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화 (26/199)

26화

지안의 질문에 카빌의 눈빛이 번뜩였다. 공작이라는 호칭이 불붙지 못한 적개심을 부지깽이로 헤집어놓았기 때문이었다. 카빌은 흐릿한 눈으로 지안의 모습을 자세히 훑었다.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이동해와서 잘 몰랐는데 공기가 제법 훈훈했다. 잘 보니 벽난로의 장작은 값비싼 참나무고, 여자의 옷차림은 온통 흰색 털옷으로 척 보기에도 귀족이거나 돈 많은 상인이었다. 말하는 것을 들어보니 공작과도 어느 정도 연관이 있는 자인 듯싶었다.

“그렇다면? 나를 다시 공작에게 넘길 거요?”

사나운 질문에 지안은 한 발자국 그에게서 물러났다.

“……모르겠네요.”

“공작이 내 다리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소.”

“…….”

“큭큭…… 도둑질의 대가치곤 좀 심하지 않나?”

정확히는 만달렌 마을을 지배하기 위해 벌인 계략이었지만, 이런 구체적인 사항까진 카빌에게 전달되지 못했다. 에길이 입을 다문 탓이었다.

카빌은 고통을 참으며 지안의 앞에서 한바탕 웃어 재꼈다. 그러나 웃음 뒤에 이어진 그의 중얼거림은 사뭇 서글펐다.

“기왕 죽을 거, 고통 없이 가고 싶군.”

자신의 죽음을 알고 있는 사람 특유의 음성에 지안의 손끝이 떨렸다. 죄책감 탓이었다.

매칭률이 어떻게 나올지 잘 모르지만, 제가 가이딩을 해주지 못하는 상황은 아니었다. 매칭률 판독기가 없다면 모를까, 휴대용 판독기 또한 여전히 손목에 자리해 있다.

무엇보다 상대의 파장이 느껴지고 있지 않은가. 파장이 느껴지는 이상 매칭률은 따져볼 필요도 없다. 분명 가이딩이 가능할 테니까.

말인즉, 매칭률을 핑계로 가이딩을 기피하는 건 가이딩 거부에 불과하다.

아주 조금이라도 가이딩을 해주는 게 좋을까? 하지만 그랬다가 알지도 못하는 곳에 이동되기라도 하면?

바로 이런 고민을 하고 있던 순간, 악시온이 나타났다.

“지안!”

늘 노크를 하고 들어오던 평소와 달랐다. 별안간 문을 부수고 들이닥친 그는 지안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무시무시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공관의 문을 열기 직전, 문틈 사이로 스며 나온 피 냄새를 맡았기 때문이었다.

지안이 머무는 곳에서 나서는 안 될 냄새에 악시온은 망설임 없이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카빌을 보자마자 살기를 터뜨렸다.

그 살기에, 지안은 그대로 우뚝 굳어버렸다. 분명 무표정에 가까운 얼굴인데도 그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 알 수 있었다. 공작의 두 눈에서 흘러나오는 저릿한 살기에 발바닥에 그대로 땅에 붙어 버린 것 같았다.

반면, 카빌은 달랐다. 마약에 취했어도 각성자는 각성자. 카빌은 놀랍도록 기민하게 대응했다. 공작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 역시 상위의 각성자였던 것이다.

공작이 검 손잡이를 움켜쥐는 것을 본 카빌은 얼마 남지 않은 힘을 쥐어짜 능력을 사용했다. 뭘 하든 알량한 목숨의 연장 외에는 무엇도 얻을 수 없겠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단 발악이라도 해 보잔 것이 카빌의 선택이었다.

바로 이러한 판단으로, 카빌은 지안을 제 앞으로 이동시켰다.

벼락같이 검을 뽑아 들어 휘두르려던 악시온은, 자신의 검로에 지안이 나타나자 경악하며 검을 회수했다.

지안 역시 갑작스레 바뀐 위치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는데 발 디딘 자리가 바뀌다니. 이건 분명 저 이동 능력자의 짓이다. 지안은 섬뜩해진 기분으로 자신을 두 동강 낼 뻔한 악시온의 검을 응시했다.

그런 지안의 등 뒤에서 카빌이 킬킬거렸다.

“큭. 아쉽군 그래. 여자와 함께 나까지 베어버릴 줄 알았는데…… 뭐, 친인척이라도 되는 모양이지? 아니면 연인인가? 그래?”

그 말에 지안은 가라앉은 시선으로 카빌을 돌아보았다. 몇 마디 말일 뿐이지만 상대를 파악하는 덴 이것으로 충분했다. 폭주를 앞둔 에스퍼를 향한 번민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정체를 밝히지 않아서, 저 남자를 돕지 않아서 다행이다. 만일 가이딩을 해주었다면…… 이보다 더한 꼴을 당했을 것이다. 더는 저 남자를 안쓰러워하고 동정할 이유가 없었다. 망설임이 나를 살렸다.

깨달음과 함께, 온몸의 핏기가 가시는 것 같은 두려움이 지안을 자극했다.

지극한 두려움을 느낀 것은 악시온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마터면 지안을 벨 뻔했다! 어머니에 이어 또 한 번 가이드를 죽음으로 내몰 뻔한 것이다.

