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화 (36/199)

36화

문 너머에 서 있었지만 지안이 옅은 신음과 함께 깨어났다는 건 아르킨도 알고 있었다. 바스락거리며 움직이는 소리, 창문이 열리며 삐걱대던 나무 경칩 소리도 전부 들었다.

“……까마귀를 보고 놀란 것뿐이에요.”

놀람이 가시지 않은 지안의 대답에 아르킨은 손을 휘저어 까마귀를 쫓아냈다. 그런 아르킨에게 지안이 말했다.

“소란을 피워 죄송해요.”

“아닙니다.”

대답과 함께 창문을 닫아건 아르킨은 망토를 벗어 지안의 어깨에 둘러 주었다. 지안은 그제야 자신이 슬립 차림이었단 걸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뒤늦은 부끄러움에 양 뺨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저야말로 갑자기 난입해 죄송합니다. 더 주무십시오.”

정중한 말에 지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라고 대답하기엔 창피해서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아르킨이 물러나고 문이 닫히자, 다시 혼자다. 놀란 탓에 잠기운은 다 물러가 버렸고, 그 빈자리엔 잠시 잊었던 답답함이 그득 차올랐다. 그렇지만 다시 창문을 열어볼 엄두는 나지 않는다.

한숨과 함께 옷을 갈아입은 지안은 아르킨이 어깨에 둘러준 망토를 곱게 개어놓았다. 일과가 시작되자마자 돌려줄 생각이었다. 열린 창을 바라보니 밖은 여전히 해가 뜰 여지도 없이 캄캄한 새벽이었다.

아침이 오길 기다리는 과정은 생각보다 지루했다. 뭔가 할 거리라도 있으면 좋겠지만, 방 안에 있는 거라곤 작은 침대와 의자 하나가 전부였다. 손목의 매칭률 검사기를 매만지며 하릴없이 시간을 죽이는 것 외엔 딱히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낼 바에야 차라리 뭔가 하고 있는 게 나은데……. 씁쓸함이 입안을 가득 적셨다. 즐겨 마시던 커피가 그립고, 핸드폰이 그립고, 인터넷이 그립다.

그리고…… 북부가 그립다.

바로 그 때, 문틈 사이로 기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이 오지 않습니까?

지안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설마 내게 한 말인가? 그동안 뭘 물어도 늘 묵묵부답이었던 사람이 갑자기 왜?

이거…… 대답해야 하나? 망설임 끝에 지안이 입을 열었다.

“악몽을 꿔서요.”

―그렇군요.

보통이라면 대화는 여기서 단절되었을 것이다. 감시하는 입장과 감시를 받는 입장인지라 서로 데면데면해 왔던 탓이다.

실제로 황성에서 지내온 지난 한 달간, 지안이 아르킨과 나눈 대화는 다섯 손가락 안에 꼽았다. 그것마저도 저기에 가서는 안 된다, 한눈팔지 마라, 도망칠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등의 일방적인 경고성 발언이 전부였다. 그 탓에 지안은 그간 아르킨에게 가벼운 눈인사조차 하지 않았다.

그렇게 철저하게 없는 사람 취급했는데 뜻밖에 도움을 받다니…… 낯간지럽고 민망했다.

하지만 이런 민망함마저도 어째 신선한 것이다. 저 기사가 먼저 말을 걸어온 것도 처음이었다. 마침 새벽이었고, 적막감은 계속해서 덩치를 키우고 있었으며, 아침이 오길 기다리는 시간은 무료함 그 자체였다. 그간 홀로 삼켜온 쓸쓸함 탓에 말동무가 절실하기도 했다.

“기사님은, 안 주무시나요? 절 감시하는데 하루를 거의 다 쓰시네요.”

―저는 원래 잠이 없습니다.

“그래도 그렇지. 사람이 잠을 안 자고 어떻게 버텨요?”

―익숙해져서 괜찮습니다. 삼황자 전하 휘하의 기사 전원이 저와 같거나 비슷합니다.

“왜요?”

