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화 (37/199)

37화

“잊으신 모양이네요. 제가 기사단에 들어갔다면, 시키셨을 일이 그거 아니었나요?”

“…….”

“그리고, 정말로 저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건 황자님이세요. 듣자 듣자 하니 기가 막혀서…… 누가 누굴 지적하는 거죠?”

가차 없는 지안의 말에 일리아스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맞는 말이기에 더욱 화가 났다. 자신 역시 탐욕에 물든 눈으로 내내 지안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능력을 사용해달란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타는 듯한 갈증과 아쉬움에 허덕이면서도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정말 참을 수 없을 때, 그럴 때만 부탁하려고 얼마나 인내했는데……. 그랬는데…….

분에 찬 얼굴로 입술을 달싹이는 일리아스에게, 지안이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저는 분명 북부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어요. 들어주지 않은 건 전하시고요.”

“죽고 싶지 않다고 했잖아! 며칠이라도 더 살고 싶다고! 내게…… 내게 그렇게 말했잖나.”

힘없이 가라앉는 일리아스의 목소리에 지안은 저도 모르게 당황했다.

뭐야, 윽박지르듯 말했으면서 왜 갈수록 목소리에 힘이 없어지는 건데. 화를 낼 거면 내든가, 아님 말든가! 둘 중 하나만 하란 말이야! 지안은 쩔쩔매는 얼굴로 아르킨을 흘끔거렸다. 어떻게 좀 해보란 의미로 열심히 눈짓했지만, 그마저도 삼황자와 시선이 마주치자 더는 할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아르킨 또한 삼황자의 외침에 죄책감 어린 얼굴로 시선을 바닥에 떨구고 있다. 평범하던 분위기가 실시간으로 초토화되고 있었다. 진퇴양난은 바로 이럴 때 쓰는 말이구나.

“만일, 아르킨의 강요로 네가 능력을 사용하게 된 거라면…….”

별안간 스산해지는 삼황자의 목소리에 지안은 선 채로 펄쩍 뛰었다.

“아니요! 제가 자의로 한 거예요!”

왜? 삼황자의 눈빛이 그렇게 묻고 있었다. 회피나 얼버무림은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것 같은 눈빛이었다. 별수 없다. 이럴 땐 최대한 솔직하게 말하는 것밖엔.

“그냥, 안타까워서였어요. 그게 얼마나 아픈지는 저도 잘 아니까요.”

알긴 뭘 알아. 에스퍼가 얼마나 아픈지 가이드인 내가 그걸 어떻게 아나? 애초에 아무것도 몰랐으면 참견할 일도 없었다. 하지만 내버려 두면 죽는다는데. 황녀 때도 죽이니 뭐니 그런 말만 안 했어도 강 너머 불구경하듯 얌전히 있을 터다. 하지만 이런 진실을 곧이곧대로 말할 순 없는 노릇이다.

“모른 척 신경 끄려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어요. 기사님께 능력을 사용한 건, 그런 이유에서예요.”

“이 멍청이가! 안타깝다는 이유로 능력을 남발하면 폭주하는 건 네가 될 거다!”

폭주 안 합니다. 안 한다고요. 지안은 당장에라도 그렇게 내뱉고 싶은 마음을 꾹 참아 누르며 빙긋 웃었다. 설마 웃는 얼굴에 침 뱉겠어.

“그러게요.”

“……너!”

“전하의 말을 듣고 나니…… 제가 생각이 짧았어요.”

그러니까 그만해, 이 미친놈아. 뒷말을 고이 접어 삼키며 지안은 가이딩 차단을 풀어냈다. 삼황자가 있는 대로 성질을 부리는 이유? 단순하다. 다른 에스퍼는 가이딩을 받았는데 본인은 가이딩을 못 받아서 심통이 난 거다.

각성자 센터에서 일어나는 에스퍼들의 말다툼 관람 경력만 무려 오 년이다. 이럴 때일수록 단순하게 생각해야 한다. 삼황자가 화내는 이유라면, 뻔하지 않은가. 그냥 이거다. 왜 저놈은 가이딩 해 주고 나는 안 해 줘. 이외의 가정은 생각할 수 없다.

