 달려갔다. 삼황자가 이렇게 반가운 건 처음이었다.

“전하! 저쪽 복도에 기사님이! 괴한이 여럿 침입했어요! 가서 도와야 해요!”

“내가 가겠다. 너는 몸을 피해!”

“어디로요? 전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몰라요! 같이 가요! 기사님이 무사한지 저도 확인해야겠어요!”

“젠장! 위험하다니깐…… 알겠다. 알았으니 우선 저 녀석부터 처리하고 나서…….”

일리아스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아론이 어느새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지안 역시 그 사실을 알아차렸지만, 그것보단 괴한들과 홀로 대치하고 있을 아르킨이 먼저였다. 혹시 방해를 할까 봐 걱정했는데 알아서 도망쳐주니 외려 고맙기까지 했다. 지안은 앞서 달려 나가며 일리아스를 재촉했다.

“전하! 빨리요!”

지안의 외침에 일리아스는 이를 뿌득 갈며 지안의 뒤를 쫓았다. 서둘러 지안을 따라잡은 일리아스가 버럭 소리쳤다.

“위험하게 앞서 달리면 어쩌자는 거야! 뒤로 물러나 있어! 그래야 내가 널 보호해 줄 수 있단 말이다!”

일리아스의 호통에 지안은 아차 하는 얼굴로 뜀박질 속도를 줄였다. 우습게도, 그의 호통을 듣자 몹시도 안심되었다. 그라면 순식간에 상황을 정리해 주리라.

* * *

한때 지안이 갇혔던 황성의 지하 감옥. 그곳에서 몇 계단이나 더 내려가야 나타나는 깊숙한 심처에 불이 밝았다.

모처럼 벽에 걸린 횃불은 검게 일렁이는 그림자를 만들어냈고, 비명과 피비린내가 갓 짜낸 기름처럼 심문실 안을 줄줄 흘러넘쳤다. 몇몇은 이미 고문으로 숨을 거뒀고, 남은 건 고작 셋뿐이었다. 앞서 다섯을 산 채로 불태워 죽였음에도 일리아스의 분은 좀처럼 풀리지 않은 채였다.

황성에 잠입한 것으로 모자라 지안을 납치하려 했다.

살펴보니 대부분 노예 경매에서 지안의 특이성을 깨달은 놈들로, 그간 지안의 소문을 퍼뜨리고 다녔단 것만으로도 죽여 입막음하기에 충분했다. 그럴진대 한술 더 떠 납치를 계획하다니! 살려둘 이유도 없고, 이유가 있다 하더라도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일리아스는 낮은 목소리로 심문을 계속했다.

“다시 묻지. 배후가 있나?”

“어, 없다고…… 없다고 말했잖습니까……. 크흐흑…….”

“그냥 이름 하나면 된다. 황성에 잠입하려 작당을 한 놈들이 더 있을 것 아닌가. 그렇지? 그렇다고 말해.”

스산하게 압박해오는 일리아스의 말에 사내의 입술이 파들거렸다.

더는 없다. 아는 이름도, 얼굴도 죄다 불었다. 황성 바깥에서 조력하던 놈들도 지금쯤이면 거의 다 붙잡혔을 것이다. 바로 옆 고문실에서 들려오는 구타 소리에 아는 목소리가 몇몇 섞여 있지 않았나.

“흐으……. 저, 정말로 저는…… 아는 걸 다 말했습니다. 크흡. 큭. 미, 믿어주십시오! 사, 살려…… 살려주…….”

덜덜 떨리는 음성과 함께 사내가 바지에 오줌을 지렸다. 폭력과 공포에 짓눌린 사람이 얼마나 비굴하고 처절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그러나 일리아스는 눈 하나 깜짝 않고 남자의 손가락 하나를 천천히 불태웠다.

“아아악! 크학! 그만…… 그만둬!”

처절한 비명과 애원을 일리아스는 감흥 없는 얼굴로 들었다.

지안이 황성 안에 무사히 머물고 있단 걸 알고 있는데도, 기사단 전원이 삼엄히 그녀를 지키고 있는 걸 보고 왔는데도 좀처럼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만약 지안이 납치되었다면, 영영 사라지고 말았다면 비명과 애원을 소리쳐 울부짖는 건 내가 되었으리라. 생각만으로도 모골이 송연해져 일리아스는 사내를 그대로 불태워 버렸다. 남겨진 두 사람이 그것을 보고 경기를 일으켰으나 그 모습이 자비의 이유가 되진 못했다. 일리아스는 앞서 했던 질문을 다시금 반복했다.

“후우. 이번엔 좀 실토했으면 좋겠군. 배후가 있나?”

한숨과 함께 던져진 질문에 남겨진 두 사람은 대답 대신 벌벌 몸을 떨었다.

대답을 해도, 안 해도 죽을 것이다. 삼황자 일리아스 테리온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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