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이윽고 경매가 시작되자 노예상들은 감옥의 노예를 줄지어 내보내기 시작했다. 남녀 할 것 없이 다들 울먹이고 흐느끼며 감옥 바깥으로 끌려나갔고, 곧 지안의 차례가 되었다.
순순히 노예상들의 지시에 따라 감옥 바깥으로 나온 지안은 삼엄한 감시와 조롱을 받으며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다.
지안은 긴장한 채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하 경매장은 분명 노예를 판매하는 곳이었지만, 음울하다기보단 활기찬 분위기였다. 곳곳의 장식과 생화 탓에 경매장은 고급 상점에 딸린 조그만 소강당처럼 보였다. 신기한 눈으로 이곳저곳을 구경하는 지안의 모습에 노예상 여자가 혀를 차며 중얼댔다.
“저거, 머리에 이상이 있는 상품은 아니겠지? 지능이 조금 낮은 거 아냐?”
그 말에 지안은 조금 억울해졌다. 팔려나가는 노예의 태도로 적합한 모습을 보이지 않은 건 사실이지만, 가이드다 보니 노예로 판매된다는 것보단 곳곳에서 느껴지는 에스퍼의 파장이 더욱 신경 쓰이는 요인이기 때문이었다.
말대꾸하지 않은 덕분에 시비가 붙진 않았으나 기분은 확실히 나빴다. 지하 경매장 구경 좀 했다고 이런 취급을 받다니……. 하지만 다들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와중에 호기심을 드러낸 건 맞으니, 이상하게 보여도 할 말이 없다.
그러나 지안도 나름대로 생각해둔 바가 없진 않았다. 앞서 올라간 여자가 오백 골드에 판매되는 모습을 처음부터 빠짐없이 목격한 지안은 얼마 없는 결의를 다졌다.
파장이 한데 얽혀 있어 파악이 어렵긴 하지만, 이곳 경매장에 참석한 사람들 중 적어도 열 명 이상이 에스퍼였다. 도망칠 수단이 없으니 제게 있는 가이드로서의 능력이나마 발휘해야 했다.
무대에 오른 순간 온 힘을 다해 방사 가이딩을 하면, 에스퍼들은 분명 동요할 것이다.
이곳 지하 경매장만 하더라도 당장 폭주해도 이상하지 않은 사람들이 다섯은 넘었다. 당장 노예로 팔려나갈 판국이다. 매칭률 같은 건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에스퍼가 나를 사주기만 하면 된다. 에스퍼끼리 싸움이 붙어서 소란이 일어나면 더욱 좋고.
위험한 노림수인 데다, 가이드인 것이 들통 나버리겠지만……. 변태일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팔려갈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럴 바엔 차라리 에스퍼가 낫다. 가이딩을 이용해 구슬려 볼 여지가 조금은 있는 상대 아닌가.
무엇보다 소란이 일어나면…… 그렇게 해서라도 내 존재가 알려지면, 공작이 소문을 듣고 나를 찾아 나설지도 모른다. 염치없는 바람이지만, 이것 외에는 딱히 시도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네 차례다. 얼른 나가.”
노예상의 턱짓에 지안은 무대의 한가운데로 나아갔다.
조명 때문에 관객석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다들 동물 모양을 본뜬 가면을 쓰고 있는 것만은 확실히 보였다. 지안이 무대의 단상 위에 서자 기다렸단 듯 경매 진행자가 목청을 높였다.
“자, 보시다시피 희귀한 검은 머리의 소유자입니다. 피부가 야들야들하고 인상이 새침해서 길들이는 맛이 있지요! 벗겨놓으면 분명 더 즐거우실 겁니다.”
저질스러운 멘트에 지안은 와락 얼굴을 구기고 말았다. 앞선 경매를 보고 들은 덕분에 어떤 멘트가 나올지 대충 알고 있었음에도 별수 없이 불쾌감이 치민다. 할 수만 있다면 저 경매 진행자의 입에 불타는 조약돌을 물려 주고 싶을 정도다.
인간에서 비인간으로 추락하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 저들은 알까?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마저 내려놓은 자들과 같은 장소에 있어야 한다니…….
