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지안은 창살에 바짝 매달렸다. 갇혀 있어 바깥의 상황을 자세히 알 순 없었지만, 웅성거리는 소음과 말발굽 소리가 배로 늘어난 것만은 확실했다. 분쟁은 아니었다. 노예상들이 서로 아는체하는 목소리가 들려왔으니까.
합류 같은 건가? 그런데 에스퍼가 노예상에게 붙잡히기도 하나?
아니지. 그럴 리 없다. 파장이 강력한 걸 보아 공작과 엇비슷한, 상위의 에스퍼임이 분명했다. 이렇게 강한 각성자를 노예상이 무슨 수로 붙잡겠는가? 그렇다면 이 에스퍼는 노예상 중 하나인 걸까?
최악의 경우엔, 이 에스퍼가 노예상 무리를 이끄는 책임자일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도망은 가망이 없다. 정황상 상황이 더 나빠진 거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지안은 서둘러 자신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운을 완벽히 차단하며 구석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바깥의 분위기를 살폈다.
그러던 와중, 지안과 함께 감옥 안에 갇혀 있던 여인 중 하나가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층 커진 바깥의 소음이 불안을 가중시켰던 것이다.
“……우린 어디로 가는 걸까요.”
자조적인 물음에 붙잡혀온 이들 몇몇이 나서서 그 말을 받아쳤다.
“누가 그걸 알겠어.”
“난 알아. 밤중에 노예상들이 말하는 걸 들었어. 제도 파가디안이라던데?”
“제도라니? 제국은 노예매매가 불법이잖아요.”
“법이 다 무슨 소용이야? 노예상들이 파가디안으로 향하는 이유가 뭐겠어! 높으신 귀족 나으리들이 분명 뒤를 봐주고 있는 거라고.”
지안은 이 침울한 논의를 주의 깊게 귀 기울여 들었다. 대부분 별 내용 없고 암울할 뿐인 이야기였지만,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흘려들을 순 없었다. 그게 뭐든 최소한 이곳 세상을 파악하는 데 얼마간이라도 도움이 될 테니까.
그러나 억울하게 붙잡혀온 사람들의 성토는 딱 거기까지였다. 노예상 하나가 마차를 신경질적으로 두들기자 모두 약속이나 한 듯 입을 다문 것이다.
“종알종알 시끄러워! 닥치지 못해!”
거친 윽박지름에 다들 두려운 표정으로 목을 움츠렸다.
무리도 아니다. 지안과 함께 갇혀 있는 이들은 대개 평범한 산촌 마을의 아가씨였고, 그게 아니면 가녀린 미청년, 혹은 어느 이름 모를 중소 도시 출신의 소녀였다. 대부분 젊고 어렸다.
그야말로 구역질 나는 상황이었다. 인간에 대한 환멸이 위를 가득 채워서 뭐라도 토해내고 싶었다. 하지만 속을 게워내 봤자 나올 것은 멀건 위액뿐이겠지.
‘……파가디안.’
제도 파가디안이라면, 공작에게서 들은 적이 있었다. 제국 테리온의 수도라고 했던가? 능력자들이 대거 몰려들어 있으니 되도록 가지 않는 편이 좋겠다던 공작의 당부가 기억난다.
지안은 웅크린 채 눈을 빛냈다. 제도에 에스퍼들이 그토록 많이 있다면 그중에 한 사람 정도는 선한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희망이 무색하게도, 다음 날 지안은 제도 파가디안의 지하 경매장에 선보여지게 되었다.
* * *
공작의 말대로 제도 파가디안은 에스퍼 밀집구역이었다. 튼튼한 나무 창살에 갇혀 이동되는 와중에도 지안은 수십 개의 파장을 느낄 수 있었다.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느껴지는 파장에 어안이 벙벙해질 정도였다. 에스퍼의 숫자에 놀랐기 때문은 아니었다. 중요한 건 파장이 느껴진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이토록 많은 파장이 이렇게나 선명히 느껴진다니!
이제껏 각성자들이 득실대는 협회에 매달 방문했음에도 지안은 한 번도 파장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랬는데…… 왜 이렇게 파장이 잘 느껴지는 거지? 파장이 느껴진다는 건 이곳에 모여든 에스퍼들과 매칭이 된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더욱 이해할 수가 없었다.
혼란스러운 와중에 지안은 퍼뜩, 저들 중 하나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가능성을 떠올렸다.
하지만 감옥에 갇혀 있는 상태로 어떻게 도움을 구한단 말인가? 숨죽인 채 노예상들의 움직임을 주시했지만 좀처럼 기회가 오지 않았다.
이윽고 낯선 장소에 도착한 지안은 말 그대로 ‘선별’을 당해야 했다.
선별을 담당한 것은 중년의 여인이었다. 그녀는 여자아이들을 상중하로 나누어 두었는데, 그 과정이 모멸스럽기 짝이 없었다. 위아래로 훑어보는 것은 물론, 피부 상태를 확인해봐야 한다며 맨몸에 물을 끼얹기까지 했다.
마지막 확인이라며 지안의 턱을 붙잡고 입 안을 살펴본 여자가 말했다.
“이가 하나도 상하지 않았네? 잘 사는 집 딸이었나 보지? 생김새도 꽤 이국적이고…… 머릿결도 좋아. 잘 가꿔진 태가 나네. 이건 상등품이야.”
이런 품평을 해 준 사람이 동성의 여자라 그나마 다행이라 해야 할까? 분노할 틈은 없었다. 여자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이동해야 했으니까. 지안은 한바탕 씻겨지고 입혀진 뒤 별도의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자, 어서 들어가.”
눈을 부라리는 감시인의 지시에 지안은 내키지 않는 표정을 애써 숨기며 감옥 안으로 들어섰다.
