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놀랍군요. 헌데 셀스하임 영애께선 그 사실을 어떻게 아셨는지?”
“아. 그게…….”
“생각해보니 최근 셀스하임 백작가에서 서출 하나를 내쫓았다지요. 그 일과 관련이 있는 걸까요?”
불시의 공격에 시에나는 꾹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에를랑겐 후작 영애의 말대로 가문의 서출 능력자 하나가 최근에 내쫓겼다. 창피를 모르고 노예 경매에 참석해 백작가의 명성에 흠을 낸 탓이다.
정작 그 서출 능력자가 노예 경매에 참석하게 된 건 자신의 아버지, 셀스하임 백작의 지시로 인한 것이었지만, 시에나는 이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 때문에 그녀는 어렵게나마 후작 영애의 질문에 긍정했다.
“가문의 명예에 수치스럽고 불결한 일이라 함부로 말하지 못하는 걸 이해해 주시길. 하지만 어느 정도는 사실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네요.”
그렇게 자신의 정보에 공신력을 더한 백작영애는 슬그머니 동대륙산 찻잎의 풍미를 칭찬하며 화제를 돌렸다.
그리고 그날 밤. 제도 파가디안의 허름한 주점에서 은밀한 회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십 대 초중반의 젊은 남녀로 구성된 이들은 노예 경매장에서 운 좋게 빠져나온 능력자들로, 가진 능력을 십분 활용해 삼황자의 기사단을 상대로 간신히 몸을 피한 참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강한 진통제에 중독되어 있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손 쳐도 대부분 상태가 나빴다.
말없이 술이 나누어지는 와중 한 남자가 입을 열었다.
“그날, 우리가 느꼈던 게 뭔지 정확히 아는 사람. 혹시 있나?”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모두가 눈빛을 빛냈다. 노예 경매장에서 느꼈던 전율과 충격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두근거렸던 것이다. 일순간 느꼈던 그것은 실로 난폭하고 감미로운 기적이었다. 그러나 그 기적을 이뤄낸 장본인은 닿지 않은 황성 어딘가에 있다.
회동에 참석한 남자 하나가 짜증 어린 기색으로 말했다.
“그게 뭔지 정확히 알고 싶어서 이 자리가 만들어진 것 아닌가?”
짜증 섞인 목소리였지만, 면박이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그 자리의 모두가 남자의 상태를 대강 짐작하기 때문이었다. 죽음이 목전까지 차오르면 사람은 이성을 잃을 수밖에 없다.
잠깐의 침묵 끝에 누군가 말했다.
“잠깐이었지만, 고질적이던 고통이 멎었지.”
“……나도 느꼈어.”
“폭주를 멈추는 능력자일까?”
“뭐, 워낙 다양한 능력자들이 있으니. 그럴지도 모르지.”
“문제는 삼황자가 그 여자를 챙겨 황성으로 향했단 거야. 다시 확인하고 싶어도 우린 할 수 없다고.”
“그렇다고 손 놓고 죽을 날만 기다릴 셈인가?”
“……그럴 순 없지.”
“동감이다. 그 여자를 황성에서 빼돌려야 해. 그래야 우리가 산다.”
“하지만 어떻게 황성에 잠입한단 말이지? 나 같은 중급 능력자는 잠임을 시도하는 동시에 살해당할 거라고!”
“맞는 말이야. 시간이 좀 지나서 다들 기억이 잘 안 나나 본데…… 삼황자의 기사단을 못 본 사람은 없겠지? 기사단 전원이 중상급 이상의 능력자들이었어. 능력의 종류나 제어도 우리보다 훨씬 더 월등하겠지. 기사단이 귀족들 신병을 구속, 확보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지 않았다면 우린 도망도 못 쳤어.”
“그래서 어쩌잔 말이지?”
“머리가 있다면 주변을 좀 둘러보지 그래. 이곳에 모인 전원이 능력자다. 하급 능력자도 다섯 이상이 모이면 못 할 일이 없지. 안 그런가? 까짓, 능력을 다 까보자고. 거짓 없이.”
그 말에 좌중의 눈초리가 살벌해졌다. 자신의 능력이 무엇인지 드러내는 건 약점을 밝히는 것과 다름없었다.
