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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화 (33/199)

33화

빠르게 움직이는 삼황자의 움직임은 들짐승처럼 기민했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짧게 감탄할 수 있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내 들려온 폭음에 지안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방향을 짚었다.

“저쪽이에요!”

황녀로 짐작되는 에스퍼의 파장이 점점 강해지다 못해 피부를 따끔따끔 찔렀다.

이윽고 황녀궁의 심처에 가까워지자, 지안은 참혹하게 반파된 건물의 내부와 허공을 부유하는 돌가루, 그 한가운데서 경련하듯 몸을 떠는 여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비엔!”

삼황자의 외침에 콩벌레처럼 몸을 웅크린 여인이 움칠 몸을 떨었다.

하나 유의미한 반응은 그게 전부였다. 외려 그 말이 신호탄이 된 듯. 무형의 능력이 허공을 맴돌며 위험스럽게 압축하기 시작했다. 허공을 부유하는 돌가루와 먼지가 아니었다면 황녀의 이능력이 위험스레 꿈틀대는 것을 알지도 못했을 것이다.

더 늦으면 안 될 것 같아 지안은 일리아스의 품에 안긴 채 서둘러 방사 가이딩을 시작했다.

각성통을 진정시키는 방법은 단순하다. 방사 가이딩으로 진정시킨 후에 접촉 가이딩으로 전환하면 각성통은 금방 사그라든다. 가이딩 강도가 높을 필요도 없고, 접촉 역시 아주 잠깐이면 된다. 다급한 나머지 삼황자까지 방사 가이딩의 범주에 들어서 버리긴 했지만, 지금 중요한 건 눈앞의 에스퍼를 진정시키는 일이다.

별수 없는 일에 신경 쓰는 걸 그만둬버린 지안은 일리아스의 품에서 벗어나 곧장 황녀에게 다가가 살며시 어깨를 짚었다.

그러자 그 손길만을 기다렸단 듯, 각성통으로 인한 경련이 뚝 멎었다. 잔떨림이 남은 황녀의 손을 맞잡으며 지안은 가볍게 등을 토닥여 주었다.

“이제 괜찮아요.”

황녀궁의 시녀들이 보았다면 무례하다 외쳤을 장면이었다. 그러나 지안의 행동을 지적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때론 이런 사소한 행동이 더없이 특별하게 가닿을 수도 있는 노릇이다. 더구나 이것이 가이드와 에스퍼의 첫 조우라면, 심지어 각성통을 잠재워준 가이드와의 만남이라면, 능력자에게 있어 이보다 더 극적인 순간은 없으리라.

마법처럼 각성통에서 벗어난 황녀는 흔들리는 눈으로 자신을 구해준 이를 응시했다.

* * *

게임을 즐기던 친구가 해 준 말이 있다. 감당이 안 되면 어그로를 끌지 말라고. 하지만 이미 찐하게 어그로를 끌어버리고 말았다면, 그렇게 끌어 버린 어그로를 감당할 수 없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정답은 도망이다.

그런데 도망칠 수가 없다. 일주일째 별다른 용건도 없이 매일 매일 삼황자궁을 방문하는 황녀 덕분에 차를 내오는 솜씨만 늘었을 뿐이다.

덧붙여 한 가지 더 늘어난 것이 있다면, 황녀가 뭐라든 눈 하나 깜짝 않고 거절할 수 있게 되었단 것 정도일까.

그도 그럴 것이 “내 전속 시녀가 되지 않겠어?”로 시작된 황녀의 말은 지난 일주일간 갖은 발전을 거듭해나가고 있었다. 시작은 소소하게 오라버니보다 더 많은 봉급을 주겠다는 제안으로 출발했으나, 지금은 발전에 발전을 거쳐 다양한 옵션이 붙었다. 이번에 추가된 옵션은 아무래도 사파이어인 모양이다.

“어때? 예쁘지?”

“그렇네요.”

“내가 소유한 남부 사파이어 광산에서 나온 최상급 사파이어야. 광산에서 산출되는 사파이어의 일 년 판매 대금은 대략 만칠천오백 골드쯤 되고, 판로도 전부 마련되어 있어서 운영도 어렵지 않아. 여기, 서류도 마련해왔어. 이거 전부 다 줄게. 그러니 내 전속 시녀가 되어 줘.”

광산의 명의 이전 서류와 영롱한 빛을 발하는 사파이어 반지가 꽤 인상적이긴 하다. 특히 저 반지는 없던 탐욕도 불러일으킬 만큼 찬란한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조금 혹하는 모습이 드러났는지 황녀의 눈빛이 기대를 담아 반짝였다.

지안은 찻주전자를 테이블에 내려놓고 잠시 대답을 골랐다. 그러자 그 짧은 침묵을 오해한 일리아스가 즉각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내 전속 시녀다. 탐내지 말고 돌아가.”

즉답하지 않은 탓인지 삼황자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이에 굴할 황녀가 아니다.

“흥! 이건 불공평해요! 오라버니 혼자 지안을 독차지할 순 없어요!”

맞는 말이다. 무심코 고개를 끄덕여 보인 지안은 삼황자가 사나운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걸 보고 아차 하며 고갯짓을 멈췄다.

하지만 이 사소한 행동마저 황녀에겐 좋은 빌미가 되고 만다.

“봐요! 지안도 그렇게 생각하는 게 틀림없어요.”

“웃기는 소리. 그러는 너야말로 내 시녀를 독차지할 속셈 아니냐.”

“실제로 독차지하고 있는 오라버니가 할 말은 아니라고 생각되는군요. 저 역시 그런 마음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저라면 오라버니처럼 지안을 성안에만 가둬두진 않을 거예요. 저는 오라버니보다 더 나은 대우를 보장해줄 수 있고 그럴 능력도 있어요.”

