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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화 (38/199)

38화

“하지만 폐하께 청을 드리는 게 제일 효과가 좋단 말이야. 널 오라버니에게서 빼앗으려면 이 방법밖에…….”

“내가 빼앗겨줄 것 같으냐? 턱없는 소리 하려거든 그만 네 궁으로 돌아가라 이비엔.”

어느새 돌아온 일리아스의 말에 이비엔은 새침한 얼굴로 쏘아붙였다.

“모처럼 집무실을 비운 줄 알고 좋아했는데…… 다시 돌아 나가시는 건 어때요?”

“손님 주제에 헛소리가 심하군. 여기가 네 거처인 줄 아느냐?”

“흥. 아무튼, 전 진심이에요. 폐하께 부탁드릴 거예요. 지안을 제 전속 시녀로 삼을 수 있게 해달라고. 전 오늘 그 말을 전하러 왔어요.”

황녀의 선언에 일리아스의 눈초리가 사나워졌다. 그러나 번뜩이는 눈빛을 맞받아치는 황녀 역시 기세가 만만치 않았다. 만일 이 싸움에 자신이 걸려 있는 것이 아니라면 지안 역시 이 신경전을 흥미롭게 관전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삼황자가 시선을 돌리면서 신경전이 맥없이 끝나버리고 말았다. 평소엔 눈 하나 깜짝 않고 십분 이상 눈싸움하더니. 어쩐 일이지?

그렇게 생각하던 와중. 일리아스의 손이 지안의 손을 잡아 왔다.

“전하?”

“가만히 있어라. 다쳤잖나.”

그렇게 말한 일리아스의 손에는 연고와 가느다란 붕대가 들려 있었다.

“피가 멎어 다행이군.”

상처 위에 연고를 바르고 붕대를 감는 솜씨가 능숙했다. 조금 민망하기도 하고 의외이기도 해서 지안은 흘끔 고개를 들어 일리아스를 올려다보았다.

잘생기긴 했어도 늘 신경질적이고 사나운 인상이라 도통 호감을 가지기가 힘들었는데……. 집중해서 손가락에 붕대를 감는 모습을 보니 아주 나쁜 사람인 건 아니구나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수려한 이목구비와 화사한 적금발이 무척 잘 어울려서, 이렇게 보고 있으니 어딘가 신화에 나오는 남신을 의인화한 것만 같다.

거기까지 생각한 지안은 “다쳤어?” 하고 묻는 황녀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지금 누구 때문에 황성에 갇혀 지내는 건데 고작 얼굴에 홀려버리다니. 누가 누가 더 한심한지 겨루는 대회에 나가면 거뜬히 1등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지안은 곧바로 황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성 유지에 해로운 외모는 최대한 안 보는 것이 옳다. 암, 그렇고말고.

“별거 아니에요, 전하. 유리 조각에 손가락을 조금 베인 것뿐인걸요.”

그렇게 말했으나 정작 대답은 엉뚱한 사람에게서 돌아왔다.

“나한텐 별거야.”

“……네?”

“나는 별일 아니란 듯 넘어갈 수 없다고. 그 말을 하는 거다.”

지안은 그대로 굳고 말았다. 갑자기 폭탄을 떠안은 기분이다. 아니, 실제로 떠안은 것 같았다. 굳어버린 지안을 뒤로 하며 일리아스가 말했다.

“이비엔. 그간 황녀란 이유로 네게 무르게 굴었다. 폐하께 청을 올리건 말건 상관없다. 하지만 청을 올리기 전에 명심해라. 그렇게 하면…… 너는 내 적이 되는 거다.”

“…….”

“사이좋게 지안을 나눠 가지는, 그런 일은 없을 거란 말이다.”