“능력을 비교 검증하자, 이 말인가?”
“그래. 우리가 뭘 할 수 있는지 알려면 우선 우리 스스로를 점검해야 하니까. 그리고 기껏 이렇게 모였는데…… 시도조차 안 하고 죽을 생각이라면 이 모임이 무슨 의미가 있지?”
도발적인 말에 몇몇이 울컥한 표정을 지었지만, 반박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마지막 발언자는 이 회동에 모인 능력자 중에서도 신분이 가장 잘 알려진 능력자기 때문이었다. 노예 경매장에 나타난 여자가 삼황자의 전속 시녀가 되었단 정보를 알려준 것도 바로 이자였다.
베르딘 셀스하임. 셀스하임 백작가의 비천한 서출.
그리고 회동에 참여한 대부분은, 셀스하임 백작가에서 노예 경매장에 연루되어 있단 접점을 없애기 위해 베르딘을 잘라냈단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바로 그 덕분에 서로를 경계하는 와중에도 결국 처음의 제안대로 능력의 공유가 이루어졌다.
“나는 물을 다룬다. 능력의 사용 시간은 한 시간이 한계야. 그 이상 능력을 사용하면 위험해져. 지금도 폭주의 고통을 간신히 누르고 있다고.”
“난 물건을 이동시킬 수 있다. 이동의 한계 거리는 대략 10미터 정도. 마찬가지로 오래 사용할 순 없어. 최대 열 번이 한계고 이동시키는 물건의 무게에 따라 사용 횟수가 줄어든다.”
“저는 동물의 시야를 빌릴 수 있습니다. 경비병들을 따돌리는 데 효과적일 겁니다.”
마지막 말에 베르딘의 눈이 빛났다.
“동물의 시야를 빌린다고? 특이한 능력이군.”
“한계가 있긴 합니다. 들쥐 같은 건 무리고, 날짐승의 시야만 빌릴 수 있으니까요.”
이처럼 저마다의 능력을 공유해가던 와중, 찬물이 끼얹어졌다.
“잠깐. 나는 빼줘. 더 듣지 않겠어.”
“무슨 말이지?”
“황성에 잠입해서 그 여자를 빼돌리면, 그다음은? 만에 하나 우리와 같은 능력자라면 어떡할 건데. 이능의 사용을 강요하는 것 외에 우리가 뭘 할 수 있지? 나는…… 나 살자고 다른 사람을 죽일 순 없어. 그러기 싫다고. 난 빠지겠어.”
“에, 에린! 젠장! 왜 그러는 거야 정말!”
동료로 보이는 사람이 여자를 뜯어말렸지만, 붉은 머리의 발언자는 거침이 없었다.
“시끄러! 나도 폭주로 죽긴 싫어! 하지만 그 여자는? 황성 잠입에 성공하고 납치에 성공하면 뭐해! 우리가 뭔데 능력의 사용을 강요하느냔 말야! 그리고, 그러다가 그 여자가 죽기라도 하면? 폭주하면? 그땐 우리도 다 손가락 빨고 죽는 거야! 알아?”
그 말을 끝으로 에린은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그녀의 동료로 보이는 사람 또한 어쩔 수 없다는 듯 머리를 벅벅 긁으며 그 뒤를 따랐다.
덕분에 좌중에 하나의 고뇌가 더해졌으나, 그뿐이었다. 베르딘이 담담하게 말했다.
“……이야기가 끊겼군. 아직 능력을 밝히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이어서 말하지. 덧붙여서…… 나가고 싶은 사람은 지금 나가주면 좋겠군.”
그 말에 모두가 말없이 서로의 눈치만 살폈다. 그러나 이제 와 관두겠다고 나서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덕분에 분위기는 다시금 본래의 자리를 되찾았다.
각자의 능력을 밝히며 이런저런 계획이 세워지는 동안, 아론은 손에 턱을 괸 채로 에린이 떠난 자리를 응시했다.