―얼마 안 남은 생을 잠으로 허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안은 말문을 잃었다. 문 너머의 기사가 에스퍼고, 그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건 파장만으로도 잘 알 수 있다. 언뜻 잔잔하게 가라앉은 것 같지만, 그 아래에서 역류하듯 휘몰아치는 움직임은 훅 꺼져버릴 촛불처럼 위태롭고 폭풍우 치는 바다처럼 사나웠다.

지안은 기사가 감내하고 있을 고통의 크기를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차라리 말을 섞지 말 걸 그랬다. 그랬다면 물씬 피어오르는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아도 좋았을 텐데. 문밖의 기사가 뿜어내는 파장을 생생하게 읽어낼 수 있어서 더 괴로웠다.

그러나 한편으론, 괴로운 만큼이나 어처구니가 없는 것이다. 지구에서 자신은 수백 명의 에스퍼 중 단 한 사람의 파장도 느껴보질 못했다. 파장을 감지하긴커녕 일반인과 에스퍼조차 구분 못 하는 반푼이 가이드였다.

분명 그랬는데……. 여기선 시도 때도 없이 에스퍼의 파장이 감지된다. 폭주 직전의 위태로운 사람들, 손을 뻗지 않으면 스러질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다.

개중에서도 황성 생활 덕분에 알게 된 몇몇 상식들이 특히 지안을 괴롭혔다.

이곳의 에스퍼들은 대개 서른을 넘기지 못하고 죽는다. 폭주로 인해 대중에게 외면당하고 배척당하며, 능력을 발휘하더라도 온전히 대우받지 못한다. 곧 버려질 패처럼, 도구처럼 사용되다가 스러져간다. 그것이 이곳 세상의 에스퍼들이었다.

지구의 에스퍼들은 능력 사용에 익숙해지려고 가이드를 동원해 온갖 수련을 다 하는데, 이곳의 에스퍼들은 전 생에 걸쳐 능력을 억제하는 데 갖은 노력을 기울이다 죽어간다. 최대한 능력을 사용하지 않아야 폭주를 뒤로 늦출 수 있기 때문이다.

약해지는 마음과 계속해서 떠오르는 가이드로서의 윤리, 그리고 새벽의 아스라한 감성이 지안의 결심을 희석시켰다.

북부의 공작에게 반쯤 감금당하다시피 했고, 장소만 바뀌었다 뿐 이번엔 황성에 감금당하게 되었는데도 저 불쌍한 에스퍼에게 손을 뻗지 않을 수 없다.

그래, 어차피 황녀의 각성통도 가라앉혀준 마당 아닌가. 지속적인 가이딩은 해 줄 수 없더라도, 수명 연장을 위한 가이딩은 인도적인 차원에서 해 줄 수 있다. 무엇보다 지난 한 달간 관찰한 결과 자신의 감시역인 저 기사는 그리 나쁜 사람인 것 같지 않았다.

그러니 지금 이 결정은, 어디까지나 어깨에 둘러준 망토에 대한 보답 차원이다.

결심을 마친 지안은 손가락 한 뼘쯤 문을 열고 문밖에 서 있는 아르킨과 시선을 맞췄다.

“이거 돌려드릴게요. 감사했어요.”

불쑥 내밀어지는 망토를 받아든 아르킨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지안은 문을 닫는 대신 곧바로 손을 내밀었다. 무슨 의도로 내밀어진 손인지 알 수 없어 아르킨은 고개를 들어 지안을 바라보았다.

“…….”

뭔가를 결심한 것 같은 얼굴이라고, 아르킨은 그렇게 생각했다. 지안이 말했다.

“내 손 잡아요.”

“손을…… 말입니까?”

가이딩 해드릴게요. 평소라면 이렇게 말했겠지만, 지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이딩은 해주더라도, 가이드란 정체는 비밀의 영역 안에 있는 것이 좋다.

아르킨이 손을 잡아 오지 않자 지안은 답답한 얼굴로 아르킨의 손등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곧바로 가이딩을 시작했다.

“헉!”

