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치료사 아슬락은 겁에 질린 심정으로 카빌의 두 다리를 지혈하고 붕대를 감았다. 보아하니 얼마 살지 못할 것이 분명하지만……. 사람의 멀쩡한 다리가 상하는 장면은 치료사인 아슬락에게도 꽤나 충격적인 것이었다.
“치료를 마쳤습니다.”
고갯짓으로 아슬락을 물린 악시온은 기사를 시켜 카빌을 깨웠다. 명을 받은 기사가 양동이에 얼음물을 담아 카빌의 머리에 쏟아붓자 카빌이 몸서리치며 눈을 떴다.
그가 가장 먼저 깨달은 것은 자신의 두 다리가 사라졌다는 사실이었다. 진통제의 효능으로 고통이 경감되어 있긴 했으나, 그렇다고 두 다리가 사라진 고통이 아주 가신 것은 아니었다.
“으, 으아아! 내…… 내 다리가!”
카빌의 절규는 오래 가지 못했다. 혹독한 심문이 이어졌기 때문이었다. 악시온의 주먹이 비명을 지르는 카빌의 얼굴에 몇 차례 꽂히자 비명은 곧 사그라들었다.
얼마 안 가 꼴사나운 훌쩍거림과 거친 호흡만이 카빌의 입술을 오갔다.
“순록 가죽은 어디다 숨겼지?”
“혀, 협곡…… 협곡 사이에…….”
“제닝스 상단과 짜고 벌인 일인가?”
이 질문이 몽롱한 카빌의 정신을 어느 정도 일깨웠다.
제닝스 상단은 밤까마귀 길드의 산하 상단 중 하나였으며, 카빌은 이 길드에 소속된 길드원이었다. 눈앞의 공작이 무지막지하긴 하지만 제닝스 상단의 실직적 주인, 길드장 아론 베르그만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저 혼자…… 벌인 일입니다. 진통제 때문에…… 돈이 필요해져서…….”
“거짓말 마라.”
혼자 벌인 일이라기엔 사건의 규모가 작지 않았다. 심지어 도둑질을 두 번이나 반복한 것도 어떤 의도가 있음을, 그 뒤에 다른 무리가 있음을 합리적으로 의심하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아무리 이동 능력자라 해도 혼자서 그 많은 순록 가죽을 옮길 순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카빌은 이성이 명료한 상태가 아니었고, 대개 이런 자들은 생각이 짧고 계획이 엉성하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진통제를 구하려 일을 벌였다는 그의 말은 궁색하면서도 썩 알맞은 변명이었다.
다만, 이 변명을 공작이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카빌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두 다리가 없어진 시점에서 그는 이미 죽은 목숨이었다.
애초에 연명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이기도 했다. 언제 폭주로 죽을지 알 수 없어 두려워하다 결국 중독성이 강한 풀까지 손대지 않았나. 끔찍한 꼴을 당하긴 했지만, 여태 저질러온 죄악을 생각하면 응당 알맞은 처우다. 카빌은 몽롱한 의식으로 그렇게 스스로를 반추했다.
“네놈이 혼자서 이런 일을 저질렀을 리 없다. 분명 배후 세력이 있겠지. 이름을 대라.”
악시온이 윽박질렀지만, 카빌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였다. 강도 높은 심문을 한다는 건 제닝스 상단과 자신을 엮을 증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썩어도 준치라고, 가물한 정신으로도 거기까지 생각할 여력은 남아 있었다.
카빌은 묵묵히 남은 심문을 견뎠다. 이어지는 몽둥이질에 뼈가 부러지고 살이 찢어졌지만 폭주의 고통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견디다 보면 끝이 올 것이고, 죽음은 차라리 평온할 것이다. 맨정신으로 폭주의 고통에 시달리느니 매질에 정신을 잃는 게 더 나았다.
* * *
새의 부리가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에길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문을 열자 까마귀 한 마리가 기다렸단 듯 입에 문 쪽지를 떨어뜨리고 날아갔다. 에길은 서둘러 쪽지를 펼쳐 보았다.
길드의 명령은 단순했다. 일이 더 복잡해지기 전에 카빌을 처리할 것. 만달렌에서의 철수. 둘 다 크게 예상을 벗어나지 않은 명령이었다.
치료사의 집에서 카빌이 심문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파악하고 있다. 북부의 기사들이 들이닥치지 않은 걸 보면 아직은 얌전히 입을 다물고 있는 모양이지만…… 녀석이 입을 여는 건 시간문제에 불과하다.
다행스러운 것은 카빌이 이동 능력자란 사실이다. 늘 그랬듯 감시가 좀 덜하다 싶어지면 알아서 이동해 올 것이다. 그 순간 진통제 대신 구비한 독을 건네주면 끝이다.
에길은 카빌이 자신을 찾아오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지금까지 늘 그래 왔기 때문이었다.
그 예상은 딱 절반 정도 들어맞았다.
공작의 심문이 잠시 멈추고 기사들의 감시가 소홀해지자, 카빌은 에길의 도움을 얻기 위해 능력의 사용을 감행했다.
문제는, 원래도 명료하지 않았던 의식과 심문으로 인해 손상된 인지능력이었다. 그는 에길이 머무는 곳의 위치를, 카빌을 좀처럼 기억해낼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공작이 자리를 비운 지금의 기회를 놓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불명확하고 위태로운 의식상태로 이동을 감행한 카빌은, 의자째로 어느 훈훈한 공간에 툭 떨구어졌다.