마음 같아선 얼굴에 침이라도 뱉어주고 싶었지만, 감시역인 남자가 셋이나 있었다. 그리고 그중 하나는 지안에게 주먹질한 남자였다. 저자의 폭력에 뺨이 퉁퉁 부어올랐던 걸 생각하면 감히 반항할 순 없는 노릇이다.
떠밀리듯 갇히게 된 감옥 안엔 지안과 엇비슷한 연령대의 남녀가 두려움에 찬 얼굴로 몸을 옹송그리고 앉아 있었다. 나름 상등품이라고 대우해주는 건지 바닥에는 카펫이 깔렸고, 깔고 앉을 방석도 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이 이 감옥 안에 갇힌 사람들에게 무슨 위로가 되겠는가? 덜컹대는 마차보다 훨씬 낫다는 건 인정하지만, 기분 더럽긴 매한가지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그 남자잖아.’
내내 긴장하며 가이딩 차단을 하게 만들었던 원흉이 이 감옥 안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에스퍼의 파장이 느껴지길래 분명히 노예상 두목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건가?
가이딩 차단에 조금 더 만전을 기한 지안은 쿠션 하나를 집어 든 후 대충 자리를 잡고 주저앉았다. 하지만 파장의 주인에게서 도무지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상등품으로 분류된 것이 몹시 이해가 가는 외모의 남자였다. 태양을 연상시키는 적금발에 신비로운 광채를 발하는 금빛 눈, 섬세한 피부결과 화려한 이목구비만 보면 어딘가의 왕자님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다. 나른한 자세를 통해 드러나는 분위기 또한 어딘가 남다른 데가 있었다.
시선을 느꼈는지 그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순간 움찔하게 될 정도로 형형한 눈빛이 몹시 인상적이었다. 질 낮은 옷자락에 감추어져 있지만 잘 단련된 몸을 가지고 있다는 걸 한눈에 알 수 있다.
에스퍼로서의 파장 역시 악시온과 거의 동급이었다. 등급 측정기가 없어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이 정도로 강한 파장이면 아무리 낮춰 잡아도 A급 에스퍼가 아닐까? 저런 사람이 어째서 이런 곳에 갇혀 있는 거지?
침울한 얼굴로 웅크린 다른 사람들과 완벽하게 유리되어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저 사람은 피식자가 아닌 포식자다. 어떤 특성을 가진 에스퍼인지 잘 모르지만, 적지 않은 힘을 숨기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노예상에게 잡힐 확률은…… 한없이 0에 수렴한다.
“내게 용건이 있나?”
싸늘한 목소리에 지안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저도 모르게 너무 오래 쳐다보고 말았다.
서둘러 고개를 가로저은 지안은 슬그머니 시선을 반대 방향으로 돌렸다. 저 남자가 에스퍼라는 걸 안 순간부터 호기심에 불이 붙었지만, 말투와 반응이 몹시 사나워서 더는 쳐다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저 남자와 협력해서 이곳을 탈출하는 건 어떨까 하는 계획은 수립되기도 전에 팍 사그라들었다.
목소리를 들어보니 성질머리가 장난이 아닐 것 같은데. 저런 사람에게 가이드란 걸 들키면 분명 좋은 꼴은 못 볼 것이다. 가이딩 해주고 뺨이나 맞지 않으면 다행 아닐까? 되도록 엮이지 않는 것이 좋다. 직감적으로 그런 판단이 섰다.
하지만 상대가 에스퍼라는 걸 안 이상, 어떻게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지안은 아닌 척 에스퍼인 남자를 흘끔흘끔 쳐다보았다.
‘왜 자꾸 쳐다보는 거지?’
지안의 태도에 일리아스, 테리온의 삼황자는 조금씩 얼굴을 구길 수밖에 없었다. 기껏 노예상들에게 붙잡혀주는 수모를 감수하며 노예상과 귀족들의 유착 관계를 도려낼 기회를 잡았는데, 정체 모를 여자가 다 망치게 생겼다.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 걸 보아 어딘가 타국의 귀족쯤 되는 모양인데……. 저렇게 흘끔거리면서도 제게 들키지 않았다고 자신하는 듯했다. 어리숙하기 이를 데 없는 태도에 일리아스는 슬며시 미간을 찌푸렸다. 저런 실력으로 어떻게 노예상에 잠입한 건지 알 수 없다.
그는 지안을 모종의 이유로 잠입한 타국의 귀족이라 결론 내렸다. 다들 훌쩍거리거나 침통한 얼굴로 시름에 잠겨 있는데 혼자만 멀쩡한 얼굴이니 그럴 만했다. 아니, 아주 멀쩡하다곤 할 수 없겠군. 뺨이 조금 부어올라 있으니까.
그런데 타국의 귀족이 제도 파가디안에서 암약하는 노예상 무리에 숨어들 이유가 대체 뭐지? 일리아스는 지안이라는 변수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고민이 무색하게도, 지안은 그 무엇도 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무엇도 할 수 없다는 게 맞겠다. 에스퍼라면 모를까, 힘없는 가이드가 뭘 할 수 있겠는가? 급기야 지안은 지하 경매장의 경매가 시작되려는 순간 걱정과 초조함이 뒤섞인 얼굴을 해 보여 일리아스를 헷갈리게 만들었다.
줄곧 지안을 주시하던 일리아스는 자신이 착각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었다. 놀라고 당황하는 지안의 모습은 붙잡혀 온 다른 여자들의 반응만큼이나 평범하고 일반적이었다.
자신처럼 모종의 의도를 가지고 잠입한 타국의 귀족이 아니라, 그저 눈치 없고 맹한 평민 여자인가. 일리아스는 서서히 지안에게서 신경을 끌 수 있었다. 계획에 방해만 되지 않는다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