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창문을 닦다 말고 지안은 차례차례 손가락을 꼽아보았다.
“……벌써 한 달인가?”
긴가민가하며 다시 날짜를 헤아려 보았다. 오차는 없었다. 황성에서 시녀 노릇을 한 지도 벌써 한 달째였다.
한 달이나 지났지만, 도통 시녀 생활에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딱히 일이 어려운 건 아니지만…… 하녀만 있는 삼황자 궁의 유일한 시녀라 홀로 겉도는 데다, 황자궁 바깥으로 출입하는 것도 막힌 상태였다. 장소가 감옥에서 황자궁으로 바뀐 것뿐, 갇혀 있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다고 봐야 했다.
지안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게이트에 휘말려 차원을 넘고 낯선 세상에 떨어진 이후로 한 번도 자유로워 본 적이 없다. 유일하게 누릴 수 있었던 자유는 공작과 함께 만달렌으로 향했던 사흘뿐…….
“무슨 생각을 그리 하지?”
별안간 훅 가까워진 일리아스를 피해 지안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동시에 창문을 닦던 걸레가 바닥으로 툭 떨어지고, 무의식적으로 흘러나오던 기운도 그대로 멎었다. 노골적으로 꺼리는 지안의 모습에 일리아스는 한숨을 삼키며 물러났다.
“내가 뭘 했다고 그런 반응인가.”
그 말에 지안은 눈썹을 구겼다. 그걸 말해줘야 아는 거야? 갑자기 접근해서 놀라게 한 게 누군데!
하지만 아무리 할 말이 많아도 그걸 다 내뱉을 순 없다. 상대는 지체 높으신 삼황자 전하니까. 지안은 짜증을 삼키며 입을 다물었다. 이런 지안의 침묵은, 일리아스에게 경계심의 한 갈래로 읽혔다.
“……능력을 쓰라 강요하는 일은 없을 거라 하지 않았나.”
불퉁하게 이르는 말에 지안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 말대로 그간 단 한 번도 가이딩 강요를 받은 적이 없다. 없지만……. 이렇게 주변을 맴도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단순한 방사 가이딩이라고 해도 그에겐 첫 가이딩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가이딩에 목을 매는 에스퍼의 특성을 생각하면, 지금 당장은 강요할 생각이 없다며 점잖게 굴어도 얼마 안 가 가이딩을 강제할 것이다.
에스퍼가 고통을 느낄 정도로 막무가내식의 공격적 가이딩을 했는데도 결과가 이 모양이다. 이쯤 되니 삼황자와의 매칭률이 높아서 쓸데없이 가이딩 효율이 좋았던 게 아닐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의심마저 들 정도다. 기껏 폭력적으로 가이딩을 진행한 보람이 전혀 없었다. 떨어뜨린 걸레를 주우며 지안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조금, 놀란 것뿐입니다.”
딱딱한 공대에 일리아스의 얼굴도 덩달아 굳었다. 그러나 긴장으로 꼼지락거리는 지안의 손가락이 눈에 들어오자 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지안이 자신을 벌레 보듯 피한다는 사실은 일리아스도 잘 알고 있었다. 알았지만, 고작 한 달 사이 무섭게 싹튼 마음은 자꾸만 발길을 그녀에게로 향하게 만들었다.
한 번도 이런 적 없었기에 더욱 당황스러웠다. 그저, 정신을 차리고 나면 온 신경이 지안에게로 향한 뒤였다. 미처 깨닫치 못한 사이 누군가를 남몰래 뒤쫓아 바라보게 되는 건 정말 이상한 경험이었다. 내가 왜 이러지 하며 반문도 해 보았지만, 깜빡 생각에 잠겼다 깨어나면 늘 시야에 그녀가 들어와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시야에 들어온 지안을 바라보고 있다 보면, 뭐라도 말을 걸고 싶어 조바심이 났다. 조금 전 무심코 가까이 다가가 버리고 만 것도…… 원인 모를 초조함 탓이었다.