“컥!”
의자의 다리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기울어졌고, 바닥에 머리를 부딪친 순간 카빌은 잠시 눈앞에서 불똥이 튀는 것을 보았다.
머리를 부딪친 충격으로 생긴 환각은 아니었다. 정말로 장작을 태우는 불똥이 탁탁 소리를 내며 튀고 있었다. 뒤이어 여자의 비명소리도 짤막하게 들린 것 같다. 카빌은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애써 돌리며 고개를 들었다.
여기가 어디지? 에길이 머무는 곳으로 온 것 같진 않은데……. 다시 한번 이동을 감행하기엔 상태가 좋지 않았다. 능력을 쓴 여파로 심각한 고통이 밀려오고 있었다.
카빌은 숨을 몰아쉬었다. 어디로 이동해왔는지 알 수 없지만, 이대로 이동 능력을 다시 사용했다간 산 채로 땅속에 갇힐 수도 있다. 조금이라도 정신을 차려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진통제라도 좀 씹으면 정신이 들 것도 같지만…… 다 빼앗겨 버린 마당 아닌가. 카빌은 바닥에 얼굴을 박은 채로 큭큭거렸다. 언제고 비참한 최후를 맞을 거라는 건 알았지만, 그게 지금인 줄은 몰랐다.
그 때였다.
“누구세요?!”
낯선 여자의 목소리에 카빌은 고개를 들었다. 밧줄로 의자에 몸이 묶여 있어 그마저 힘들었으나. 목소리의 주인을 찾아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카빌의 시야 안으로 경계심 가득한 얼굴을 한 지안이 모습이 비쳤다.
목숨이 경각에 달하자 본능적으로 가이드를 찾아 이동하고 말았다는 것을 카빌은 알지 못했다. 그는 가이드의 존재 자체를 몰랐고, 그렇기에 가이드를 눈앞에 두고도 가이드를 알아볼 수 없었다.
평소라면 지안이 무심코 흘리고 다니는 기운으로 인해 지안에게서 무언가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안은 의식적으로 가이딩을 단단히 차단하고 있었다.
때문에 본능적으로 가이드의 앞에 나타나고만 카빌의 입에서 나온 말은 꽤나 허망한 것이었다.
“물, 물 좀…….”
사람이라면 누구든 들어줄 만한 요구였다. 이 남자가 허공을 가르며 나타나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게다가 남자에게선 에스퍼임을 증명하는 파장이 위태롭게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가이딩 차단을 하고 있긴 하지만, 접촉을 통해 내가 가이드란 걸 알아차리면 어떡하지? 이런 고민을 하느라 지안은 물 주전자를 향해 가지도 못했다. 카빌이 기침하며 피를 뱉어내지 않았다면 조금 더 오래 그런 상태였을 것이다.
“피! 피가!”
고민 끝에 지안은 의자째로 카빌을 일으켜 앉히고 물컵을 그의 입에 대어 주었다. 가까이 다가가니 언제 폭주해도 이상하지 않은 파장이 피부를 쿡쿡 찔러댔다.
그래도 공작을 처음 만났던 순간 느꼈던 파장보다는 조금 덜 심각한 편이다. 당시 공작은 당장 십 초 후에 폭주할 것이 분명해 보였으나, 눈앞의 이 남자는 폭주에 이르기까지 아직 시간이 남았다.
하지만 그래 봤자 일주일에서 한 달 사이일 테니 이 남자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으리란 사실엔 변함이 없다.
“……고, 고맙소.”
간신히 그렇게 말한 카빌을 내려다보며 지안은 첨예한 갈등에 휩싸였다.
상대는 하필이면 이동 능력을 가진 에스퍼였고, 그렇기에 더더욱 가이딩을 해주기에 꺼려지는 측면이 있었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정체를 모르는 사람 아닌가. 손을 잡는 정도의 가이딩조차 위험했다.
하지만 곧 죽을 것이 선명히 보이는 사람이다. 내버려 두어도 괜찮은 건가? 내버려 둬야 하나?
……모르겠다.
지안은 판단을 미루기로 결심했다. 때로 어떤 일은 깊이 생각하지 않는 편이 좋다.
바로 그런 결정을 내린 순간, 카빌의 두 다리가 지안의 눈에 들어왔다. 그의 두 다리는 잘려 나가 있었다. 지혈이 잘되지 않았는지 붕대 사이로 스며 나오는 피가 흥건했다.
“헉…….”
헛숨을 들이켜며 애써 침착하게 살펴보자 그제야 눈에 들어오는 것이 몇 가지 더 있었다. 구타를 당한 듯 주저앉아버린 코와 찢어진 입술, 추위를 견디기에 적합하지 않은 한 겹의 낡은 옷, 그리고 그 사이로 보이는 보라색 멍 자국. 폭주가 아니라 과다출혈이나 쇼크사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모양새다. 냉정해지려 애쓰는 와중에도 안쓰러움이 파도처럼 몰려들었다.
지안은 문득, 이 이동 능력자의 위치를 짚어준 사람이 자신이란 것을 깨달았다. 그 사실이 지안을 몸서리치게 만들었다. 도둑질을 했으니 응당 처벌을 받아야 마땅하지만, 사람을 이렇게 만신창이로 만들다니.
“당신을 이렇게 만든 사람은, 공작님인가요?”