풀썩 주저앉는 그의 몸을 따라 지안은 천천히 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부드럽게 흘러나오는 기운에 아르킨의 의식은 몇 번이나 흐려졌다 맑아지길 반복했다. 아르킨은 저도 모르게 두 손을 이용해 지안의 손을 잡았고, 급기야는 지안의 손등에 이마를 대고 끙끙거렸다. 스스로가 어떤 모습으로 웅크려 있는지 신경 쓸 여력 따윈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허…… 으윽.”

무의식적으로 지안의 손등에 이마를 비빈 아르킨은 온몸을 휘젓는 가이딩에 불현듯 의식을 잃었다. 그런 와중에도 지안의 기운은 강줄기처럼 아르킨에게 흘러들어 그가 인내해온 고통을 불식시키고 있었다.

새벽이 밝아올 때까지 가이딩을 멈추지 않은 지안은 정신을 잃은 아르킨의 목덜미에 손을 뻗어 가이딩 정도를 확인했다. 날뛰던 기운은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했다. 안정화 상태에 접어든 것이다. 매칭률은 알지 못하지만 대강 가이딩이 잘 됐다는 건 알겠다.

어쨌건, 이제 중요한 건 가이딩 정도가 아니라 아침이 밝았단 사실이다. 하루 일과를 늦추지 않기 위해 지안은 아르킨을 흔들어 깨웠다.

그리고 그런 지안의 모습을, 붉은 눈의 까마귀가 오랫동안 응시했다.

* * *

“오늘따라 표정이 밝군.”

일리아스의 말에 지안의 뒷모습을 쫓던 아르킨은 서둘러 시선을 아래에 두었다.

“그렇습니까?”

“뭔가,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

“……딱히 없었습니다.”

“그런가? 본인이 그렇다니 다른 걸 묻지.”

“무슨…….”

“왜 자꾸 내 전속 시녀를 흘끔대는 거지? 아주 뚫어지겠군. 안 그런가, 아르킨?”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삼황자의 적대에 아르킨의 눈빛이 딱딱히 굳었다. 나름 티 나지 않게 훔쳐보았다고 생각했는데, 삼황자 전하의 눈에 그것이 포착된 모양이었다.

그리고 한발 늦게 그 말을 알아들은 지안은 놀란 나머지 들고 있던 찻주전자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쨍그랑!

날카로운 소음에 일리아스의 고개가 지안에게로 돌아갔다. 질책의 의미가 담긴 눈빛에 지안은 서둘러 쪼그려 앉아 유리 조각을 한데 모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한눈을 팔았…….”

지안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허둥거리다가 손가락 끝에 유리 조각이 박혀 들어온 탓이다. 손끝에서 전해져 오는 통각에 지안은 얼굴을 찌푸리며 두 눈을 감아버렸다. 반사적으로 눈꼬리에 살짝 눈물이 맺혔다.

그 순간, 애써 통제하고 있던 분노가 가라앉긴커녕 들불처럼 일어났다. 성큼 다가와 지안을 일으킨 일리아스는 곧바로 지안의 검지에 박힌 유리조각을 빼냈다. 그러나 생각보다 더 깊이 박혔었는지, 방울지며 맺힌 핏방울이 주룩 흘러내리며 지안의 손바닥을 가로질렀다. 그걸 본 일리아스의 이성은 빠르게 휘발되어 버렸다.

“바보 같으니! 이런 건 하녀를 시켜라!”

면전에서 들려오는 일리아스의 호통에 지안은 애써 서러움을 삼켰다. 잠깐이었지만 저도 모르게 죄송하다고 말해버릴 뻔해서 더 분했다.

죄송은 무슨! 봉급도 안 주고 무임금으로 부려먹히는 마당에 죄송할 게 뭐 있단 말인가.

“놓으세요.”

“하?”

“놓으시라고요. 손가락보다 전하가 잡고 있는 손목이 더 아파요.”

지안의 말에 일리아스의 얼굴 위로 당혹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당혹이 지나간 자리에 곧바로 분기가 차오른다.

“말해라. 아르킨에게 능력을 사용해준 건가? 그래서 저 녀석이 정신을 못 차리고 너를 그런 눈으로 보는 거냔 말이다!”

“……그런 눈이 대체 뭔데요?”

“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