물건마냥 품평을 당하게 되었는데도 당장 화가 나기보단 오싹 소름이 돋았다. 속이 울렁거렸고, 당황스러움을 조금도 수습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런 불쾌감이야 어쨌든 자신은 경매품이었고, 경매는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자, 가격은 백 골드부터 시작입니다!”
지안은 관객석의 팻말이 여기저기서 들리는 것을 차가운 눈초리로 응시했다. 잠깐 사이 몸값이 삼백 골드까지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뭐든 하려면 지금이다.
지안은 심호흡하며 어둠에 둘러싸인 관객석을 응시했다. 방사 가이딩을 진행하면 돌이킬 수 없다. 어쩌면 이 선택은 실수일지도 모른다. 공작의 말에 따르면 이곳 세상엔 가이드가 없다지 않았나.
하지만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위기의 순간에 그나마 시도해볼 만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생각하는 사이, 몸값이 막 칠백 골드를 넘어섰다. 진행자가 흥분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칠백오십 골드입니다! 더 없으십니까?”
그 외침과 함께, 지안은 방사 가이딩을 펼쳤다.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가이딩 강도를 높이자, 관객석 곳곳에서 신음 같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개중에 몇몇은 의자에서 그대로 굴러떨어져 바닥을 기었다. 폭력적으로 쏟아부은 기운에 충격을 받아 기절한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상대가 기절하든 말든 무슨 상관인가? 에스퍼란 사실을 제외하면 죄다 노예 구입을 원하는 질 낮은 상대일 뿐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섬세하고 부드러운 가이딩을 해 줄 의사는 조금도 없었다.
관객석에서 일어난 소란으로 잠시 경매가 멈추자 지안은 가이딩 강도를 조금 낮췄다. 이 이상으로 혼란을 야기하면 경매가 중단될지도 몰랐다.
당황한 경매 진행자가 말할 타이밍을 놓친 사이, 지안이 말했다.
“어때? 아직도 내가 고작 칠백오십 골드짜리로 보이나?”
오만한 지안의 말에 경매 진행자가 당황한 얼굴로 지안을 윽박질렀다. 에스퍼가 아닌 일반인인 탓에 지안이 펼친 방사 가이딩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다.
“이년이 지금 뭐라는 거야! 닥치지 못해?”
금방이라도 때릴 듯 높이 치들어진 손에 지안은 반사적으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그의 손은, 무대에 난입한 한 에스퍼로 인해 가로막히고 말았다. 어느 순간 나타났는지 의아할 만큼 홀연한 난입이었다. 움직임이 빨랐다기보단…… 마치 공간을 뚫고 튀어나오듯 나타났다.
지안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남자는 의자에 구속된 채 목숨을 잃은 에스퍼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상위의 공간계 에스퍼라는 걸.
까마귀 반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사내의 시선이 지안에게 향하자 지안은 흠칫 놀라 방사 가이딩의 강도를 급격히 끌어올렸다. 그와 동시에 사내의 입매가 고통으로 뒤틀렸다. 그러나 꼿꼿하고 위압적인 자세만은 변함이 없었다.
이윽고, 그 입에서 지안의 몸값이 흘러나왔다.
“백만 골드.”
나직한 목소리였지만, 경매장의 모두가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손목을 잡힌 경매 진행자는 난폭한 표정을 급히 바꾸며 목청껏 외쳤다. 그야말로 급변에 가까운 태세 전환이었다.
“배, 백만? 백만 골드입니다!”
터무니없는 가격에 관객석이 술렁였다. 무대에 난입한 데다 백만 골드라는 가격이 나왔으니 이런 술렁임도 무리는 아니었다. 경매에 참여할 기회를 놓친 나머지 에스퍼들은 이 급작스러운 상황에 황망해하지도 못했다.
지안을 향해 백만 골드를 부른 남자가 손을 뻗었다.
“백만 골드 이상을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 이 여자는 내가 데려가겠다.”
그러나 막 손목이 붙잡히려던 순간, 화르륵 일어난 불길이 지안을 휘감았다.