마침 유리 조각에 베인 손이 삼황자에게 잡혀 있기도 하고……. 가이딩 차단만 풀어내면 되는 간단한 일이다.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는 심정으로 선심을 조금 써서 부드럽게 가이딩을 진행하자 삼황자의 눈동자가 덜컹 흔들렸다.

버럭버럭 소리 지르던 삼황자가 갑자기 조용해지니 약간 재미있기도 하고 조금 신기하기도 했다. 에스퍼가 가이딩에 정신 못 차리는 걸 자주 봐오긴 했지만, 화내는 걸 갑자기 멈출 정도로 극적인 반응은 처음이었다. 이런 장면을 자신이 직접 만들어낸 적이 별로 없었던 터라 퍽 낯설기도 했다.

조용히 가이딩을 해주고 있다 보니, 몇 년 전 잠시 어울렸던 가이드와 나눴던 대화가 불현듯 떠올랐다.

‘넌 몰라서 그래. 진짜 웃기다니까? 뾰로통해져서 투덜투덜거리다가도 가이딩 한번 해 주면 그렇게 조용해지는 게……. 멍청하게 뭐하러 맨날 대드나 몰라.’

‘그렇게 원한다는데 각인 좀 해 주지 왜.’

‘나는 B급 가이드잖아. 너랑은 달라서 딱 한 사람한테만 각인할 수 있단 말야. 이것도 나름 기회라면 기회인데, 더 좋은 에스퍼가 나타날 때까지 아끼고 싶어.’

‘어우. 야. 그거 승원이가 들으면 서운해하겠다. 말 좀 골라서 해.’

‘내가 왜? 들으라 해. 제깟 게 뭘 어쩔 건데.’

매칭률이 항상 제로로 나온다는 걸 몰랐던 때였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나온 S급 가이드라며 모두가 떠받들어줄 무렵 친해졌던 가이드와 나누었던 대화다. 이후로 반푼이도 못 되는 가이드란 사실이 드러나자 그 B급 가이드와는 점차 서먹서먹해졌던 것 같다.

잠시 떠오른 과거의 기억에 지안이 씁쓸히 웃자, 일리아스는 불에 데기라도 한 듯 지안의 손을 뿌리쳤다. 덕분에 지안은 곧바로 회상에서 벗어나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가이딩을 거부하는 에스퍼가 낮은 확률로 있긴 있다고 들었는데, 그게 삼황자일 줄이야. 뭐지? 가이딩이 아팠나? 아닌데? 난 엄청 부드럽게 가이딩 해 줬는데?

“전하? 왜 그러세요?”

“……내게 능력을 사용하란 뜻이 아니었다.”

그 말만 남긴 채 일리아스는 서둘러 집무실에서 벗어났다. 본인의 집무실에서 스스로 도망쳐버리고 만 것이다. 지안은 영문을 알 수 없는 얼굴로 피 묻은 손가락을 빨았다. 가이딩 안 해줘서 불만인 게 아니었어?

뭐, 알게 뭐람. 분위기를 처참하게 갈아엎던 원흉이 떠나 줘 감사하기만 하다. 우선…… 발치의 유리 조각부터 치워야겠지. 이번엔 손 안 베이도록 조심해야겠다.

하지만 지안이 다시 쪼그려 앉아 유리 조각을 치우기도 전에 아르킨이 먼저 나서서 바닥에 흩어진 유리를 긁어모았다.

“어어? 기사님. 그냥 놔두세요. 제가 할게요.”

만류하는 지안에게 아르킨이 말했다.

“아르킨입니다.”

“네?”

“제 이름, 기사님이 아니라…… 아르킨입니다.”

* * *

황녀가 찾아와줘서 정말 다행이다. 지안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집무실의 주인은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렸고, 아르킨인지 뭔지 하는 기사님은 갑자기 분위기를 서먹서먹 요상하게 만들어 버리고. 말 그대로 총체적 난국이었는데, 때맞춰 찾아와준 이비엔 황녀 덕분에 시름이 한결 덜어졌다.

그러나 저렇게 어려도 황족은 황족인 모양이다.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지안에게 꽃다발을 건넨 황녀가 불시에 질문을 던졌다.

