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악시온은 수색 끝에 협곡 깊숙이 숨겨진 순록 가죽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간의 손실이 모두 보전되었음에도 그의 얼굴은 도통 펴질 줄 몰랐다. 어디에서도 지안의 그림자 하나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공작성의 기사들이 대거 몰려든 만달렌의 분위기는 흉흉 그 자체였다. 또한, 사건의 연관자로 의심받게 된 제닝스 상단은 지안을 찾기 전까진 만달렌을 떠나지 못하리란 엄포를 받게 되었다.
하지만 이 모든 조치가 어찌 성에 차랴. 지안이 사라진 지 사흘째가 되었을 무렵, 악시온은 반 미친 상태가 되어 에길을 심문했다. 지안과 함께 사라진 능력자와 제닝스 상단을 엮어낼 증거가 없었지만 심증만은 확실했던 것이다. 북부는 악시온의 영역이었고, 심증이 분명한 이상 증거가 없더라도 얼마든지 심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심문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다음 날, 에길이 변사체로 발견되었기 때문이었다. 사인은 독살이었다.
더욱 짙어진 의혹에 악시온은 에길의 수행원을 불러 심문했으나 결과는 같았다. 이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심문이 채 이루어지기도 전에 수행원이 독살당했다는 사실뿐이다.
이후로도 그는 수없이 상인들을 불러내 밤낮으로 조사를 벌였지만, 이들에게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대부분이 평범한 상인들이었고, 모두 이 사태에 영문을 몰라 하며 억울해하고 있었다.
분명한 것은 이 사건에 능력자가 개입되어 있다는 사실뿐이다. 그리고 그 능력자는 끄나풀을 제거하는 수완이 대단한 자였다. 추적의 단서는 완전히 사라져 버렸고, 혹시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흔적은 눈보라에 소복이 뒤덮이고 있었다.
초조함과 격분이 악시온을 갉아먹었다. 지안이 사라진 지 벌써 닷새가 되어 가고 있었다. 한숨도 제대로 잠들지 못한 채 협곡을 떠돌았지만, 옷자락 하나 발견하지 못했다.
그 이동 능력자는 지안이 가이드란 걸 알고 납치한 것일까? 그도 아니면, 북부의 비밀이 어딘가로 새어 나간 것인가?
악시온은 오데르겐가의 가신들을 하나씩 의심해 보았다. 그러나 전부 부질없는 짓이었다. 가이드의 존재는 북부 공작가에서도 극비 중의 극비로 취급되는 것이었고, 가신들 모두 적게는 수십 년, 많게는 대대로 수백 년을 함께한 이들이었다.
게다가 지안이 북부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최근의 일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이렇게 빨리 지안의 정체가 탄로 날 리 없었다.
생각이 꼬리를 물며 이어졌지만 악시온은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살벌한 북부의 추위가 그를 덮쳤고, 하얀 입김이 연기처럼 뿜어져 나왔다. 어느새 다시 시작된 눈보라가 악시온의 어깨 위를 하얗게 뒤덮었다.
북부의 추위는 그를 조금도 상하게 만들 순 없었다. 눈보라가 칼바람으로 바뀌더라도 언제나 그렇듯 그에겐 실바람과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러나 지안은 다르다. 악시온이 아는 지안은 일반인보다 더 허약했고 추위에 약했다. 악시온은 야속한 눈으로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응시했다. 아름답다고만 생각했던 눈보라가 난생처음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기후가 어떻든 자신은 괜찮을 테지만 지안은 달랐다. 기온이 영하로 내려갈수록 지안은 더욱 위협적인 상황에 내몰릴 것이다. 광활한 북부의 협곡 어딘가에서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되어도 이상하지 않다. 상상만으로도 전신이 서늘히 식어 내리고 손이 떨렸다.
지안의 옷을 좀 더 꼼꼼히 챙겼어야 했다는 후회. 공관에서 흘러나오는 피 냄새에 당황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자책. 무엇보다도 지안의 피신을 우선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비롯된 비통함이 악시온을 지배했다.
눈을 감고 뜰 때마다 눈 덮인 북부의 들판에서 지안의 시신을 발견하는 악몽이 반복되고 있었다. 이쯤 되니 차라리 지안이 자신에게서 도망친 것이길 바라게 될 정도였다.
그녀가 자신의 의지로 도망친 것이라면 어디에 있든 살아 있을 것 아닌가.
후회가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지안이 뭐라고 하든 공작성 바깥으로 데리고 나와선 안 됐었다. 항의를 묵살해서라도, 구금을 감행해서라도 지안을 단념시켰어야 했다. 그랬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와 후회한들 무슨 소용인가? 악시온은 힘없이 발길을 돌렸다.
스스로 불러낸 온갖 상념에 괴롭힘당하며 공관에 도착했을 무렵, 악시온의 시야 안으로 공관의 마당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방치된 썰매가 들어왔다.
썰매를 보며 반색하던 지안의 모습이 잊히질 않았다. 텅 빈 시선으로 한동안 썰매를 응시하던 악시온은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 * *
이처럼 악시온이 후회와 비탄에 젖은 시간을 보내고 있을 무렵,
그가 간절히 찾고 있는 지안은 쥐도 새도 모르게 제도 파가디안으로 이송되는 중이었다.
도움을 구하려 사람을 찾아갔는데 그 사람이 노예상일 확률은 대략 몇 퍼센트일까? 지안은 부질없는 생각을 하며 나무 창살에 등을 기댔다.