놀란 것도 잠시, 지안은 얼떨떨한 얼굴로 불타는 제 두 손을 응시했다. 뜨거운 열기가 이글대며 온몸을 감싸 안았지만 고통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고통은커녕…… 보호받고 있다.
누구의 짓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에스퍼 중 하나의 소행이리라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다. 동시에 정체 모를 누군가의 턱이 지안의 머리에 얹어졌다.
“그렇게는 안 되겠는데.”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사납고 오만해 듣는 이를 움츠러들게 만드는 마력이 있었다. 지안은 이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노예상들에게 붙잡혀 있던 이상한 에스퍼. 내내 자신을 긴장하게 만들었던 그 남자다.
까마귀 가면을 쓴 남자와 대치하다 말고 그가 고개를 들어 관객석을 응시했다.
“이곳의 손님들 중엔 내 얼굴을 알고 있는 자가 몇 있을 것 같군. 그렇지 않은가?”
그 말이 사실인지 관객석에서 적지 않은 동요가 일었다. 지안이 방사 가이딩을 펼치며 일어났던 소란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소란이었다. 대부분의 관객이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입구를 향해 도망치기 시작한 것이다. 경매장 안은 순식간에 소란으로 가득찼다.
그러나 이들의 도망은 미수에 그쳤다. 입구에서 쏟아져 나온 기사들 탓이었다. 빛나는 철갑옷에 검과 창을 든 그들은 복장만 조금 다를 뿐, 공작성에서 본 기사들과 몹시 흡사했다.
지안은 몸을 돌려 등 뒤에서 자신을 껴안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황금을 박아넣은 듯한 눈동자가 그대로 눈을 맞춰 왔다. 그가 말했다.
“나는 일리아스 테리온이다. 너는…… 정체가 뭐지?”
가이드요.
하마터면 그렇게 말할 뻔했다. 지안은 목 아래까지 차오른 진실을 애써 삼켜내며 정신을 차렸다.
맘 같아선 그러는 당신이야말로 누구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럴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지하 경매장은 실시간으로 난장판이 되어가고 있었고, 지금 이 상황이 자신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는 것이 맞는지 아닌지 확신하기 힘들었다.
결국, 할 수 있는 말은 한정되어 있다.
“……지안.”
짤막하게 이름만 밝힌 지안은 몇 초 지나지 않아 사내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지하 경매장에 들이닥친 기사 중 하나가 이렇게 소리친 것이다.
“삼황자 전하! 보고드립니다! 노예상 수뇌부의 소탕이 완료되었습니다!”
그 말에 까마귀 가면을 쓴 사내가 혀를 찼다.
“황자였나.”
“알았다면 순순히 무릎을 꿇어라.”
“내가?”
“한 줌 재가 되고 싶지 않다면 그래야 할 텐데.”
“그 전에 네 목이 날아갈 수도 있지 않을까?”
황족에게 하는 말이라기엔 대단히 오만불손했다. 기사 중 하나가 “감히!” 하며 버럭 외치는 소리에 귀가 먹먹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적대적인 분위기 한가운데에서도 그는 태연했다. 도망치느라 급급한 다른 사람들과는 확연히 분리된 태도였다.
저런 태도도 무리는 아니다. 지안이 보기에 그는 황자인지 뭔지 하는 남자와 비슷한 수준의 에스퍼였다. 기사들 한둘이 달려들어도 눈 하나 깜짝 않고 해치울 게 분명하다. 무대에 난입한 그의 움직임만 봐도 쉽게 알 수 있었다. 기사들 역시 그걸 알기에 함부로 달려들지 않는 것 같았다.
삼황자와 한 차례 신경전을 벌인 그는 상황이 여의치 않다고 생각했는지, 신경전을 벌이다 말고 눈길을 돌려 지안을 응시했다. 까마귀 가면 너머로 드러난 붉은 눈동자가 일순간 번뜩였다.
“되찾으러 오겠다.”
그건 지안을 향한 선언이었다. 그리고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남자는 깨끗이 사라져 버렸다. 황자의 이능력이 아니었다면, 꼼짝없이 그와 함께 강제이동 당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