엄혹한 경고에 지안의 동공이 흔들렸다. 삼황자의 경고가 자신에게 향하는 것이 아닌데도……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다. 차라리 늘 하던 대로 투닥거리는 신경전을 벌일 때가 더 나았다. 적이라니. 남매간에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그러나 돌변하듯 차분히 가라앉은 눈빛과 낮은 목소리에 담긴 것은 진심 그 자체였다. 고작 말 몇 마디로 기온이 급강하하듯 냉랭해졌다.

반면 삼황자의 응수에 대응하는 황녀의 눈빛은 숨을 불어넣은 불꽃처럼 거칠게 타오르고 있었다.

“저 역시 오라버니와 뜻이 같아요. 아시겠지만 저는 가지고 싶은 건 무조건 가져야 직성이 풀려서…… 가져야겠어요. 지안을.”

가지긴 뭘 가져? 내가 물건이야? 관둬. 제발 관두라고! 내적 비명을 지르며 지안은 뼈저리게 후회했다. 남매끼리 아웅다웅 눈싸움 좀 하고 신경전이나 종종 벌이다 그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어? 내가 잘못 생각한 거야?

경악으로 입술을 뻐끔대는 지안에게 이비엔이 씩 웃어 보였다. 일국의 황녀다운, 자신만만한 미소였다.

“하지만 우리가 서로를 적으로 삼는 건 내일부터인 걸로 하죠. 봐요. 지안이 너무 긴장했잖아요.”

이비엔의 말에 일리아스는 고개를 돌려 지안을 바라보았다. 황녀의 말대로 지안은 경화를 마친 대리석처럼 딱딱히 굳어 있었다.

* * *

어젯밤에는 악몽을 꿔서, 오늘은 일진이 사나워서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 침대맡에 둔 꽃다발이 화사한 향기를 뿜어내고 있지만,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다.

힘없이 일어나 앉은 지안은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고작 창문을 여는 게 자신이 방 안에서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행동인 탓이었다. 별이 쏟아지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지안은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머리가 복잡했다.

삼황자와 황녀는, 정말 서로를 적으로 삼게 되는 걸까? 어쩌면 좋지? 그냥 가이드란 사실을 밝히는 게 좋을까? 아니지. 삼황자와 황녀가 둘이서 짜고 서로 싸우네 마네 하는 것일 수도 있잖아. 설마 형제간에 진심으로 다투겠어.

그래. 어쩌면 나한테 시위하려고 그런 걸 수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게 아니면 어떡하지? 일이 커지면?

‘……모르겠다.’

고민한다고 답이 나오는 문제가 아니었기에 지안은 생각 자체를 그만둬 버렸다. 머리를 싸맨다고 뾰족한 수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두 사람이 싸우건 말건 뭔가 해 볼 수 있는 처지도 아니다.

가이드란 사실을 속 시원히 밝힐 수 있다면 가이딩으로 중재해보거나 협박이라도 하거나 할 텐데…… 그럴 수도 없다.

결국, 마지막에는 단 하나의 질문만이 남는다.

‘나는 어떻게 하고 싶은 걸까?’

바로 그 때, 높은 황성 성벽을 넘어 날아온 까마귀가 날개를 퍼덕이며 창가의 나뭇가지에 앉았다. 전날 새벽에는 창문을 열자마자 까마귀가 보여서 놀랐지만, 멀리서부터 시야에 잡혀 온 까마귀는 그리 무섭지 않았다. 발톱이 조금 날카로워 보이긴 했지만……. 그보다는 까마귀의 날개가 썩 부럽게 느껴질 뿐이다.

혹시 어제 나를 놀래킨 그 까마귀인가? 궁금했으나 조류의 생김새를 식별할 정도로 눈썰미가 밝진 않았다. 궁금증을 뒤로 미룬 지안은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까마귀를 향해 중얼거렸다.

“너는 좋겠다…….”

지안의 중얼거림에 까마귀가 고개를 갸웃갸웃거렸다. 마치 말귀를 알아듣는 것처럼. 그러나 날짐승이 어떻게 사람 말을 알아듣겠는가. 지안은 푸념하듯 뒷말을 이었다.

“……날개가 있으니 분명 자유로울 테지.”

