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아론 베르그만은 까마귀의 눈을 빌려 삼황자와 황녀에게 버럭 소리치는 지안을 응시했다. 황자궁의 흔한 시녀로 보이지만, 그녀는 지하 노예 경매장에서 희귀한 능력을 선보인 이능력자였다. 황녀의 발현을 진정시킨 장본인이기도 했다.
황실에서는 황녀가 스스로의 의지로 이능을 제어해낸 것이라 공표했지만, 황녀가 각성하던 날 삼황자가 자신의 전속 시녀와 함께 황녀의 궁으로 뛰어들었다는 목격자의 증언이 있었다.
열일곱이란 나이에 뒤늦게 발현한 황녀다. 그런 그녀의 이능이 채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그리 허무하게 사그라들 리 없다. 보통은 과발현되는 힘을 견디지 못하기 마련이고, 일시적 폭주상태로 접어들면, 그로 인한 피해를 줄여야 한다는 명목으로 사살당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황녀의 발현이 그토록 짧은 시간에 그칠 수 있었던 건 모두 저 여자의 솜씨일 것이다.
노예 경매장의 무대 위에서 오연한 표정으로 능력을 개방하던 그 얼굴. 내가 고작 칠백오십 골드에 불과하냐는 비웃음 섞인 물음이 아직도 뇌리에 생생하다. 쏟아져 나오던 그녀의 힘에 감싸이던 순간 알 수 있었다. 저 여자를 얻으면 폭주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걸.
벼락같은 확신이 든 순간, 더는 관객석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손을 치켜든 노예상을 막아선 건 그녀가 이미 자신의 소유라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하필 삼황자가 나타났고, 지금에 이르렀다.
노예 경매장에서 아무 일 없이 그녀를 사들일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삼황자가 노예상과 결탁한 귀족들을 치려 하는 낌새를 보인단 건 알고 있었지만…… 하필 그날 작전을 개시할 줄이야.
남몰래 애석해하는 사이, 지안의 호통이 창틈으로 희미하게 새어 나왔다.
“이딴 말다툼으로 힘을 남용하다니! 두 분 다 오래 사시겠군요!”
상대방이 황족이라는 걸 잊기라도 한 듯 질타를 가하는 지안의 모습에 아론의 입가로 희미한 미소가 자리 잡았다. 지하 경매장에서도 그랬지만, 상상 이상으로 대범하다. 황족을 상대로 거침없이 꾸중하는 사람이라니…… 재미있지 않은가.
아론은 창 너머로 보이는 지안의 얼굴을 똑똑히 기억에 새겼다.
근시일 내 그가 되찾아올 여자의 얼굴이었다.
* * *
일리아스는 굳은 얼굴로 기사단장의 보고를 들었다.
“……소문이 거기까지 났는가?”
“일부러 소문을 퍼뜨리는 자가 있는 것 같습니다. 아직은 하급 능력자들 사이에서만 알음알음 알려지고 있습니다만, 상급 능력자들에게 알려지는 건 시간문제일 듯싶습니다. 아마도…… 그날 노예 경매장에서 도망친 몇몇 능력자들 때문이겠지요.”
아르킨의 보고에 일리아스의 얼굴 위로 갈등이 스쳐 지나갔다.
그날, 노예 경매장에 참석한 자들 대부분을 검거했으나 혼란을 틈타 도주에 성공한 자가 아주 없진 않았다. 그리고 도주에 성공한 이들 대개가 능력자들이다.
일리아스는 고뇌에 찬 얼굴로 아르킨을 돌아보았다. 황실 기사단의 단장이라기엔 너무도 젊은 얼굴을 하고 있는 그는, 오직 능력자로만 구성된 기사 중에서도 손꼽히는 상급 능력자였다.
그러나 그의 무력이 아무리 강한들 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바로 그 능력 탓에 결국 무너지고야 마는데. 아르킨 또한 폭주를 앞두고 있다. 일리아스는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열어 질문했다.
“아르킨, 너는 소문을 믿는가?”
“모르겠습니다.”
“네가 지금 몇 살이지?”
“올해로 스물아홉입니다.”
아르킨의 대답에 일리아스의 얼굴이 아프게 구겨졌다. 아르킨이 자신보다 몇 살 더 많은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확인받으니 새삼 속이 저렸다. 침통함을 숨기지 못하는 일리아스의 모습에 아르킨은 그간 생각해왔던 것을 차분히 꺼내놓았다.
“……전하. 내년이면 저도 서른이 됩니다. 황성에서 폭주하는 추태를 보일 순 없으니 올해를 마지막으로 영지로 돌아갈까 합니다.”
전대의 기사단장도, 전전 대의 기사단장도 모두 이러한 선택을 했다. 기실 이것은, 기사단 전체가 짊어져야 하는 숙명이었다.
삼황자 휘하의 기사단은 전원 중급 이상의 능력자로 이루어져 무력으로 따지자면 어떤 기사단과도 비교될 수 없었다. 하지만 대내외적으로 이들은 가진 바 무력에 비해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다. 나이가 들수록 폭주의 위험이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져, 서른 전에 기사직을 반납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야 하는 탓이었다. 이는 기사단의 암묵적인 규칙이었다.
그러나 말이 좋아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것이지, 죽을 자리를 찾아간다는 것이 더 알맞은 표현일 것이다. 이 사실을 알기에 되묻는 일리아스의 목소리는 짙은 낙담에 물들어 있었다.
“……많이 위험한가?”
“앞으로 일이 년쯤 더 지나면 한계가 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참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군.”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않습니까.”
