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화 (30/199)

30화

“너는 대체 정체가 뭐지?”

“……북부인입니다.”

부족한 설명에 일리아스의 눈썹이 휘자 지안은 얼른 말을 덧붙였다.

“불운하게 노예상들에게 인신매매를 당했고요.”

“아무리 봐도 북부인처럼 보이지 않는다만.”

“…….”

“하. 됐다. 그보다, 대체 어떻게 한 거지?”

“어떻게라니요?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는데요. 보시다시피 저는 평범한…….”

지안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일리아스의 주먹이 테이블을 내려쳤다.

쾅!

순간, 지안은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저도 모르게 질끈 감아버린 눈을 뜨자, 내리침 한 번에 반쯤 쪼개져 버린 테이블 상판이 눈이 들어왔다.

아니, 주먹으로 테이블 좀 내려쳤다고 테이블이 쪼개져? 심지어 상판이 대리석인데도? 비상식적인 힘에 절로 두려움이 일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단단히 주눅이 들어버린 지안에게 일리아스가 살벌한 목소리로 말했다.

“평범한 여자는 노예 경매에서 자신이 고작 칠백오십 골드짜리로 보이냐는 말을 하지 않는다.”

음산한 추궁에 지안은 말을 잃었다.

아니, 붙잡혀온 다른 여자들은 기사들의 안내를 받아 집으로 돌려보내졌는데 왜 나는 황성까지 끌려와 이런 고초를 겪는 걸까. 생각할수록 억울함이 퐁퐁 샘솟았다.

물론, 꼼짝없이 노예로 팔릴 뻔했다는 걸 생각하면 지금 이 상황 자체가 대단한 행운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지하 노예 경매장에서 방사 가이딩이라는 미친 짓을 벌였으니 지금과 같은 순간을 맞이한 건 어느 정도는 자업자득이었다. 방사 가이딩을 시작하며 이런 일이 생길 거란 걸 어찌 각오하지 않았겠는가.

그렇지만, 각오했다고 해서 그게 다 감당이 된다는 뜻은 아니다.

겁먹은 얼굴로 침묵을 고수하는 지안을 일리아스는 못마땅한 얼굴로 노려보았다. 지하 경매장에서 느낀 미증유의 힘은 분명 이 여자에게서 나왔다.

지안의 어깨를 손으로 짚고 조그만 머리에 턱을 얹으며 느꼈던 희열은 말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감각을 송두리째 흔드는 쾌감과 안도감은 일리아스가 평생 단 한 번도 맛보지 못했던 평화 그 자체였다.

산 채로 내장이 불태워지는 오랜 고통이 일순간 소거되었던 찰나를 그는 도무지 잊을 수가 없었다. 이능의 힘을 사용할 때마다 착실히 누적되어 왔던 고통이 일거에 가시는 기적. 눈앞의 여자는 분명 그 기적을 이루어낸 장본인이었다.

본인은 극구 그 사실을 부정하려 하지만, 그날 노예 경매장에 있었던 능력자 모두 본능적으로 이 여자를 얻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으리라.

이는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이 여자는 이능의 고통을 소거하는 능력을 지녔다. 그것이 이능의 한 갈래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능을 소거하는 이능으로 인해 여자가 고통받는다 하더라도 상관없다.

중요한 건, 그녀에게 그러한 능력이 있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노예 경매장에서 했던 걸 다시 해봐라.”

일리아스의 명령에 지안은 애써 발뺌했다.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일반인에 불과…….”

“목을 베어주랴?”

진심이다, 저건. 지안은 울며 겨자 먹기로 가이딩 차단을 풀었다.

희미하게 흘러나오는 기운에 딱딱하게 굳어 있던 일리아스의 표정이 스르르 풀렸다. 온몸의 감각을 송두리째 그슬리던 고통이 얼음을 만난 듯 천천히 식어가고 있었다. 난생처음 맛보는 안온함이었다.

‘…이 정도면 됐겠지?’

넋을 놓은 채 지안의 방사 가이딩에 취해 있던 일리아스는 눈치를 보던 지안이 슬그머니 방사 가이딩을 관두자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네 능력은 치유인가?”

“아니요. 사람을 치료하는 능력은 없어요. 이건, 그냥…….”

제가 가이드라서 그래요. 지안은 무심코 뱉어낼 뻔한 말을 꾹 눌러 삼켰다.

공작의 말대로라면 이곳 세상엔 가이드가 없다. 가이드 운운해봤자 상대방은 그게 뭔지 한 번에 알아듣지도 못할 테고 설명하기도 어렵다.

결정적으로, 가이드임을 밝혀서 좋은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잘해봐야 가이딩 착취나 당하지 않을까? 황자인지 뭔지 하는 이 남자의 강압적인 태도를 보건대 십중팔구 그럴 것이다.

생각하던 와중, 황자가 중얼거렸다.

“……이능의 고통을 소거하는 이능은 처음이군.”

고통을 소거하는 이능이라니? 설마 나를 에스퍼로 착각한 건가? 이어진 일리아스의 중얼거림에 지안은 자신의 짐작이 사실이란 걸 깨달았다.