특히 황성의 담벼락을 손쉽게 훌쩍 넘어 다니는 것이 몹시 부럽다. 어떻게 벗어나야 할지 모를 감시와 드높은 황성의 성벽이 오늘따라 못내 답답하게 느껴졌다.

휘익―!

바로 그 때, 묵직한 쇠 갈고리가 지안의 어깨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조금만 위치가 빗겨 갔어도 닻 모양으로 갈라진 쇳덩이가 얼굴을 직격했을 터였다.

“헉……!”

나뭇바닥을 쿵! 하며 두들긴 갈고리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바닥을 가로질러 긁었다. 이어서 창틀에 고정된 갈고리의 밧줄이 팽팽히 당겨졌다.

모든 게 순식간이었다. 지안은 놀라 주저앉아 버렸고, 동시에 벌컥 문이 열렸다.

“무슨 일입니까!”

“가, 갑자기 저게…….”

흔들리는 손가락으로 지안은 창틀의 쇠 갈고리를 가리켰다. 아르킨은 갈고리에 연결된 밧줄을 끊기 위해 재빨리 검을 뽑았다. 하지만 그의 검은 밧줄을 끊기는커녕 연속해서 날아오는 갈고리를 쳐 내기 바빴다. 무지막지한 힘으로 날아든 갈고리가 아르킨의 검에 부딪힐 때마다 쾅! 쾅! 소리가 났다.

검면으로 갈고리를 쳐 내던 아르킨은 몇 개의 갈고리가 창틀에 더 자리를 잡은 걸 보고선 곧바로 지안을 옆구리에 들쳐 안았다.

“꺅!”

“침입입니다! 여기서 벗어나야 합니다!”

방 밖을 빠져나간 아르킨은 곧바로 지안을 껴안은 채 복도를 달렸다.

그러나 복도 끝 모퉁이를 막 돌아서려던 무렵, 갑자기 바닥이 쑥 솟아오르며 아르킨의 발목을 붙잡았다. 그 충격으로 바닥을 구른 아르킨은 목을 노리고 달려드는 얼음 창을 피해 다시 한번 바닥을 굴렀다.

그러나 애써 피하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두 개의 얼음 창이 그의 어깨에 박혔다.

“큭!”

“기사님!”

지안의 경악성과 함께, 어둠에 몸을 숨기고 있던 능력자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저 여자야! 저 여자가 맞아!”

“우선 기절시켜!”

그 말에 지안의 얼굴을 향해 직선으로 얼음덩이가 쏘아져 왔다. 창살의 형태는 아니었지만, 속도를 보건대 맞으면 눈에 멍이 드는 것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심지어 날아드는 얼음덩이가 한두 개도 아닌 여러 개라, 피하려 한들 피해지지 않을 게 분명했다. 지안은 고통을 예감하며 두 눈을 꼭 감았다.

퍼버버벅! 듣기만 해도 아픈 소리가 전신을 강타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통각이 찾아들지 않았다. 슬그머니 눈을 뜬 지안이 본 것은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아르킨의 등이었다.

“아…….”

가느다란 목소리에 아르킨이 움찔대며 반응했다. 그의 고개가 반쯤 자신 쪽으로 돌려진 것을 지안은 똑똑히 보았다.

“……도망, 치십시오.”

그 말에 지안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움직여 간신히 일어났다.

도망. 그래. 도망쳐야 한다. 사람을 불러야 한다! 황성에는 경비병도 많지 않은가. 지안은 아르킨을 뒤로 한 채 달렸다. 두 뺨에 눈물을 가득 매단 채 소리 질렀다.

“도와줘요! 누가! 아무도 없어요? 사람이 다쳤어요!”

목청껏 소리를 지르면서도 아르킨을 내버려 둔 채 도망쳤다는 사실이 발목을 잡았다. 나 때문에 다친 사람을 두고 도망치다니!

“제발! 흐윽…… 아무도 없어요? 사람 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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