그 말대로다. 폭주는 능력자들에게 정해진 수순과도 같은 것. 주어진 생을 다 살아낸 사람들이 숨을 거두듯, 능력자들 역시 폭주로 인해 죽음을 맞이했다.
다만 이들은 평범한 사람들과는 달리 자신이 언제 죽을지를 알 수 있었다. 이능을 사용할 때마다 가중되는 고통이 죽음을 가늠하는 지표가 되어준 탓이었다. 이 운명에서 벗어난 자는, 일리아스가 알기로 단 한 명도 없었다.
한때는 희망을 가지고 수많은 역사서를 뒤져보았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서른을 넘기고 살아남은 능력자가 없었다. 그나마 하급 능력자들의 경우엔 능력의 사용을 극도로 꺼릴 시 서른 후반까지 생존할 수 있었으나, 상급 능력자의 경우엔 서른을 넘기기도 힘들었다. 아르킨이 백작가의 장남으로 태어났음에도 후계에서 배제된 건 모두 이런 이유에서다.
“다시 묻지. 경은, 소문을 믿는가?”
“전하의 행동 탓에 어느 정도는 사실이 아닐까 짐작합니다.”
“그런가.”
“황녀 전하께서도…… 그 시녀에게 관심이 많으시더군요. 하지만 전하의 전속 시녀가 정말 폭주를 막는 능력을 지녔다 하더라도 결국, 저와 같은 능력자입니다. 힘을 사용하면 할수록 그 자신의 폭주 역시 가까워질 테지요.”
짐작만으로도 충분히 모든 정황을 파악하고 있는 아르킨의 말에, 일리아스의 눈빛이 침잠했다. 사실에 가까운 그 말을 부정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르킨이 말했다.
“저는…… 다른 사람의 목숨을 빌려 가며 삶을 연명하고 싶진 않습니다.”
무덤덤한 목소리에 일리아스의 얼굴이 괴롭게 일그러졌다. 순간 지안의 말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며칠이라도 좋아요. 나는 살고 싶어요.’
그런 말을 들은 이상, 강요할 순 없는 노릇이다.
* * *
제도의 사교계는 뒤숭숭하다는 말로도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위태로웠다. 그리고 이 살얼음판 같은 정세를 만들어낸 것은 비운의 황자라 불리는 삼황자 일리아스였다.
능력자로 각성한 이후, 황권 계승에서도 철저히 배제되었던 인물이다. 언제 폭주할지 알 수 없으니 그를 북부의 극지방이나 타국으로 보내버려야 한다는 여론마저 있었을 정도로 그간 일리아스의 입지는 위태로웠다.
황족임에도 불구하고 배척과 동정의 주인공이 되어야 했던 비운의 황자. 입지는커녕 변변한 세력 하나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 반쪽짜리. 그나마 황태자의 수족이 되어 간신히 운신해왔던 것이 바로 삼황자 일리아스 테리온이었다.
그랬던 삼황자가, 황제의 명을 받아 노예 경매에 가담한 귀족들을 모조리 잡아들였다. 제도 파가디안의 중앙 귀족들 중 3분의 1이 연루된 대사건이었다. 이 때문에 제도의 귀족들은 한동안 얌전히 입을 다물게 되었다. 삼황자 일리아스에 이어 황녀 이비엔마저 능력자로 각성하고 말았음에도 마찬가지였다.
본래라면 황녀의 발현을 빌미로 황녀를 삼황자와 함께 제도에서 내보내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을 것이나, 귀족 대다수가 노예 매매를 금한다는 제국의 법을 어긴 실정이다. 노예매매가 적발되지 않았다면 모를까, 모든 게 들통 나버린 이상 황실의 심기를 건드려 하등 좋을 것이 없었다.
다만 이상한 것은, 황녀가 늦은 나이에 발현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능의 과발현이 고작 한 시간 내로 그치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그처럼 늦은 나이에 발현했다면 온종일 이성을 잃은 채 날뛰어도 이상하지 않은데, 그토록 빨리 발현통에서 벗어나다니. 그간의 상식으로는 잘 설명되지 않는 일이었다.
이와 같이 비상식적인 일이 일어나면, 사람들은 으레 그 원인을 찾기 마련이다.
“삼황자 전하의 전속 시녀가 능력자들의 폭주를 막을 수 있다던데. 소문이 사실일까요?”
“글쎄요. 그런 능력에 관해선 들어본 적도 없거니와…… 그래 봤자 그 전속 시녀 역시 능력자 중 하나일 텐데요. 비슷한 예로 치유의 이능을 지닌 능력자도 있잖아요? 정말 그런 능력을 지녔다 해도 얼마 안 가 숨을 거둘 것 같군요.”
“하지만 아직 살아 있잖아요? 그리고 어쩌면, 황녀 전하의 발현이 유독 짧게 그친 것도 전부 그 전속 시녀 때문이 아닐까요? 삼황자 전하가 전속 시녀를 안고 황녀궁으로 뛰어들었다는 목격자가 한둘이 아니잖아요.”
“그렇긴 하죠. 삼황자 전하께서 그 전속 시녀를 꽁꽁 싸매고 드러내지 않으시는 것도 그렇고……. 이상하긴 하군요.”
“제 말이 바로 그거예요. 혹, 이 사실을 아시나요? 그 시녀가 노예 경매장에서 전하께 구함을 받았단 사실 말이에요.”
셀스하임 백작영애의 말에 좌중의 귀가 쫑긋거렸다. 시에나 셀스하임은 자신에게 주목하는 영애들의 시선을 즐기며 의기양양한 얼굴로 찻잔을 들었다.
“삼황자 전하의 기사단을 피해 노예 경매에서 도망친 자들의 증언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