“하지만 능력자들은 대개 뛰어난 신체 능력을 타고날 텐데 너는 왜 이렇게 약골이지? 타고난 회복 능력도 형편없는 것 같군. 능력자가 맞긴 한 건가?”

그렇게 말하는 일리아스의 시선은 아직 붓기가 다 빠지지 않은 지안의 뺨에 가 닿아 있었다. 에스퍼들 대부분이 뛰어난 자기 치유 능력을 보유하고 있는 걸 생각하면 황자의 넘겨짚음도 무리는 아니었다.

지안은 어처구니없는 심정을 애써 숨기며 황자의 오해를 반겼다. 가이드란 사실이 밝혀지느니 멋대로 짐작하고 착각해주는 게 더 속 편하다. 어쨌건 할 말이 있다면 지금 해야 할 것 같았다. 가이딩 덕분인지 뭔지 몰라도, 조금 전보다 표정이 덜 험악하지 않은가.

“저어…… 그보다 황자 전하. 다른 사람들은 모두 고향으로 돌아간다던데요.”

“그래서?”

“북부로 돌아가고 싶어요.”

“불허한다.”

“네? 어째서죠?”

“너는 여기 남아 능력을 사용해.”

싫은데요. 이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아 올랐다. 잠시 표정 관리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지안의 표정에 일리아스는 혀를 차며 말을 덧붙였다.

“황실에 능력자들로 구성된 기사단이 있다는 건 너도 알 것이다. 대우는 섭섭지 않게 해주지.”

능력자들로 구성된 기사단이라니? 지안은 기겁했다. 안전핀 뽑힌 폭탄이 데굴데굴 발치에 굴러오면 바로 이런 느낌일까!

“저는 그런 대우 같은 건 바라지 않아요! 북부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잖아요!”

“싫다면 황성의 지하 감옥에 구금하겠다.”

“뭐? 하! 그러시던가!”

지안의 거센 반항에 일리아스의 눈매가 사납게 굳었다.

“바란다니 그리해 주지.”

섬뜩한 목소리에 지안은 잠시 멈칫했지만 곧 안도했다. 순간 화를 못 이겨 버럭 소리친 게 후회스럽긴 했으나, 에스퍼로 이루어진 기사단을 홀로 가이딩하느니 차라리 감옥이 더 나았다.

그래. 적어도 노예로 팔려 가는 건 아니잖은가. 며칠, 아니 몇 달간 갇혀 있어도 좋다. 억울함은 부차적인 문제다. 우선 살고 봐야 할 거 아닌가. 모험은 지하 노예 경매장에서 방사 가이딩을 한 것으로 충분했다.

물론 방금 한 말도 충분히 모험에 가깝긴 했지만……. 상대는 황자씩이나 되는 신분 아닌가. 말 좀 고깝게 했다고 사람을 팰 것 같진 않았다. 살다 살다 에스퍼에게 얻어맞는 가이드가 되는 건 아닌가 했는데, 다행히 그런 신세만은 면한 걸까.

분명한 건, 더는 에스퍼에게 자신의 존재를 노출하고 싶지 않다는 것뿐이다.

“끌고 가라.”

일리아스의 말에 대기하던 기사들이 기다렸단 듯 지안을 연행해갔다.

순순히 따라나서는 지안의 눈동자 위로 드러난 고집스러움에 일리아스는 속으로 혀를 찼다. 감옥에 가두겠다고 하면 겁먹고 수그러들 줄 알았는데 묘한 데서 강단과 고집이 있다. 그래도 능력자는 능력자인 건지, 황족인 자신의 앞에서 성질을 부릴 만큼 대담했다. 일리아스는 기사들을 따라 사라지는 지안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질 못했다.

며칠 가둬두면 정신을 차리겠지. 하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당장 다시 불러세우고 싶은 이중적인 마음이 첨예하게 충돌했다.

능력자의 고통을 경감하고 해소하는 능력이라니……. 상식과 상상을 뛰어넘는 희귀한 이능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그녀와 같은 능력자는 단 한 번도 나타난 전례가 없었다. 역사에도 기록된 바 없는 일이다.

허나 그런 능력을 지녔다 하더라도, 능력자로서 감내해야만 하는 본인의 고통마저 경감시키진 못하겠지. 황성에 남아 능력을 사용하란 명령을 딱 잘라 거절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능력의 사용을 극도로 꺼리는 태도. 차라리 감옥을 택하고 말겠다는 고집스러움. 심히 못마땅한 태도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다. 자신이 그렇듯, 그녀 역시 폭주로 죽고 싶진 않을 테니.

일리아스는 짐짓 주먹을 쥐었다 펴 보았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온 신경이 열기로 녹아내리는 것 같은 끔찍한 고통에 시달렸는데, 그녀가 능력을 사용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모든 감각이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놀라운 이능이었다. 아주 잠깐이었는데도, 여자와 접촉했을 때 느꼈던 선명한 전율이 반복적으로 떠올라 뇌리에서 가시질 않았다. 폭주를 앞둔 능력자라면 납치를 감행해서라도 그녀의 신병을 확보하려 들 것이 분명했다. 자신이라도 그럴 것 같았다.

“지안이라 했던가…….”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했다.

그녀를 얻으면, 폭주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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