악시온은 검을 집어 던지고 그대로 주먹을 쥐었다. 의자에 구속되어 있는 카빌을 그대로 으깨어버릴 생각이었다. 그의 악력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하지만 카빌이 다시 한번 능력을 사용해 지안의 위치를 그의 앞으로 변경시키자, 매섭게 뻗어나가던 악시온의 주먹은 맥없이 방향을 달리하고 말았다. 당황해하며 주먹을 거두는 공작의 모습에 카빌은 이를 드러내며 히죽거렸다.

“이거 정말 좋은 고기 방패군.”

듣는 이를 섬뜩하게 만드는 이죽거림이 지안의 선택을 이끌어냈다. 고기 방패라니. 방금 그거, 날 두고 한 말이야?

“……공작님. 저 남자. 살려두셔야 하나요?”

“즉결 처형할 것이다.”

짤막한 이 대화에 카빌은 냉큼 끼어들었다.

“그럴 수나 있고?”

턱없는 만용이란 것 정도는 카빌도 알았다. 북부의 공작은 자신보다 훨씬 더 상위에 있는 능력자였고, 사실상 살아나갈 방법은 없었다.

그래도 죽기 전 공작을 당황시킬 수 있어서 즐거울 뿐이다. 공작에게 맞아 주저앉은 코뼈가 아직도 욱신거리지 않나. 졸렬하긴 해도 이렇게나마 보복을 할 수 있어 기뻤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지안의 가이딩이 카빌을 덮쳤다. 순식간에 뻗어 나온 강도 높은 방사 가이딩은, 악시온을 배제한 채 정확히 카빌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폭주를 앞둔 카빌에게 이는 축복인 동시에 위협이 되었다. 지안의 가이딩에 충격을 받아 어떤 사고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온몸의 감각이 극도로 끌어올려지는 아득함에 카빌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지금이에요!”

지안의 외침에 멍청히 굳어 버린 카빌의 얼굴 위로 악시온의 주먹이 직격했다. 가이딩에 사로잡힌 카빌로선 그 주먹을 피할 길이 없었다. 주먹이 아니라 검이 날아왔다 해도 개의치 않았을 것이다.

그 결과, 뼈가 부러지고 턱이 어긋나는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카빌은 잠시 정신을 잃었다.

그러나 정신을 잃는 와중에도 능력을 발휘하는 마지막 수완만은 남아 있었던 것이다. 안면이 함몰되는 와중에도 카빌의 신경은 온통 지안에게 집중되어 있었고, 그것은 그가 정신을 잃은 상황에서도 유효했다.

가이딩을 받아 잠깐 사이 회복된 능력이 최대치로 작용한 것이다.

“안 돼!”

순식간에 일어난 상황에 악시온은 망연자실했다. 손쓸 틈도 없이 지안과 카빌이 동시에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는 카빌이 마지막 한 방울의 힘까지 모조리 쏟아내 이룬 성과였다.

“안 돼…….”

악시온에게 잘못이 있다면 단 하나, 카빌의 숨통을 단번에 끊어내지 못했단 사실뿐이었다. 그 결과가 바로 이것이다. 악시온은 흔들리는 눈동자로 지안이 서 있던 자리를 응시했다.

조금 전만 해도 지안이 눈앞에 있었다. 분명 그랬는데……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극심한 공포가 악시온을 덮쳤다.

* * *

지안은 망연자실했다. 분명 공관이었는데,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 도착해버렸다. 벌떡 일어나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만달렌과 비슷한 풍광이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검은 나무가 울창한 숲이었다. 반쯤 녹은 눈이 여기저기 조금씩 쌓여 있었다.

“여, 여긴 대체…….”

당황하며 주변을 살피던 지안은 의자에 묶인 채로 이동한 카빌을 보고선 서둘러 그에게 다가갔다. 대체 어디로 온 거냐고, 여긴 어디냐고 항의할 생각이었다. 가이딩을 해 주며 달래면 다시 만달렌의 공관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카빌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지안은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이미 죽어 있었다. 공작의 주먹질에 그대로 절명한 것이다. 얼굴의 절반이 끔찍하게 함몰되어버린 카빌의 모습에 지안은 허리 숙여 구역질했다.

“욱……우욱!”

공포 영화 속의 분장이 아닌 진짜 시신이었다. 그 사실이 가져다준 충격에 지안은 속수무책으로 속을 비워내야 했다. 시신이야 공작성에서 숱하게 봐왔고, 게이트 사태 이후로 비위도 강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불시에 마주하게 되는 사람의 시신만은 아무리 봐도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지안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카빌의 시신을 등지고 걸었다.

정신없이 어두운 숲속을 헤매던 지안은 눈이 녹은 물웅덩이를 잘못 밟고 나서야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걸음을 멈췄다.

흙탕물로 축축하게 젖은 신발이 알려주고 있었다. 더는 숲속으로 향해선 안 된다고. 하지만 이대로 뒤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되돌아가 의자에 묶인 남자의 시신을 확인할 용기가…… 도무지 나지 않았다.

공황에 빠진 지안을 구원한 것은 멀리 숲속에 밝혀진 작은 횃불이었다. 사람의 흔적임이 분명한 불꽃의 일렁임이 나뭇가지 사이로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길 잃은 아이와 다를 바 없던 지안에게 그 불빛은 이정표 노릇을 톡톡히 해 주었다.

지안은 두 번 생각할 겨를도 없이 불빛이 비치는 곳을 향해 내달리듯 걸었다. 가서 도움을 요청할 생각이었다. 수중에 돈이 한 푼도 없다는 것은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저 불빛을 밝힌 자들이 어떤 사람일지에 관해서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렇게 지안은, 노예상들과 조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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