자신에 찬 황녀의 목소리는 그 자체로도 대단한 어필이 되었다. 별생각 없이 흘려듣다가도 어느 순간 저도 모르게 귀 기울여 듣게 될 만큼 설득력 있달까.

“무엇보다 황녀궁에서의 생활은 오라버니의 궁에서 지낸 시간과 사뭇 다를 테죠. 지금처럼 밤낮으로 감시받지는 않을 테니까요.”

마지막 말은 회심을 다한 황녀의 노림수였다. 실제로 지안은 항시 기사의 감시를 받았으며, 삼황자의 궁에서 단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는 처지였다. 이를 알아내는 건 황녀인 이비엔에게 조금도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삼황자가 주도한 대대적인 노예상 소탕 이후, 갑작스레 황성에 나타난 지안이 전속 시녀 자리를 꿰찼다는 사실은 황성에서 특히 유명한 이야기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전속 시녀가 늘 기사의 감시와 보호를 받으며 생활한다는 것도, 황성의 시종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다.

발현을 하기 전에는 이런 소식에 하등 관심이 없었다. 그저 불쌍한 오라버니가 오랫동안 마음 둘 곳을 찾지 못하다 결국 시녀에게 마음을 두게 된 것일까 하는 생각에 그쳤을 뿐이다. 그러나 발현을 하고 지안을 접하고 나니 지안의 감시를 명한 그 조치가 얼마나 합당한 것인지 알겠다.

하루아침에 능력자가 되어 버린 마당이다. 아직 햇병아리 능력자라곤 하나, 지안의 가치를 왜 모르겠는가. 아마 지안이 제 수중에 들어왔다면 나 역시 오라버니와 비슷한 선택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적당히 해야 할 것 아닌가. 오라버니는 감시와 과보호가 자아낸 답답함이 지안을 옥죄고 있음을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혹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것일지도.

그러나 사람을 그렇게 꽉 붙잡아 쥐고 있으면 그 손에 잡힌 사람은 반드시 도망을 꿈꾸기 마련이다. 가볍게 코웃음 친 황녀는 동요를 숨기지 못하는 지안에게 다시 한번 제안했다.

“내 전속 시녀가 되면 궁 안에 갇혀 지내는 것도 끝이야. 원한다면 언제든 후원에서 산책할 수 있게 해 줄게.”

“……정말이신가요?”

“그만! 계속 이런 수작을 부린다면 너라도 봐주지 않겠다. 그만 돌아가라, 이비엔.”

“지안 없이는 안 가요.”

“머리카락을 다 태워 먹어야 정신을 차릴 테냐?”

“오라버니의 궁을 반파시키는 데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거로도 충분해요. 혼란을 틈타 지안을 데려갈 수 있다면 참 좋겠는데요.”

졸지에 가운데 낀 채로 이 한심한 말다툼의 관람객이 되고 만 지안은 어째야 좋을지 모를 얼굴로 한숨을 삼켰다.

가이드를 두고 에스퍼들이 서로 으르렁거리는 건 각성자 센터에서 숱하게 보았다. 이를 중재하는 건 보통 가이드다. 에스퍼들 사이에 일어난 분란을 훌륭히 진압하는 것도 가이드의 책무 중 하나니까.

하지만 그건 그냥 이론일 뿐이고, 뛰어난 가이딩 실력을 갖춘 가이드가 아니라면 대개 에스퍼들의 싸움에 휘말려 절절매는 가이드가 되어버리기 마련이다.

물론 주도권을 움켜잡는 가이드도 있다. 하지만 이는 가이드의 실력이나 성격이 대단할 때나 가능한 일이다. 말 그대로, 가이드가 ‘지랄을 떨어야’ 에스퍼 간의 싸움이 조금이나마 수그러드는 것이다. 가이드 중에서는 중재를 하다 하다 안 돼서 네가 죽든 말든 가이딩 중단하겠다고 협박하는 사람도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자신은 애초에 가이딩을 제대로 시작한 적이 없으니 가이딩 중지를 빌미로 한 협박은 불가능하다.

중재할 생각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일주일 사이 삼황자와 황녀의 신경전이 점점 심화되어가고 있었으니까. 다만…….

“두 분 다 그만 하세요.”

“당장 꺼져라. 봐주는 것도 오늘까지다. 다시는 내 궁에 방문할 생각 마라, 이비엔.”

“선택은 지안이 하는 거예요. 오라버니가 그걸 강제할 순 없을 텐데요.”

……이 두 사람이 자신의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듣는다는 게 문제다. 황족이라는 높으신 신분 때문인지 좋은 말로 하면 당최 알아듣질 못한다.

그래, 뭐 여기까진 좋다. 태어날 때부터 황족으로 떠받들어져 자라왔을 테니 십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서로 으르렁거리며 싸우다가 성질을 못 이겨 능력을 발현시켜버리는 일은 없어야 할 것 아닌가.

허공에서 갑자기 화르륵 튀어나온 불씨가 테이블보를 검게 태워 먹었다. 동시에 황녀의 손에 우아하게 들려 있던 찻잔이 별안간 퍽! 소리를 내며 터져나간다.

사방으로 튄 유리조각과 흘러내린 찻물이 드레스를 엉망으로 만들고 있는데도 황녀는 하등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옷차림이 어찌 되든 삼황자와의 눈싸움이 더 중요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황녀가 떠나고 난 뒤 뒷정리를 하는 건 나였다. 삼황자가 다 태워 먹은 테이블보를 내다 버려야 하는 것도 나다.

“둘 다 그만 하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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