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겨우겨우 고난을 피했나 했는데 돌고 돌아서 다시 고난을 맞았다. 쥐똥 냄새와 먼지, 거미줄을 친구삼아 구석에 웅크려 있으려니 온갖 종류의 서러움이 울컥울컥 흘러넘쳤다. 노예 경매장이든 황성이든 감옥은 다 똑같았다.
차라리 도둑질이라도 해서 갇힌 거라면 이렇게 억울하진 않을 거다. 배가 고파서 특히 더 서럽다. 이럴 때를 위해 비상 알약이 있는 건데, 매칭률 검사기와 함께 죄다 빼앗겨 버렸다. 허전해진 손목의 감각에 줄줄 눈물이 흘렀다.
그게 없으면 가이드 판독도 할 수가 없는데……. 매칭률 검사기가 그나마 내게 남은 유일한 지구의 물건이었는데……. 눈앞이 막막하다는 게 바로 이런 거구나 싶었다.
단순히 게이트 발현에 휘말린 줄 알았는데 왜 이렇게 되어 버린 걸까. 감당하기 힘든 일은 왜 연달아 생기는 걸까. 차라리 지구에서 반쪽짜리 가이드로 손가락질받을 때가 더 나았다. 맹탕 가이드, 가짜 가이드라는 멸시와 조롱이 더 나았다.
“우나?”
불현듯 들려온 목소리에 지안은 서둘러 눈가를 훔쳤다. 고개를 들자 인기척도 없이 나타난 황자가 예의 그 못마땅한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게 내가 제안했을 때 받아들였어야지.”
이어진 조롱에 지안은 참았던 분노를 폭발시켰다.
“내가 왜? 내가 왜 그런 제안을 받아들여야 해!”
울먹거림이 섞인 외침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분노만은 손에 잡힐 듯 생생했다. 일리아스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지안의 분노를 이해했다.
“그게 우리 같은 능력자의 숙명이니까.”
뭐? 무슨 엉뚱한 말이야 저게?
눈을 깜빡이는 지안에게 일리아스가 말했다.
“우리에게 이능은 축복이자 저주지. 언제 능력자로 발현했는진 몰라도 대충 스물은 넘긴 것 같은데…… 피차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입장 아닌가? 나도 안다. 최대한 능력을 사용하지 않으면 며칠 정도는 더 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아무리 발악해봐야 서른도 못 넘기는 게 우리 간의 상식 아닌가. 그럴 바엔, 그 능력을 제국을 위해 쓰는 것이 더 가치 있지 않나?”
엄숙한 이야기에 지안은 차마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 침묵을 납득으로 받아들인 일리아스는 차분히 설득을 이어나갔다.
“지금 이 순간에도 폭주하는 능력자들로 인해 애꿎은 일반인들이 피해를 당하고 있다. 나는 황족으로서 그들이 폭주를 일으켜 일반인들을 학살하기 전에 처단해야 한다. 황실이 능력자로 구성된 기사단을 운용하는 이유지. 때문에 나는, 네 도움이 필요하다.”
그 말에 폭발할 것처럼 팽창하던 서러움이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지고 말았다. 지안은 떨떠름하게 물었다.
“그러는 당신도 에스퍼…… 아니, 능력자 아닌가요?”
“그렇지.”
“당신…… 아니, 황자 전하가 폭주하면, 그땐 어떻게 되는 거죠?”
“죽겠지. 폭주가 가까워지면 사실을 알리고 얌전히 목을 내놓는 것이 불문율이다.”
일리아스의 말에 지안은 소름이 돋아난 팔을 애써 문질렀다. 그런 말을, 저토록 담담하게 입에 담다니. 내용이 워낙 충격적이라 그런지 태양처럼 화려한 외모가 한없이 씁쓸하고 슬프게 보일 지경이었다.
“……최대한 죽음을 피하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때로는 피할 수 없는 것도 있기 마련이다.”
“…….”
“다시 제안하지. 기사단에 들어와라. 최고로 대우해주마.”
이걸 뭐라고 답해야 하는 걸까.
이 세계에서 에스퍼를 능력자로 지칭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저 황자가 나를 능력자, 그러니까 에스퍼로 착각하고 있는 것도 알겠다. 듣고 보니 내 억울함은 한 수 접어줘야 할 정도로 사정이 딱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에스퍼로 이루어진 기사단에 들어가라고?
불가능하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감당할 수 없다. 당장 그 뒤에 벌어질 일이 빤히 보였다.
아프리카나 제삼세계에선 가이드를 두고 에스퍼들이 전쟁까지 불사하는 판국이다. 가이드를 둘러싸고 벌어진 각종 사건·사고들을 생각하면, 가이드인 제가 에스퍼로 이루어진 기사단에 들어가는 건 짚을 지고 불 속에 뛰어드는 것과 같은 형국이었다.
명색이 S급 가이드라지만 해도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섣불리 가이딩을 시작했다가 에스퍼들끼리 싸움이라도 나면? 기사단이 와해되는 건 시간문제다. 눈앞의 황자는 그 사실을 모른다.
게다가 매칭률이 다 나오는 것도 아니잖은가. 노예 경매장에서 그랬듯 에스퍼의 파장을 죄다 느낄 수 있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몇몇에겐 가이딩이 될지도 모르나, 운 없는 누군가에겐 가이딩을 해 주지 못할 것이다.
결정적으로, 모두의 첫 가이드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각성자 센터에서 가이드 한 사람이 케어 가능한 에스퍼를 최대 세 명으로 정한 건 다 이유가 있다.