그러나 무슨 시도를 해 본들, 일리아스는 지안과 변변히 대화다운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다. 일방적인 명령을 듣고 수행하는 것 외엔 침묵을 고수하는 지안의 태도 탓이었다. 마음 같아선 뭐가 그리 못마땅해서 그따위로 구느냐고 쏘아붙이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마저 왠지 모르게 주저하게 되는 것이다. 지안의 생각을 모르는 일리아스로서는 답답해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말 몇 마디로도 잔뜩 경계의 날을 세우는 상대에게 그런 티를 낼 순 없는 노릇이다.
결국, 할 수 있는 말은 별 필요도 없는 애꿎은 지시뿐이었다.
“후…… 차를 내와라.”
“네.”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인 지안이 청소도구를 정리해 물러났다.
그 순간, 땅이 가볍게 진동하며 굉음이 일었다.
‘뭐지?’
멀리서부터 들려온 듯했지만, 잘못 들을 수가 없을 정도로 큰 폭발음이 놀랍도록 빠르게 귓전을 파고들었다. 경비와 기사들이 상주하며 번을 서는 황성에서 결코 들려올 일 없는 소리이기에 이 폭발음은 더욱 이질적이었다. 그것은 앞으로 있을 참사를 예고하는 신호탄 같았다.
지안을 영문을 몰라 하며 일리아스를 바라봤다. 혹시 황성에서 폭약 실험이라도 하는 건가 싶어서였다. 하지만 당황한 일리아스의 표정을 보니 그것도 아닌 듯싶었다.
바로 그 순간, 강렬한 파장이 전신을 훑어 나갔다. 황성 안에서 누군가 각성한 게 분명했다.
깨달음과 동시에 집무실의 문이 벌컥 열리며 기사들이 뛰어 들어왔다.
“전하! 황녀 전하가 발현하셨습니다! 과발현된 이능을 제어하지 못하고 계십니다! 진정시키는 것도 실패했다고 합니다!”
기사들의 비통한 외침에 지안은 고개를 갸웃했다. 지칭이 다소 다르긴 했지만, 상황상 대충 황녀가 각성했고, 그 과정에서 각성통을 겪는단 말인 것 같았다.
그런데 그게 왜?
지구에선 각성자의 탄생을 반긴다. 각성자가 많아져야 게이트 처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급작스럽게 각성통을 앓는 에스퍼들로 인해 일부 재산 피해가 있긴 하지만, 대부분 각성자 센터에서 보상해주기 때문에 일반인은 가이드 혹은 에스퍼로 각성하는 걸 로또 당첨에 비유한다.
그런데 지금 기사들이 보이는 반응은 마치…… 각성이 큰 비극이라도 되는 양 굴고 있었다.
물론, 가이드가 없으니 각성을 꺼리는 걸 이해는 한다. 하지만 그렇게 단순히 이해하고 넘어가기엔 삼황자의 침통한 표정이 몹시 이상했다. 각성했다고 당장 폭주로 죽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반응할 일인가?
의아해하던 사이, 일리아스가 말했다.
“당장 기사단을 황녀궁으로 급파한다. 황녀가 이성을 되찾지 못한다면…… 죽여도 좋다.”
뭐? 지안은 놀라 고개를 돌렸다. 내가 방금 제대로 들은 건가? 죽여도 좋다니? 각성통을 못 견뎌냈다고 에스퍼를 죽여? 폭주도 아니고, 각성통은 길어야 하루면 끝나는 건데?
놀라 굳어버린 지안을 일리아스는 서둘러 지나쳤다.
어릴 적 발현한 자신과 달리 황녀는 열일곱이었다. 어린아이의 발현은 능력자로서의 힘이 덜 여물어 유사시 통제가 가능하나, 열다섯 이후에 발현하게 되면 그 힘이 강력하고 통제가 어려워 주위에 큰 피해를 입혔다.
최악의 경우엔 이능의 과발현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폭주하기도 한다. 뒤늦게 발현한 능력자로 인해 사망한 사람의 머릿수가 수십이 넘어가기도 했다. 몇 시간 내 이능의 제어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바로 그 몇 시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될 것이다.
황족으로서 그러한 피해는 용납될 수 없는 법. 유사시엔 황녀의 목을 쳐서라도 힘의 사용을 강제로 멈춰야 했다. 일리아스는 부득 이를 갈았다. 황녀가 발현 없이 이대로 성장해주기만을 황실의 모든 사람이 바랬건만! 그 바람마저 오늘을 마지막으로 물거품이 되었다.