공작이 마련해주었던 흰 털옷은 몽땅 빼앗겼고, 간신히 얻어 걸친 것이라곤 걸레 냄새가 나는 천 쪼가리뿐이다. 그나마 속옷은 안 빼앗겨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어 한숨 외에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가장 심각한 건 휴대용 매칭률 검사기를 빼앗겼다는 것이다. 노예상들은 손목에 착용한 매칭률 검사기를 특이한 모양의 보석 팔찌 정도로 생각했고, 예외 없이 빼앗았다. 돌려달라고 몇 차례나 사정했으나 조롱과 핀잔만 들었을 뿐이다.
지안은 욱신거리는 뺨에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어젯밤만 해도 얻어맞은 뺨이 퉁퉁 부어올랐는데 밤사이 붓기가 조금 빠진 것 같았다. 사정이 통하지 않자 미친 척하고 매칭률 검사기를 내놓으라고 화를 낸 대가였다.
그래도…… 노예상을 상대로 이 정도에 그쳐 다행이었다.
질 나쁜 사람들이란 것 정도는 조우하자마자 알았지만, 설마 노예상인 줄은 몰랐다. 덕분에 이 모양 이 꼴이다. 계급제 사회의 야만성이 사람을 어떻게 취급하는지 새삼 그 단면을 엿본 기분이었다.
막막하고 처참한 와중에도 다행스러운 건, 노예상 중 누구도 에스퍼가 아니란 사실 정도일까. 덕분에 신경 써서 가이딩 차단을 하고 있지 않아도 괜찮았다. 만일 노예상 중 에스퍼가 있었다면 내내 가이딩 차단을 의식적으로 유지하는 피곤한 짓을 해야 했을 것이다.
생각하던 와중, 뻐드렁니가 인상적인 노예상 하나가 딱딱히 굳은 빵 몇 덩이를 감옥 안에 넣어주었다.
“어이. 먹어라.”
개에게 먹이를 주는 듯 집어 던진 빵조각은 더럽고 볼품없었다. 아무리 봐도 사람이 먹을 것으론 보이지 않았다. 먹고 탈이나 나지 않으면 다행이지 않을까. 덕분에 배가 고픈 와중에도 빵조각을 외면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사정이 달랐다. 지안보다 먼저 납치당한 몇몇 이들은 내내 허기와 갈증에 시달렸다. 배고픔으로 위장이 쥐어짜이는 이들에겐 빵에 먼지가 묻고 곰팡이가 슬어 있는 것쯤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지안과 함께 창살 안에 갇힌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손을 뻗어 빵인지 돌덩이인지 모를 정도로 딱딱한 빵을 집어 들었다.
묵묵히 그 모습을 외면하던 지안은 새삼 공작이 얼마나 신사적인 납치범이었는지를 깨닫고 말았다. 큰 바운더리 안에서 보면 그도 범죄자와 별반 다를 것이 없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공작의 태도는 노예상들과 비교하는 게 실례일 정도로 정중했다.
최소한의 인권을 보장해주었고, 이런저런 주장에도 수용적인 태도로 나를 상대해왔지 않은가. 지금이라면 공작성에 반쯤 감금당했던 걸 얼마든지 잊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생각을 마친 지안은 허탈한 얼굴로 몸을 웅크렸다. 설마 공작이 그리워질 줄이야.
이틀간 조롱과 핀잔, 폭력에 시달린 탓에 마음이 약해진 모양이다. 감옥으로 개조된 마차에 갇힌 채 짐짝처럼 실려 가고 있으니 위축되고 무기력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이렇게 팔려 가나? 노예로?
몇 번이나 고민해본 문제지만, 도망칠 수단과 방법이 전무하니 막막함만 더해질 뿐이다. 이쯤 되니 차라리 노예상 중에 에스퍼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가이드인 걸 드러내면 어떻게 이용해볼 여지라도 생길 것 아닌가.
……여러모로 최악이었다.
그래서 더욱 공작이 생각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만달렌으로 향하던 길에 공작이 했던 말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나는 그대 외의 가이드를 찾을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하지 않는다. 솔직히, 부질없는 짓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대의 의사를 따르기로 한 건…… 이 여정을 통해 그대의 의혹이 풀리길 바라서다.’
참 딱딱한 말이라고, 그땐 그렇게만 생각했다. 나를 감시하려고 따라나선 거면서 생색 한번 대단하다며 속으로 투덜거렸다.
대놓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불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가이드를 찾으려고 없는 의욕이나마 열심히 짜내고 있는데, 듣는 사람 힘 빠지게 부질없는 짓 운운하다니. 그런 생각을 하며 공작을 흘겨본 것이 기억난다.
어쩌면 지금 이 상황은 공작의 말에 담긴 배려를 알면서도 모른 척한 대가일지도 모르겠다. 공작이 제공한 보호를 감시로 매도한 대가를 이렇게 돌려받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엔 그게 최선이었다. 낯선 세상과 마주한 자신을 스스로 지키지 않는다면 대체 누가 날 지켜준단 말인가? 지금도 마찬가지다. 탈출이든 뭐든,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자력구제가 간절했다.
하지만 어떻게?
도돌이표처럼 되돌아오는 질문에 울적해지던 순간, 지안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피부를 찌르는 익숙한 감각 탓이었다. 분명했다. 에스퍼의 파장이 가까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