지안은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뭇 절절한 사연이긴 하지만 덮어놓고 도움을 줄 순 없다. 애매한 동정이라면 차라리 안 하는 것이 낫다. 그런 식으로 무작정 손을 뻗었다가 무슨 파국을 맞을지 모른다.
마침 황자의 설득에 대응할 적당한 거짓말이 있었다.
“……며칠이라도 좋아요. 나는 살고 싶어요.”
“죽는 날까지 이곳에 갇혀도 좋단 말인가? 감옥에서 며칠 더 연명하는 것이 네가 바란 삶인가?”
“북부로 돌아가고 싶어요.”
대화는 그것으로 끝났다. 첨예한 침묵만이 쇠창살을 더욱 서늘하게 만들 뿐이었다.
지안을 노려보던 일리아스는 손에 든 연고와 팔찌를 지안에게 내던졌다.
“발라라. 얼굴의 부기를 가라앉혀 줄 거다.”
감옥의 바닥을 뒹구는 그것들을, 지안은 서둘러 집어 들었다. 얼굴에 바를 연고가 반가워서 그런 건 아니었다. 지안이 주목한 것은 황자가 던진 팔찌였다.
내 매칭률 검사기!
지안은 반색하며 그것을 집어 들었다. 지하 경매장을 빠져나오면서 이걸 찾아야 한다고 난리를 쳤는데, 설마 찾아다 준 건가? 황자가?
매칭률 검사기를 쥔 채 놀라 올려다보는 지안에게 일리아스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유품이 맞긴 한 모양이군.”
유품이 아니다. 난리통에 어떻게든 매칭률 검사기를 되찾으려고 없는 말을 마구 가져다 붙인 것에 불과하다. 유품이니 뭐니 하는 새빨간 거짓말도 그때 한 것 같다.
“고, 고맙……”
“생각이 바뀌면 말해라.”
그 말을 마지막으로 일리아스는 지안을 등지고 돌아섰다.
* * *
일리아스는 밤새워 뒤척였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이 누구에게서 기인하는 건지 모르진 않았다. 감옥에 가둔 그 여자. 그 여자가 시야에 보이지 않는단 사실만으로도 심장이 섬뜩하게 내달리며 온갖 불안을 양산하고 있었다.
두 번이나 자신의 제안을 거절한 여자다. 그 점을 생각하면 여전히 괘씸하기 이를 데 없었다. 평소라면 이쯤에서 잊어버리고 몇 달 감옥에 가둬 둔 후 적당히 처분을 결정지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려고 눈을 감아도, 그녀를 감옥에 수감시킨 명령을 철회해야 할 이유만 자꾸 찾게 된다.
지안을 용서해야 할 이유를 찾다가 뜬눈으로 밤을 새워 버린 일리아스는 더는 참지 못하고 지안을 불러왔다. 덕분에 이른 아침부터 기사들에게 끌려 나온 지안은 어안이 벙벙한 채로 일리아스의 말을 들었다.
“내 전속 시녀가 돼라.”
“……네?”
“기사단에 입단하는 건 싫다고 하지 않았나.”
그건 그렇지만…… 전속 시녀라니?
“선택해라. 거절하거나, 계속 수감 생활을 하거나. 둘 중 하나다.”
그 말에 지안은 얼떨떨한 얼굴로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감옥에 있는 것보단 시녀 노릇이 나을 것 같았다. 적어도 시녀를 감옥에서 재우진 않을 것 아닌가.
“하, 할게요.”
“하녀장에게 말해 두었으니 따라가도록.”
일리아스의 고갯짓에 기사들은 지안의 손목에 채운 족쇄를 풀어 주었다.
잠자코 모든 상황을 지켜본 황성 하녀장은 상급 하녀를 시켜 낭패한 표정으로 서 있는 지안을 데려오게 했다. 제대로 된 설명도 없이 집무실에서 쫓겨나듯 벗어나게 된 지안에게 하녀장이 말했다.
“우선 씻겨놓아야겠군. 방을 배정해줄 테니 오늘 하루는 쉬어도 좋습니다. 자세한 건 사라, 네가 설명해 주도록.”
“네. 하녀장님.”
공손히 응대한 상급 하녀는 하녀장이 자리를 뜨자 곧바로 지안을 돌아보았다.
“자, 들으셨지요? 절 따라오시면 됩니다. 우선 숙소부터 알려드릴게요. 그다음에 목욕을 하고, 시녀복을 맞추는 게 좋겠어요. 수선실의 하녀들에게 부탁하면 내일 중으로 시녀복을 받아보실 수 있을 거예요. 그때까지 임시로 입을 걸 드릴게요. 찾아보면 남는 시녀복이 있을 거예요. 옷을 줄여 입어야 할지도 모르니 실과 바늘도 준비해야겠네요.”
“……잠깐, 잠깐만요. 이렇게 갑자기요?”
“전하께서 그리하라 명하셨잖아요? 전속 시녀가 되신 걸 축하드려요.”
축하라니. 지안은 잠시 말문을 잃었다.
“저는 사라 메이엣이에요. 상급 하녀 중 하나고, 삼황자 전하의 궁에 배정받은 지 삼 년이 되었답니다. 모르시는 것이 있다면 언제든지 물어보셔도 좋아요. 단, 질문은 업무시간에만 받겠어요. 음. 우선 따라오세요. 씻고, 뭐라도 좀 드시는 게 좋겠어요. 그렇죠?”
“……네.”
그 말대로다. 우선은 씻고, 뭐라도 좀 먹자. 그래야 머리가 좀 돌아갈 것 같았다. 지안은 비척거리는 걸음으로 사라를 뒤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