가장자리로 비켜선 지안은 서둘러 달려 나가는 일리아스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함께 가야 하나? 각성통이라면 가이드와의 접촉만으로도 금방 멈출 수 있다. 아주 약간의 가이딩만으로도 충분하다.
“설마, 정말로 죽이려는 건…… 아니겠지?”
설마 하는 마음으로 중얼거려 보았으나, 뒤돌아 나간 황자의 뒷모습은 전에 없이 결연했다.
고민하던 지안은 서둘러 청소도구를 내팽개치고 삼황자의 뒤를 따라 달렸다. 달린다기보단 종종거림에 더 가까운 모양새이긴 했지만, 시녀복이 치마인 탓에 삼황자처럼 속도를 내는 건 무리였다.
지안이 따라오는 것을 느낀 일리아스는 지안을 한 차례 돌아보았다. 갑자기 무슨 꿍꿍이로 뒤따르는 건지 모르겠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추궁할 여유가 없었다. 지안을 저지시켜야 하나 고민하는 와중에도 폭음이 계속해서 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폭발음 사이엔 간간이 비명소리가 섞여 있었다. 이를 악문 일리아스는 그대로 쏘아져 나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리아스는 황녀궁이 시원스럽게 반파된 것을 볼 수 있었다. 마치 공성 무기로 파괴한 것 마냥 성의 곳곳이 무너져 있었다.
무너진 대리석에 깔린 하녀가 비명을 지르고, 떨어져 내린 돌덩이에 머리를 다친 시종이 두려움에 찬 얼굴로 황녀궁에서 빠져나온다. 일리아스는 시종을 붙잡고서 물었다.
“황녀는 어디 있는가!”
“치, 침실에 계십니다.”
시종이 대답하자, 기다렸단 듯 황녀궁 안에서 콰앙! 하며 폭발음이 또 한 번 울렸다.
어찌어찌 간신히 삼황자를 뒤따라온 지안은 지축을 뒤흔드는 폭발음에 질린 얼굴로 걸음을 멈췄다. 멀리서 일어난 폭발인데도 공기가 찌르르 흔들리는 게, 잘못 휩쓸렸다간 뼈도 못 추릴 것 같았다.
보통은 가이드 보호를 위해 에스퍼 둘이 동행하는 게 정석인데……. 하지만 삼황자가 있으니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지안은 그런 생각을 하며 황녀궁을 향해 뛰어드는 일리아스를 뒤쫓았다.
하지만, 그런 지안의 시도는 일리아스의 저지로 인해 곧바로 가로막히고 말았다.
“오면 안 돼! 넌 거기 있어라!”
“아니요. 같이 가요.”
“위험하다니까!”
버럭 소리치는 일리아스의 모습에 지안은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 위험한 거 누가 모르나? 알면서도 가는 거다. 고작 각성통 하나 때문에 사람을 죽이겠다는데, 그걸 나 몰라라 할 순 없는 노릇 아닌가. 에스퍼로 이뤄졌다는 황실 기사단을 외면한 내가 할 생각은 아니지만…….
상대가 황녀라는데, 도움을 주면 뭐라도 얻어낼 수 있을지 모른다. 예를 들자면 삼황자의 궁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해 준다든가. 아니면 공작에게 소식을 보낼 수 있도록 도움을 받을지도 모를 일 아닌가.
“돌아가라! 너와 입씨름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
입씨름하고 싶지 않다는 말에는 지안도 동의했다. 지안은 대답 없이 삼황자의 손을 잡았다. 정말 이러고 싶지 않지만, 그를 설득하는 데는 대화가 불필요하다. 필요한 것이 있다면 오직 가이딩뿐이다.
맞잡은 손에서부터 느껴지는 가이딩에 날 선 일리아스의 표정이 힘없이 허물어졌다. 그런 그에게 지안이 말했다.
“저는 황녀 전하를 진정시킬 수 있어요.”
“…….”
“제가 필요하실 거예요.”
그 말을 끝으로 손을 놓자, 일리아스는 그대로 지안을 껴안고 달렸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저항하려던 지안은 이내 그가 뭘 하려고 하는지를 깨닫고 얌전히 몸을 맡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