그는 지금 이 자리에 하급 능력자를 가장해 숨어 있었다. 중하급 능력자들이 회동을 가질 수 있도록 은밀히 부추긴 것도, 적당한 장소의 제공도, 모두 그가 한 짓이었다. 이곳 주점에 모여든 능력자들은 사실상 그의 각본대로 움직여줄 꼭두각시였던 것이다.
그런데 꼭두각시 두 개가 예상외의 움직임을 보였다.
“곤란한데.”
회동이 파하고 난 후, 아론은 가장 먼저 에린이 머무는 여관을 찾았다. 그녀가 삼황자에게 쪼르르 달려가 일러바치기라도 하면 일이 번거로워질 터였다.
* * *
“커헉!”
“게, 게롤드!”
여관방의 바닥 위로 남자의 머리가 데굴데굴 굴렀다. 하급 능력자인 그로선 눈 뜨고 당할 수밖에 없는 공격이었다. 오랫동안 함께 해온 동료가 살해당하자 그 충격과 분노로 에린의 두 눈이 이글거렸다.
“으아아! 네놈!”
두 손에 전격을 두르고 달려드는 에린의 기세에 아론은 빙긋 웃으며 손가락을 그었다. 그러자 에린의 두 팔이 잘려 나갔다.
검을 휘두르는 작업은 필요 없었다. 아론의 의지에 따라 공간이 나눠지며 그대로 에린의 살과 뼈를 가른 것이다. 맥없이 아론의 가슴팍에 얼굴을 박고 만 에린은 야차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고개를 들었다.
갑작스럽게 허공을 가르며 나타난 괴한의 정체를, 그녀는 알고 있었다. 분명 회동에서 날짐승의 시야를 빌릴 수 있다고 말한 능력자다.
“너, 하급 능력자처럼 굴더니 사실은…….”
에린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투둑, 하는 소리와 함께 목 위로 가느다란 혈선이 그어진 것이다. 아론의 손가락이 에린의 머리를 툭 건드리자, 목을 부여잡은 에린의 손가락 사이로 왈칵 피가 솟구쳤다.
비틀대며 쓰러진 에린은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절명은 한순간이었다.
아론은 잠시 자신이 만들어낸 광경을 응시했다. 둘 다 눈을 부릅뜨고 죽어있는 모습이 상당히 재미있었다. 스스로의 죽음을 믿지 못하는 시신의 얼굴이라니, 얼마나 웃긴가. 아직 혈색이 남아 있는 에린의 뺨을 툭툭 건드리며 아론이 중얼거렸다.
“궁금하군. 그 아가씨는 내게 어떤 표정을 지어주려나.”
* * *
바로 그 시각, 지안은 진저리를 치며 잠에서 깨어났다. 뭔가 뒤숭숭한 꿈을 꾼 것 같은데 무슨 내용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아서 더 찝찝한, 그런 악몽이었다. 머리맡의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켠 지안은 방 안으로 푸르스름하게 새어 들어오는 빛줄기에 한숨을 내쉬었다.
새벽인 것 같은데 뭔가, 다시 잠들기엔 무섭다. 하지만 시녀복으로 갈아입고 움직이기엔…… 문밖에서 감시하는 기사가 마음에 걸린다.
답답한 마음에 창문을 연 지안은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꺄아악!”
비명과 함께 균형을 잃은 지안은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그러나 뒤로 넘어져 머리를 부딪치는 불상사는 없었다. 지안의 비명을 들은 기사가 그대로 문을 부수고 들어와 넘어지는 지안을 붙잡아주었기 때문이었다.
“……괜찮습니까?”
아르킨의 물음에 지안은 서둘러 그에게서 떨어졌다. 밤새 문밖을 지킨 기사 또한 에스퍼였다. 눈 뜨자마자 가이딩 차단을 하긴 했지만, 접촉한 상태로는 역시 불안했다.
“괘, 괜찮아요. 잡아주셔서 감사해요.”
“아닙니다. 그보다 대체 왜 비명을…….”
지안은 대답 대신 창문을 응시했다. 덩달아 아르킨의 시선도 창문으로 향했다.
덕분에 아르킨은 창문 너머 커다란 까마귀가 붉은 열매를 쪼아먹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창가에 드리운 나뭇가지 탓에, 창문을 열자마자 곧장 까마귀와 조우한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