“정작 있어야 할 사람이 없는 데다 왠지, 두 사람 표정이 어두워 보이는데…….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누가 황족 아니랄까 봐 눈썰미가 좋았다. 지안은 빙긋 웃으며 황녀의 질문을 부정했다.

“아무 일도요. 그보다 꽃이 참 예쁘네요. 감사해요, 전하.”

“……받아주는 거야?”

직접 꺾어왔다고 내미는데 어떻게 거절하나. 금화나 보석은 못 받아 주지만 꽃다발 정도는 받아 줄 수 있다. 무엇보다 황녀의 손가락에 풀물이 든 걸 봐 버려서 차마 거절할 수가 없다.

“그럼요. 화병에다 장식해둘게요. 삼황자 전하께서도 좋아하실 거예요.”

“뭐? 지안! 내가 그걸 오라버니 주려고 가져온 줄 알아? 네 방에 장식하라고 들고 온 거야.”

“음. 그걸 모르는 건 아닌데 저는 화병이 없어서…….”

“줄게 화병!”

“……감사히 받을게요. 그보다, 차는 뭐로 하시겠어요?”

“홍차로 할래. 간식은 뭐가 있어?”

“호두 파이요. 금방 준비할 테니 잠시 기다려 주시겠어요?”

“얼마든지.”

집무실 한쪽에 딸린 작은 티룸으로 들어간 지안은 서둘러 찻물을 끓이고 호두 파이를 접시 위에 세팅했다. 처음엔 이런 단순한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해 하녀들의 도움을 받았지만, 그것도 한 달쯤 되니 매번 하는 일이 되어 능숙해졌다.

다만 당황스러운 점은, 차를 내오는 일이 익숙해지자 일을 돕던 하녀들이 모두 삼황자 전하의 집무실에서 물러나게 되었단 사실이다. 다른 궁으로 도망치듯 떠나면서 말하길, 능력자들로 가득한 삼황자 전하의 궁에는 조금도 있고 싶지 않다나 뭐라나…….

에스퍼의 폭주를 두려워하는 건 지안도 이해했다. 물론 폭주가 제일 무서운 건 아무래도 폭주를 앞둔 당사자겠지만……. 폭주하는 에스퍼 옆에 있다가 운 없이 휘말려 죽는 사람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 않나. 목숨은 하나뿐이니 몸을 사리고 싶은 그 마음 백번 이해한다.

다만, 하녀들에게마저 이런 취급을 받는 삼황자가 조금, 아주 조금 불쌍하긴 했다.

세팅을 마친 지안은 곧바로 황녀에게 돌아가 차와 디저트를 내놓았다. 기분 좋은 얼굴로 포크를 든 황녀는 호두 파이를 조각내며 늘 했던 말을 또 한 번 반복했다.

“지안. 다시 말할게. 내 전속 시녀가 되어 줘.”

“삼황자 전하께서 허락하지 않으실 거예요. 제가 황녀 전하의 전속 시녀가 되고 싶다고 한들…… 그렇게 쉽게 이동할 수 없는 노릇일 테고요.”

“흐음…… 마음에 걸리는 건 그것뿐이야? 오라버니가 반대할 테니까?”

“네.”

“그 말은, 오라버니가 반대하지만 않으면 내 전속 시녀가 될 마음이 있다는 거지?”

“그건, 글쎄요.”

“좋아. 폐하께 청을 올려 볼게. 폐하께서 명하시면 오라버니도 별수 없을 거야.”

폐하라니. 이거 일이 너무 커지는 거 아닌가? 왠지 불안해져서 그러지 말라고 말하려는데 그보다 더 빨리 제지를 가하는 사람이 있었다.

“황녀 전하.”

나지막한 음성에 담긴 건 지문처럼 뚜렷한 질책이었다. 이비엔은 지안에게서 고개를 돌려 아르킨을 바라보았다.

“오라버니가 없으니 경이 대신해서 참견하는군? 아무리 오라버니의 종복이라 한들, 황실의 기사가 감히 나를 막아서는가?”

못마땅해하는 황녀의 모습에 지안은 서둘러 입을 열었다.

“전하. 저도 폐하께 청을 올리는 건 조금…… 부담스럽다고 생각해요.”

이어진 지안의 말에 이비엔의 콧잔등이 찌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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